[바깥 세상]

[일본]'미투 열풍' 일본엔 없다 (김수혜 특파원, 조선일보)

colorprom 2018. 5. 21. 17:30



[특파원 리포트] '미투 열풍' 일본엔 없다

     

 
입력 2018.05.21 03:13

김수혜 도쿄특파원
김수혜 도쿄특파원


일본의 경제 관료가 관료로 출세할 수 있는 최고위 보직은 '재무성 차관'이다.
이른바 '최강 관청의 최고 간부'다. 정치적 결단을 내리는 자리는 아니지만 나라 살림 실무를 총지휘한다.
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여기자들을 상습적으로 성희롱하다 들켜 지난달 사표를 냈다.
여기까지는 서곡이고 진짜 풍파는 다음에 왔다.

물러난 차관은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가 아끼던 '유능한' 사람이었다.
아소는 자민당 2대 파벌을 이끄는 수장이자, 아베 정권의 2인자다.
그는 첫 보도가 나온 뒤 "일방이 하는 주장이니 더 조사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기자들이 피해자 인권을 따지자 "그럼 차관 인권은 없느냐"고 맞받았다.
아소는 "차관이 (억울하게) 엮인 것 같다"고도 했다. 언론이 사람 잡았다는 뜻이다.

과연 그럴까. 해당 차관이 성희롱을 했다는 것 그 자체는 뒤집히지 않는 팩트다.
차관이 기자에게 "안아도 될까?" "가슴 만져도 될까?" "손 묶어도 좋아?"라고 '히야카시(冷やかし)'하는
녹음 파일을 시사주간지가 일찌감치 공개했다.
상대는 질색하는데 자기 딴엔 농담이라고 끈질기게 주책 부리는 게 히야카시다.

남은 논점은 이게 과연 '사표 받고 끝날 일이냐 아니냐'인데,
아소 부총리는 여론이 끓건 말건 시종 "'성희롱 죄'라는 죄는 없다"고 우겼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올 초 한국을 강타한 '미투 열풍'을 생각했다.
성희롱·성추행·성차별 자체만 따지면 우리도 일본더러 뭐라 할 처지가 못 된다.
술 문화, 조직 문화, 정치 풍토 모두 우리가 더 거칠었다.

일본과 달랐던 건 '반성 속도'다.

다들 자기 언동은 괜찮은 줄 알고 살아오긴 한·일이 오십보백보다.
다만 한국인은 남이 '쎄게' 두들겨 맞는 걸 볼 때마다, 뜨끔해서 후닥닥 몸가짐을 바로잡았다.
얼차려를 받고 나면 집총 속도가 달라지듯, 일단은 기민하게 반성했다.

두 나라가 다른 건 한국 사회에 수차례 휘몰아친 '도덕적 얼차려 태풍'이 일본에는 없었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다.
일본이 얼마나 선진국인지 절감하다가도 '그렇지만 답답하다'고 숨이 콱 막히는 게 이럴 때다.

다른 분야처럼 이 분야에서도 한국은 적잖은 성장통(痛)을 겪었다.
그래도 길게 보면 우리는 바르게 빨리 변했다.

짚고 넘어가자면 , 아소 부총리가 "'성희롱 죄'라는 죄는 없다"고 말한 건 팩트에 어긋난다.
어려운 말로 모호하게 써놔서 그렇지, 일본 민법·형법은 둘 다 성희롱이 불법이라고 못 박고 있다.
아소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사막의 모래톱이 바람 불면 옮겨가듯 도덕도 법도 시대에 따라 이동한다.
더 많은 사람이 바라는 이익에 부합하게 변해가면 그게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