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독자 ESSAY] 日 벚꽃 외교에 맞선 이승만
입력 : 2018.04.20 03:10
우리의 진해군항제와 비슷한 시기에 세계 외교 1번지인 미국 워싱턴DC에서도 벚꽃 축제가 열린다.
포토맥 강변을 따라 만개한 벚꽃을 즐기기 위해 전 세계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찾는다고 한다.
이곳 벚꽃 거리는 1912년 미국과 일본 우호의 상징으로
당시 도쿄시장이던 오자키 유키오가 3000여 그루의 벚나무를 기증하면서 조성됐다.
매년 열리는 축제에는 일본 문화 행사가 열리는 등 일본을 홍보하는 거대한 문화 상품이 되었다.
일본의 벚나무 기증은 일제(日帝)의 조선 강점 도화선이 된 미·일 간 '가쓰라-태프트 협약' 이후
일본의 벚나무 기증은 일제(日帝)의 조선 강점 도화선이 된 미·일 간 '가쓰라-태프트 협약' 이후
양국이 가까워진 것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워싱턴 벚꽃 축제의 이면에는 이 협약을 통해 한국의 보호권을 미국으로부터 인정받고,
벚꽃을 미·일 친선 외교에 이용한 두 얼굴의 일본이 숨어 있는 것이다.
당초 이곳의 벚꽃은 일본이 주산지로 알려져 '재패니스 체리 트리(Japanese Cherry Tree)'라고 불렸는데,
당초 이곳의 벚꽃은 일본이 주산지로 알려져 '재패니스 체리 트리(Japanese Cherry Tree)'라고 불렸는데,
사실은 한국이 원산지라는 것을 알린 이가 이승만이다.
사연은 이렇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미국에서는 벚나무들을 베어버리자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미국에 망명 중인 이승만은 자신이 설립한 한미협회를 통해 미국 정부에
"저 재패니스 체리의 원산지는 한국의 제주도와 울릉도이며,
삼국시대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니 이름을 코리안 체리(Korean Cherry)로 불러달라"고
요청하고 벌목을 막았다.
미 의회도서관에서 일본 백과사전을 뒤져 일본의 왕벚꽃이 한국에서 전래되었다는 내용을 찾아내
미 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당시 미 정부는 확실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승만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대신 '오리엔탈 체리(Oriental Cherry)'라는 중립적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통보했다.
이승만이 실망하자 한국에서 선교사 활동을 했던 폴 더글러스 아메리칸대 총장이
"그럼 우리 학교에 한국 벚나무를 심자"고 제의했다.
이승만은 1943년 4월 8일 워싱턴DC 아메리칸대 교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24주년을 기념하는 제주 왕벚나무 심기 행사를 열었다.
미국의 일간지 아메리칸 이글(THE AMERICAN EAGLE)은 같은 해 4월 13일 자에
"일본산으로 잘못 알려진 워싱턴의 벚나무들에 진짜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
이승만 박사 등이 한국 벚나무 네 그루를 심었다"고 보도했다.
표석에는 '이승만 박사가 한국 독립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담아 식수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날 제주 왕벚나무 식수는 30여년 동안 일본 이름으로 불려온 우리 벚나무의 또 다른 '독립선언'이었다.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산림연구소의 김찬수 박사는 지난 2008년 워싱턴을 방문해
포토맥 강변의 벚나무 표본을 채취해 수차례 유전자(DNA) 검사를 한 결과,
제주산 왕벚나무와 같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승만이 독립을 염원하며 심은 벚꽃나무는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했고,
이것이 인연이 돼 2011년에는 아메리칸대 교정에 '한국정원'이 들어섰다.
100여년 전 일본은 벚꽃을 미·일 간 친선의 상징으로 삼으려 했고,
이승만은 한국 벚나무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면서 민족의 염원을 담아 벚나무를 심었다.
워싱턴 벚나무의 우리 이름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것은 또 다른 독립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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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1940년대 美 우표 '핍박받는 나라'… 그의 설득으로 태극기 실려
입력 : 2018.04.14 03:01
[김동길의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21) 이승만(1875~1965)
"고종 퇴위 부르짖다 사형선고 받고 5년7개월 옥살이한 그
미국서 독립운동하던 중 우정 당국 찾아가 태극기 넣어야 한다고 주장
부정선거로 또다시 망명길… 좁은 병실서 말년 보내며 단 한 번도 조국 원망 안해"
여러 해 전 배재학교 출신 졸업생들을 만나 그들에게 한마디 격려사를 하게 됐다.
"배재 출신들은 큰일을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왜?
고조선은 단군이 세웠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을 세운 인물은 배재학당을 1897년 졸업한 이승만이기 때문이다."
졸업생들은 모두 그 말을 듣고 박수 갈채를 보냈다.
이승만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마디 덧붙이고 격려사를 끝냈다.
나는 지금도 그가 없었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16대 조상이 양녕대군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16대 조상이 양녕대군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가난하기 짝이 없는 몰락한 양반집 아들로 태어났다.
한말의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 과거에 장원급제해 가문을 빛내고 싶었지만,
매관매직이 횡행하던 시절이라 낙방했다.
실망을 딛고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한 그는
졸업식에서 유창한 영어 연설 덕에 선교사들의 총애를 받아
졸업과 동시에 그 학교에서 후배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승만은 독립협회에 가담해 1898년 고종의 퇴위를 부르짖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승만은 독립협회에 가담해 1898년 고종의 퇴위를 부르짖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일로 5년 7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고 특별 사면됐다.
이후 민영환과 한규설의 주선으로 한국이 독립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
존 헤이 국무장관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면담도 했지만,
대세는 기울어져 한국을 일본의 세력 범위 내에 밀어 넣는 루트·다카히라 협약이 맺어졌다.
그러나 이승만은 낙심하지 않고 미국 땅에 머물며 학업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낙심하지 않고 미국 땅에 머물며 학업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조지워싱턴대학에 편입해 졸업했고,
뒤이어 하버드대학 대학원을 거쳐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으로 탄생한 상해임시정부는 그를 초대 국무총리로 선임했고
1919년 독립만세운동으로 탄생한 상해임시정부는 그를 초대 국무총리로 선임했고
그 이듬해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지만, 임시정부 내 분열과 반목을 견디다 못해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때부터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미주를 무대로 독립을 위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당시 다 떨어진 와이셔츠를 입고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을 거니는 그를 보고
조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리라고 짐작한 이는 없었다.
1940년대 미국 우정국이 발행한 기념우표 시리즈의 주제는 '핍박받는 나라'들이었다.
1940년대 미국 우정국이 발행한 기념우표 시리즈의 주제는 '핍박받는 나라'들이었다.
10국이 선정됐는데 폴란드, 헝가리 등 나라의 국기가 실려 있었고 맨 마지막 10번째에 태극기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는 놀라서 필라델피아에 살던 건축가인 동시에 우표 수집의 대가이던 이병두씨를 만나
어떻게 태극기가 핍박받는 나라 시리즈에 끼어들 수 있었는가 물었다.
그는 이승만이 미국 우정 당국을 방문해
일본에 강제로 합방돼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한국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승만의 그런 노력과 독립투사들의 끈질긴 투쟁이 열매를 맺어
이승만의 그런 노력과 독립투사들의 끈질긴 투쟁이 열매를 맺어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이 확정되고 포츠담 회담에서 그 결정이 재확인됐다.
그러나 해방의 그날이 노인이 된 김구나 이승만에게 있어서는 너무 뒤늦게 찾아온 기쁨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운형은 1947년 암살당했고
김구는 1949년에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저격당해 쓰러짐으로써 정계가 어수선해진 가운데
당시 한국의 정치판은 이승만만이 인물로 남게 됐다.
그는 이미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는 세계를 정복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이미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는 세계를 정복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한반도가 분단돼 소련이 지원하는 인민공화국이 북에 설립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38선 이남에 되도록 빨리 대한민국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만일 그에게 그런 확고한 신념이 없었다면 1948년 대한민국은 출범하지 못했을 것이다.
6·25사변이 터졌을 때 그의 투지와 결단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틀림없이 세계 지도에서 지워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승만은 무리하게 3선 개헌을 밀어붙여 정치판을 혼란하게 만들었고
이승만은 무리하게 3선 개헌을 밀어붙여 정치판을 혼란하게 만들었고
3·15 부정선거 때문에 확고부동하던 정치적 바탕도 흔들리고 말았다.
물론 그가 나서서 3·15 부정선거를 꾸민 일은 없고 단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자들의 흉계였지만,
4·19로 인해 이승만은 일단 국민에게 사과하며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
홀연히 또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5년의 세월을 망명지에서 무료하게 지내다가 91세에 노환으로 좁은 병실에서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승만에 대해 가장 큰 원한을 품고 있는 자는 김일성이었을 것이다.
이승만에 대해 가장 큰 원한을 품고 있는 자는 김일성이었을 것이다.
북의 인민공화국은 핵으로 무장하고 아직도 적화통일을 꿈꾸고 있다.
이승만이 살아 있었다면 대한민국이 변함없이 한반도의 유일무이한 합법 정부였을 것이고
오늘과 같은 정치적 위기도 오지 않았 을 것이다.
김일성의 눈으로 대한민국을 본다면 이승만을 역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 적화통일을 희망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국민이 절대다수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말년에 허술하고 좁다란 병실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이승만은
말년에 허술하고 좁다란 병실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이승만은
단 한마디도 대한민국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에머슨의 말대로 위대한 것은 이해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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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13/2018041301755.html
- 반공포로 석방으로써 한미조약을 얻어냈다는 이야기. 여기에는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이 빠져 있다.
- 김일성이 써준 역사가 사악한 농담임은 다 안다.
- 해방직후에 국제정세를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유일한분이다.
- 하와이에 은거중이든 이승만 대통령을 돌보며 생활하든 후랜체스카 부인의 콩나물밥 노래를 아는가 - 그 내외분들의 일상 밥상에데한 노래 - 오늘도 콩나물밥 된장찌게 - 그 내외분들이 하와이에서 돌아가실때까지 밥상에 오른 매뉴는 - 콩나물밥 된장찌게 뿐이엇다 - 그 많든 관료들 그많든 아부꾼들 ?
- 이 희귀 동영상을 보면 https://www.youtube.com/watch?v=AZY-VJNZcCQ 이승만의 영어가 어느 정도인지 안다. 동영상 3:45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를 "General Eisenhower"라고 지칭한다. 미국과의 외교사에 이런 무례가 또 있었는지, 누가 알면 나도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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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의 뉴스로책읽기] [25] 사귀고 싶은 역사의 인물들
입력 : 2016.12.06 03:09
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
런던의 국립초상화박물관에는
영국을 몇 세기 사이에 유럽의 후진국에서 최강국으로 만든 기라성 같은 인물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러나 '위인 숭배'적인 엄숙한 분위기보다
인물마다 그의 행적과 함께 독특한 개성과 괴벽(怪癖)이 소개돼 있다.
그 다양한 인물들의 이상과 목표와 욕망과 아집이 투합하거나 충돌하면서
영국 역사라는 화려한 교향곡을 생성했다.
반면 우리나라 역사는 성군과 폭군, 충신과 간신의 투쟁사처럼 제시되어 인간적 친근감을 느끼기 어렵다.
반면 우리나라 역사는 성군과 폭군, 충신과 간신의 투쟁사처럼 제시되어 인간적 친근감을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 역사가 암기 과목이 되어버렸다.
근자에 와서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대한민국은
수립되지 말았어야 하는 나라, 모든 단계에서 잘못된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교과서가
전국 중고교에서 쓰이고 있는 것이 안타깝고 통탄스러웠다.
이번에 국사편찬위원회가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공개한
국정 역사 교과서와 기존 교과서들 간 비교 포인트를 대강 살펴보았다.
몇몇 포인트만 발췌한 텍스트여서
우리 역사가 다양한 요인의 상호작용으로 빚어진 흥미로운 흐름으로 제시되어 있는지는 판단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현행 검인정 교과서들의 문제점인
대한민국 정통성의 노골적 또는 실질적 부인,
청소년의 마음에 조국에 대한 수치심과 혐오감을 심어 줄 왜곡과 편파성 등이
대체로 잘 시정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더 욕심을 낸다면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조명이 보강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책 속의 역사가 사건 기록지를 넘어 생동하는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를 만든 인물들을 생생하게 전달해주어야 한다.
비록 우리나라가 개성을 억압하는 사회였지만 그럼에도 개성과 기개를 지닌 인물이 많았다.
송시열이 중병이 들었을 때 정적(政敵) 허목에게 약 처방을 부탁해서
송시열이 중병이 들었을 때 정적(政敵) 허목에게 약 처방을 부탁해서
그 처방대로 약을 지어 먹고 나은 이야기,
정약용이 남긴 불후의 저술들은 그가 겪은 억울한 귀양살이의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유학길에 올라 단 5년 반 만에
조지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모두 받아 미국 학계를 놀라게 한 천재여서
해방 후 초대 대통령감 1순위로 인식되었던 일 등을 '인물 만나기 코너' 같은 곳에 소개한다면 어떨까.
역사 공부는 괴로운 암기 작업이 아니라 멋쟁이 친구들을 찾아 떠나는 행복한 오디세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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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05/2016120502829.html
[조선인터뷰]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한미방위조약 체결은 자랑스러운 역사"
입력 : 2010.06.14 03:10 | 수정 : 2010.06.27 20:17
연극 '6·25전쟁과 이승만'무대 올리는 연출가 정진수 교수
종전 직전 반공포로 석방반공투사 처칠도 '충격'우리 국민만 중요성 몰라
난 이념·사상 잘 몰라그저 상식적으로 생각지도자 리더십 긍정할뿐
재미보다 의미 추구한 작품30~40대들이 자녀와 보고토론의 소재로 삼았으면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을 제작해 국내 뮤지컬 대중화 시대를 열었던 연출가인 정진수(鄭鎭守ㆍ66)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국내 연극계에서는 최초로 이승만 초대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 '6·25전쟁과 이승만'을 무대에 올리기 때문이다.
반공포로 석방이 전격 단행된 지 정확히 57년이 되는 6월 18일부터 6월 27일까지 (재) 한국공연예술센터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민중극단이 공연하는 이 작품의 대본과 연출을 맡아 막바지 연습에 한창인 정 교수를 연습실이 있는 광화문 근처 커피숍에서 만났다. 커피숍 창으로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월드컵 그리스전 응원을 위해 붉은 악마들이 속속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으로 몰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장암4기 진단을 받고 대수술 후 항암치료 중이라 했지만 그의 얼굴에 병색은 전혀 없어 보였다.
반공포로 석방이 전격 단행된 지 정확히 57년이 되는 6월 18일부터 6월 27일까지 (재) 한국공연예술센터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민중극단이 공연하는 이 작품의 대본과 연출을 맡아 막바지 연습에 한창인 정 교수를 연습실이 있는 광화문 근처 커피숍에서 만났다. 커피숍 창으로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월드컵 그리스전 응원을 위해 붉은 악마들이 속속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으로 몰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장암4기 진단을 받고 대수술 후 항암치료 중이라 했지만 그의 얼굴에 병색은 전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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