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어’를 아시나요.
강에서 태어나 먼바다로 나가는 물고기죠.
또 가을에는 알을 낳기 위해 다시 강으로 돌아오죠. 거친 강줄기를 거슬러서 말입니다.
구도자도 그렇게 ‘바다’를 향하죠. 각자가 택한 강줄기는 다르지만 결국 ‘바다’에서 하나로 녹아들길 기도하죠.
연어가 강물에 몸을 맡기듯 ‘나’를 비우고 그저 따르라 …
장선우 감독의 영화 ‘화엄경(1993년 작)’에는 이런 화두가 등장합니다.
‘흐르는 것을 따르시오. 흐르지 않는 것을 따르지 마시오.’
언뜻 들으면 무척 쉬운 말이죠. “마음 가는 대로 하라는 말 아닌가”라고 해석하기 십상이죠.
그러나 ‘흐르는 것을 따르라’라는 구절에는 굉장한 ‘경지’가 담겨 있습니다.
왜냐고요? 인간이 ‘연어’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연어’는 좀 각별합니다. 왜냐고요?
‘가짐과 집착’으로 똘똘 뭉친 연어거든요. ‘나’라는 에고가 무척 강한 놈이거든요.
그래서 바다에 닿기도 전에 강을 거슬러 오르기 일쑤죠.
왜 그럴까요.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지느러미를 흔들기 때문이죠.
그런데 ‘내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강의 마음’을 읽지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게 됩니다.
결국 ‘흐르는 것’을 따를 수 없게 되죠. 오히려 ‘역주행’만 할 뿐이죠.
끊임없는 ‘역주행’을 통해선 결코 바다에 닿질 못합니다.
예수님의 삶에서도 그 ‘흐름’이 보이죠.
예수님은 ‘내 뜻’과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나누었죠. 예수님은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요한 6:38)”고 했습니다.
내 안이 ‘내 뜻’으로만 꽉 차 있다면 결코 드러나지 않는 게 ‘하느님의 뜻’이겠죠.
연어가 ‘내 뜻’을 거둘 때 비로소 ‘강의 뜻’을 알게 되듯이 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이런 기도까지 하셨죠.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복음서 26장39절)”
예수님의 뜻은 ‘이 잔이 비켜가는 것’이었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잔을 집으셨죠.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흘렀기 때문이겠죠. 육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말입니다.
옥한흠(사랑의교회 원로) 목사는 그걸 ‘전적인 위탁’이라고 표현하더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내 뜻’을 거둘 때 ‘화엄경’의 화두도 풀리겠네요.
‘흐르는 것을 따르시오. 흐르지 않는 것을 따르지 마시오’가 절로 풀리겠군요.
그때는 ‘예수님의 뜻=아버지의 뜻’이 되고, ‘연어의 뜻=강물의 뜻’이 되겠죠.
그렇게 ‘나’없이 흐를 때 ‘바다’도 먼 곳이 아니겠네요.
그렇게 ‘나’없이 흐를 때 ‘바다’도 먼 곳이 아니겠네요.
왜냐고요? 모든 강은 바다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내 뜻’을 비운 연어가 그냥 몸을 맡겨도 ‘바다’에 닿는 이치겠죠.
그래서 이 구절을 천천히, 가슴으로 다시 읽어 봅니다.
‘흐르는 것을 따르시오. 흐르지 않는 것을 따르지 마시오.’
백성호 기자
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