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하루명상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22> 동그라미 너머의 동그라미

colorprom 2007. 9. 20. 13:52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22>

동그라미 너머의 동그라미

                

      



#풍경1 : 오랫동안 수행의 길을 떠났던 젊은 스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는 장경(章敬)선사를 찾아가 인사를 올렸습니다.

장경 선사가 물었죠. “이곳을 떠난 지 얼마나 되었느냐.”
“8년쯤 지났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장경 선사가 ‘제자의 공부’를 물었죠. “그래, 그동안 자네는 무엇을 얻었는가.”

그러자 젊은 스님은 꼬챙이를 하나 집었습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땅에다 커다란 동그라미를 하나 그렸습니다.
이 모습을 쭉 지켜보던 장경 선사가 다시 물었죠. “그래, 그것뿐인가. 다른 것은 또 없는가.”

껍데기에 매달리지 말고 진리의 본질에 다가서야

그러자 젊은 스님은 발로 동그라미를 ‘쓱싹쓱싹’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절을 나가버렸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입니다.

#풍경2 : 원불교 교당에는 ‘불상(佛像)’이 없습니다.
대신 교당의 벽에는 큼지막한 ‘동그라미’가 하나 걸려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일원상(一圓相)’이죠.
그럼 ‘부처’ 대신 ‘동그라미’를 모시냐고요?
아닙니다. ‘동그라미’는 그냥 ‘동그라미’일 뿐이죠. 그 너머를 향하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진리의 ‘형상’을 붙들지 말고, 진리의 ‘본질’에 들라
소태산 대종사(少太山 大宗師·1891~1943·원불교 교조)의 가르침 때문이죠.

 2500년 전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다시 왔다면 어떨까요.
그에게 “‘부처의 자리’를 그려 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면 어찌하셨을까요.
아마도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았을까요.
왜냐고요? 이 무한한 우주를 몽땅 담을 수 있는 도형이 달리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진리를 뜻하는 ‘동그라미’는 그냥 동그라미가 아니죠.
여기에는 테두리가 없습니다. 시간적 테두리도 없고, 공간적 테두리도 없습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도 없고, ‘이곳-저곳’이란 공간의 나뉨도 없죠.
그럼 무엇이 있을까요. 테두리조차 없는 동그라미, 그 하나만 온 우주에 꽉 차있을 뿐입니다.

 그럼, 그냥 차 있기만 할까요.
아닙니다. 끊임없이 숨을 쉬고, 움직이고, 변화하며 차 있죠. 살아 있으니까요.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와 이튿날 거실 소파에 앉아 이 글을 읽고 있을 여러분도
그 ‘하나의 동그라미’ 안에 녹아 있는 거죠.

 젊은 스님이 그린 ‘동그라미’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장경 선사가 “그뿐이냐, 달리 무엇은 없느냐”라고 되묻자 젊은 스님은 동그라미를 지워 버렸죠.
실은 그 순간, ‘진짜 동그라미’가 드러난 겁니다. 살아 숨 쉬는 ‘부처’가 드러난 거죠.
그게 어디냐고요?
동그라미를 지운 곳에 ‘남은 곳’이죠. 바로 눈 앞에 펼쳐진 이 세상 전부입니다.

 그럼 또 물으시겠죠.
“동그라미를 넘지 않아도 이 세상이 있고, 동그라미를 넘어도 이 세상이 있다면
왜 힘들게 그걸 넘느냐”고 말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동그라미 이쪽의 삶에는 ‘고통’이 있지만, 동그라미 너머의 삶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죠.
이쪽에선 ‘나’와 ‘동그라미’의 간격이 있지만, 저쪽에선 ‘나=동그라미’가 되니까요.
그때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람이 되고, 꽃이 되고, 온 들판의 푸름이 되겠죠.
그래서 원불교의 ‘일원상’도 붙들면 안되겠죠. 놓아야겠죠.
그래야 동그라미 너머의 ‘동그라미’를 만나겠죠.


백성호 기자


[출처: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22> 동그라미 너머의 동그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