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하루명상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58> 붓다의 흔적을 좇다가 나의 부족함을 보다

colorprom 2009. 5. 16. 12:40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58>

붓다의 흔적을 좇다가 나의 부족함을 보다

                

      

인도 쉬라바스티 기원정사에서 붓다는 ‘금강경’을 설했다.

꽃잎이 뿌려져 있는 그 장소에서 “상(相)을 놓으라”는 메시지를 되새겼다

“기자의 순례 코스를 그대로 따라서 가려고 한다(tombo)”

“한번 읽고, 다시 정서하며 읽는다(ksw52)”

“고전과 인문학에 대한 갈증을 채워준다(medipause·한국방송통신대에 다니는 44세 학생주부)”

“불교 성지와 수행 도량을 앉아서 보게 돼 참 감사하다(osodoe)”

“2500년 전부터 변함없이 현존하는 부처의 숨결을 느꼈다(74sunokp)”….

14일 연재가 끝난 ‘인도의 붓다 8대 성지를 찾아서’ 8회 시리즈가 나가는 석 달 동안

독자들이 보내온 e-메일중 일부입니다.

비단 불교 신자뿐만 아닙니다. 어떤 기독교인 독자는

“덕분에 붓다의 생애에 대한 시선과 이해의 폭이 달라졌다”고 하더군요.

각자의 종교, 각자의 처지에 따라 ‘붓다 8대 성지 시리즈’를 바라보는 시선은 ‘10인10색’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딱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더군요. 그건 바로 ‘목마름’이었습니다.

붓다의 생애, 붓다의 메시지, 붓다의 구도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과 갈증이었죠.

그건 2008년 9~10월 연재된 이스라엘 기독교 성지순례 기사인 ‘예수의 숨결을 찾아서’ 3회 시리즈에 대한

독자 반응과 일맥상통했습니다.

그때도 독자들은 “2000년 전 예수와 예루살렘,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며 기사 속 순례길을 따라간다”고

하더군요.

불자들은 지금도 떠납니다. 인도로, 중국으로, 동남아로 ‘붓다의 흔적’을 찾아가죠.

또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로, 터키로 예수와 사도 바울의 자취를 좇아서 비행기를 탑니다.

그런데 순례지에선 참 아리송한 풍경과 마주치게 됩니다.


불교 신자든, 기독교 신자든 ‘받기 위해서’ 오는 순례객이 꽤 많다는 겁니다.
붓다가 깨달았던 금강좌,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 언덕에 서서 사람들은 두 손을 벌립니다.
그리고 붓다의 가피(加被·부처나 보살이 주는 힘), 예수의 은총이 ‘후두둑’ 떨어지길 바라더군요.

그러다 가피와 은총이 없으면 실망을 합니다. 낭패감을 느낍니다.
“기대가 컸는데, 뭘 건졌는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안타까운 풍경이죠.
성지 순례의 목적은 ‘나를 키우기 위함’이나 ‘내가 잘되기 위함’이 아니니까요.
십자가의 예수처럼 ‘죽기 위해서’, 보리수 아래 붓다처럼 내려놓기 위해서’ 성지를 찾는 겁니다.

그래서 순례의 목적은 참 중요하죠.
붓다의 삶에 내 삶을 갖다대고, 예수의 생애에 나의 생애를 포갤 때 우리의 목은 축여집니다.
거기서 ‘나의 충만함’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족함이야말로 가능성이죠.
붓다의 자리, 예수의 생명을 향해 한발 앞으로 내딛게 하는 커다란 동력이죠.
거기에 성지 순례의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백성호 기자


[출처: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58> 붓다의 흔적을 좇다가 나의 부족함을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