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7) 이주일(1940~2002)

colorprom 2018. 1. 6. 18:41


[Why] 외아들 장례 3일 만에 방송 출연5천만을 웃긴 희대의 코미디언

  •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 2017.12.30 03:02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7) 이주일(1940~2002)

'못생겨서 미안합니다' 오묘막측한 말로 웃긴 뛰어난 머리 가진 사람
7대독자 사고로 잃고 아마도 그 슬픔 달래려 政界진출한 게 아닐까
임기 마치고 국회 떠나며 '코미디 공부 많이 했다' 신랄하게 정치판 비판
돌아앉아 혼자서 울고 간 정주일을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

이주일 일러스트
이철원 기자

팔자라는 것은 누구나 태어날 때 꿰차고 나오는 것이어서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손질하면 좀 나아질 수도 있는 것일까? 팔자를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도 같다. 내가 한동안 가깝게 지낸 이주일이라는 사나이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서 생존이 아슬아슬했다. 태어난 뒤에도 그가 겪은 인생고는 말로 다하기 어렵다. 뉘 집 6대 독자로 태어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가?

이주일은 7대 독자인 아들 하나 잘 키워 미국까지 보내 공부를 시켰다. 그 아들이 어느 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인간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자기 아들이나 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는 일이라고 하는데 그런 참척(慘慽)을 겪은 이주일은 살고 싶지 않은 여생을 살다 갔다고 할 수 있다. 6대 독자의 하나뿐인 아들이 버지니아 웨슬레안 대학 졸업반에 있었는데, 차가 뒤집혀 생긴 그 참사! 아마도 그 외아들을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그는 정계에 진출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인생은 매우 괴로운 것이었지만 그의 천직은 남들을 웃기는 일이었으니 그의 심중 갈등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의 본명은 정주일이다.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치고는 춘천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입에 풀칠하다가 나이 사십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코미디언 데뷔를 하게 됐다. MBC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비극 작가보다도 희극 작가의 머리가 더 좋다는 말이 있다. 이주일은 무슨 묘한 말 한마디로 코미디언으로서 정상에 올랐던가? 매우 간단하지만 그 한마디가 내포한 뜻은 오묘막측하다고 하겠다. 그는 5000만 동포 앞에서 "못생겨서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했다. 이 한마디가 많은 못생긴 사람들에게 엄청난 위로가 됐다. "내가 아무리 못생겼어도 저 사람보다는 잘생겼지"하는 건방진 자부심을 모두에게 심어준 것이 사실이다. 못생긴 사람이 스스로 못생겼다고 자백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없지만 그런 사실을 미안하게 여긴다고 말을 하는 사람은 더욱 없다. 그는 남이 할 수 없는 말을 감히 하고 그 묘한 말로 많은 사람을 웃기는 뛰어난 머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아들 장례식이 끝나고 3일밖에 안 되던 날 그는 SBS 개국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사람들은 외아들을 잃은 희대의 코미디언이 과연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했다. 그가 입을 떼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여러분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김영삼씨와 박철언씨 관계 개선을 위해 무척 노력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이주일이 정치에 입문하기도 전이었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정치 이슈를 꺼내 자기 책임이라며 미안하다고 한 것이다. 청중은 폭소를 터뜨렸다. 어느 코미디언도 이주일의 이런 고급 유머 감각과 냉철한 전문성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SBS '이주일의 투나잇 쇼'로 연예계에 복귀해 정계와 재계 그리고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이주일이 쏟아놓은 풍자와 해학은 그를 다시금 인기 절정 코미디언으로 올려놨다. 그는 이 쇼의 100회 특집을 마지막으로 방송계를 영원히 은퇴했다.

그가 정치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가 경기도 구리에서 출마한 것은 1992년의 일이었다. 그 당시 새로 발족한 통일국민당 소속이었던 나는 이주일 후보의 지원 연설을 하기 위해 그곳까지 가서 그를 처음 만났다. 이주일은 그 지역에 살면서 오래전부터 지역구 결혼식장, 장례식장을 두루 누비고 축의금과 조의금을 넉넉하게 뿌렸다. 이미 많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마련해 주었다고 들었다.

어느 해인가 이리역 폭발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는 하춘화 등 동료 연예인들과 역 근처 극장에서 공연 중이었다. 그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하춘화를 업고 아수라장이 된 극장을 뛰쳐나와 병원까지 갔다고 들었다. 그런 사실을 제 입으로 자랑하지 않았지만 하춘화는 늘 이주일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루 담배를 두 갑, 세 갑 피우던 이 코미디언은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1년 가까운 투병 생활을 했으나 건강을 되찾지 못하고 63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4년의 임기를 마치고 국회를 물러나면서 그는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라며 정치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정치인들을 비웃으면서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내가 정치 단체들의 '발기 대회'에 많이 참석했습니다. 많이들 떠들지만 전부 거짓말입니다. 나는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어요." 아이들이 알아들으면 안 될 한 토막 코미디!

문득 목은( 牧隱) 이색(李穡·고려 후기 문신) 증손이고 사육신(死六臣)의 한 분인 이개(李塏·조선 전기 문신)의 시 한 수가 떠오른다. "방 안에 혓는(켠) 촛불 눌과 이별 하였관대/ 겉으로 눈물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고/ 저 촛불 날과 같아여 속타는 줄 모르도다."

돌아앉아 혼자서 흐느끼며 울고 간 이주일, 아니 정주일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 않고 저절로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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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2/29/20171229013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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