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1 : 오랫동안 수행의 길을 떠났던 젊은 스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는 장경(章敬)선사를 찾아가 인사를 올렸습니다.
장경 선사가 물었죠. “이곳을 떠난 지 얼마나 되었느냐.”
“8년쯤 지났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장경 선사가 ‘제자의 공부’를 물었죠. “그래, 그동안 자네는 무엇을 얻었는가.”
“8년쯤 지났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장경 선사가 ‘제자의 공부’를 물었죠. “그래, 그동안 자네는 무엇을 얻었는가.”
그러자 젊은 스님은 꼬챙이를 하나 집었습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땅에다 커다란 동그라미를 하나 그렸습니다.
이 모습을 쭉 지켜보던 장경 선사가 다시 물었죠. “그래, 그것뿐인가. 다른 것은 또 없는가.”
껍데기에 매달리지 말고 진리의 본질에 다가서야
그러자 젊은 스님은 발로 동그라미를 ‘쓱싹쓱싹’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절을 나가버렸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입니다.
#풍경2 : 원불교 교당에는 ‘불상(佛像)’이 없습니다.
#풍경2 : 원불교 교당에는 ‘불상(佛像)’이 없습니다.
대신 교당의 벽에는 큼지막한 ‘동그라미’가 하나 걸려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일원상(一圓相)’이죠.
그럼 ‘부처’ 대신 ‘동그라미’를 모시냐고요?
아닙니다. ‘동그라미’는 그냥 ‘동그라미’일 뿐이죠. 그 너머를 향하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진리의 ‘형상’을 붙들지 말고, 진리의 ‘본질’에 들라는
소태산 대종사(少太山 大宗師·1891~1943·원불교 교조)의 가르침 때문이죠.
2500년 전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다시 왔다면 어떨까요.
2500년 전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다시 왔다면 어떨까요.
그에게 “‘부처의 자리’를 그려 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면 어찌하셨을까요.
아마도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았을까요.
왜냐고요? 이 무한한 우주를 몽땅 담을 수 있는 도형이 달리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진리를 뜻하는 ‘동그라미’는 그냥 동그라미가 아니죠.
그래서 진리를 뜻하는 ‘동그라미’는 그냥 동그라미가 아니죠.
여기에는 테두리가 없습니다. 시간적 테두리도 없고, 공간적 테두리도 없습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도 없고, ‘이곳-저곳’이란 공간의 나뉨도 없죠.
그럼 무엇이 있을까요. 테두리조차 없는 동그라미, 그 하나만 온 우주에 꽉 차있을 뿐입니다.
그럼, 그냥 차 있기만 할까요.
그럼, 그냥 차 있기만 할까요.
아닙니다. 끊임없이 숨을 쉬고, 움직이고, 변화하며 차 있죠. 살아 있으니까요.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와 이튿날 거실 소파에 앉아 이 글을 읽고 있을 여러분도
그 ‘하나의 동그라미’ 안에 녹아 있는 거죠.
젊은 스님이 그린 ‘동그라미’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장경 선사가 “그뿐이냐, 달리 무엇은 없느냐”라고 되묻자 젊은 스님은 동그라미를 지워 버렸죠.
실은 그 순간, ‘진짜 동그라미’가 드러난 겁니다. 살아 숨 쉬는 ‘부처’가 드러난 거죠.
그게 어디냐고요?
동그라미를 지운 곳에 ‘남은 곳’이죠. 바로 눈 앞에 펼쳐진 이 세상 전부입니다.
그럼 또 물으시겠죠.
그럼 또 물으시겠죠.
“동그라미를 넘지 않아도 이 세상이 있고, 동그라미를 넘어도 이 세상이 있다면
왜 힘들게 그걸 넘느냐”고 말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동그라미 이쪽의 삶에는 ‘고통’이 있지만, 동그라미 너머의 삶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죠.
이쪽에선 ‘나’와 ‘동그라미’의 간격이 있지만, 저쪽에선 ‘나=동그라미’가 되니까요.
그때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람이 되고, 꽃이 되고, 온 들판의 푸름이 되겠죠.
그래서 원불교의 ‘일원상’도 붙들면 안되겠죠. 놓아야겠죠.
그래야 동그라미 너머의 ‘동그라미’를 만나겠죠.
백성호 기자
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