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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이별을 기념하는 방법-'순수박물관' (권지예, 조선일보)

colorprom 2017. 11. 27. 16:02

[인문의 향연] 웃으면서 이별을 기념하는 방법

  • 권지예 소설가


입력 : 2017.11.27 03:12

오랜 이별 후에 재회한 사랑, 눈앞에서 죽는 것 보고도 "행복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추억 어린 물건이 있기 때문

파무크, '순수 박물관'에 새겨자그레브엔 '실연 박물관'

권지예 소설가
권지예 소설가



할리우드발(發) 미투(Me too) 캠페인이 전 세계로 번지고 있다.

유명 여배우들의 "나도 당했다"라는 고백이 을(乙)들의 용기와 연대의식을 자극했을 터.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는 이름 없는 평범한 갑남을녀(甲男乙女)들의 연애도

위험한 뉴스로 자주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귀에 익숙한 데이트 폭력, 이별 범죄라는 이름의 신종 성범죄는

무차별 폭행, 심지어 살인까지 불러오기도 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며 변심한 여자에게 소심하게 대들고,

기껏 복수라고는 몰래 옛 애인의 새 자동차를 동전으로 긁고 도망가서 혼자 우는 지질한 갑남(甲男)은

15년 전 영화에나 나온다.

사실 사랑은 변한다.

사랑도 인생처럼 생로병사가 있다.

모든 관계와 인연에도 끝이 있다.

이별은 사랑의 완성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오히려 이별했을 때 더 잘 보인다.

여기 사랑과 이별을 기억하는 특별한 방식을 보여주는 소설이 있다.

터키 이스탄불 상류층 집안 출신인 30세의 주인공 케말은

가난한 먼 친척의 딸인 18세의 아름다운 소녀 퓌순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44일에 걸친 그녀와의 짧은 밀회는 그의 정신과 육체를 휘저어놓는다.

상류층 집안의 약혼녀 시벨과의 약혼식 날 이후 퓌순이 사라진다.

케말은 그녀를 잃고 난 후,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깨닫고 고통 속에서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아 헤맨다.

이스탄불에는 오르한 파무크가 직접 지은 '순수 박물관'이 있다.
자신이 쓴 동명 소설에 등장하는 침대, 세발자전거, 담배꽁초 등 일상의 물건들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 소설의 세계가 현실로 튀어나온, 전 세계에 유례가 드문 이 박물관 앞에
파무크가 서 있다. /조선일보 DB

밀회 장소에 그녀가 남긴 몇 가지 물건 속에서 위로를 느끼던 차에

그는 유부녀가 된 퓌순을 339일 만에 그녀의 친정집에서 만나게 된다.

퓌순 부부와 함께 사는 그녀의 어머니가 부자인 그를 저녁 식사에 자주 초대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퓌순의 집을 8년간 줄기차게 방문한다.

그 집에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유부녀 퓌순에 대한 욕망을 누르며,

그녀의 물건들을 하나씩 몰래 가져와 수집하기 시작한다.

물건은 그녀의 육체와 영혼이 스며든 그녀의 분신이며,

그에게는 사랑의 고통을 치유하는 약이고 행복한 추억을 일깨우는 촉매다.

드디어 기나긴 순정의 세월을 기다린 보람이 있어 퓌순은 이혼하고 케말과 약혼하기로 한다.

그러나 운명은 두 사람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두 연인이 함께한 약혼여행에서 자동차 사고로 퓌순이 그 자리에서 숨진다.

시간이 흐른 후 병상에서 깨어난 케말은 사랑했던 행복한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퓌순이 살았던 집을 사서 박물관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자신의 삶은 행복했다며 그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무크의 장편소설 '순수박물관'에 나오는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한 사랑 이야기다.

더 놀랄 만한 일은, 작가 오르한 파무크가 소설 속 내용을 그대로 재현해

케말처럼 실제로 그 박물관을 세웠다는 것이다.


2013년 봄, 터키 여행 중 나는 이스탄불 추크르주마 뒷골목에 있는 바로 그 '순수박물관'에 들렀다.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질렸다.

퓌순을 만나는 시간 동안 매번 케말이 몰래 가져왔던, 그녀가 피웠던 담배꽁초 4313개가

메모들과 함께 맞아 주었다.

평생에 걸쳐 그녀가 쓰던 모든 물건이 83개의 소설 챕터에 맞춰 83개의 유리 전시장에 넘쳐났다.

케말은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과거가 영혼처럼 스민 퓌순의 물건들이 그를 삶에 연결해 주고

아름다움과 위안을 준다고, 또한 박물관에 오는 모든 사람도 위안을 얻기 바란다고 했다.

이런 특별한 또 하나의 박물관은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골목에 있는 실연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이다.

실연한 사람들이 사랑했던 연인과 함께했던 물건들을 이별을 기념하여 기부하고,

그 러브스토리와 함께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실연과 이별의 고통은 죽음만큼 끔찍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극복하며 우리는 성장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 모든 고통스러운 이별에는 사랑하던 행복한 순간이 씨앗처럼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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