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하루명상

[백성호의 현문우답] 에디슨, 거위알 품은 진짜 이유

colorprom 2014. 3. 8. 15:34

[백성호의 현문우답] 에디슨, 거위알 품은 진짜 이유

백성호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피터 슈라이어.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입니다.
기아차를 ‘디자인 기아’로 바꾼 장본인입니다.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궁금하더군요. 어떤 노하우가 그를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반열에 올렸을까.

곁에 있던 부하 디자이너가 살짝 힌트를 줬습니다.
예전에 자동차의 기어 손잡이를 디자인했을 때입니다.
부하 직원은 색상과 라인까지 디자인해 실물을 만들었습니다. 슈라이어가 와서 그걸 봤습니다.
그에게 “기어 손잡이를 잡아보라”고 말했습니다. 잡았더니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꽈~악 눌렀습니다. 정말 아플 정도로 말입니다.
그가 “아야!”하고 소리를 지르자 슈라이어가 말했습니다.
“자동차의 기어 손잡이는 몇 시간씩 손을 올리고 있어도 편해야 한다.”
그는 디자인만 보지 않았습니다.
운전하는 사람과 자동차가 한몸이 되는지를 체크했습니다.

불교 조계종의 주된 수행법은 간화선(看話禪)입니다.
‘산 송장을 끌고 다니는 이 주인공이 누구인가. 이뭣고?’ 혹은 ‘무(無)’ 등의 화두를 듭니다.
요즘은 일반 신자들도 꽤 합니다. 처음에는 꿈도 크고 기대도 큽니다.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하다가 어느 순간 ‘빵’ 터져서 깨달음이 올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경전 공부를 외면하고 무작정 선방으로 달려가는 스님들도 있습니다.

막상 해보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도 화두가 잡히질 않습니다. 간절함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소연합니다. 왜 내게는 간절한 의문이 안 생기나. 왜 운전자와 자동차가 하나가 되지 않나.

답은 간단합니다. 아직 ‘나의 물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령 덧셈이 궁금한 학생이 있습니다. 그에게 미적분 문제를 주면 어떻게 될까요.

마음의 톱니바퀴가 계속 헛돌게 됩니다.

그때는 어떡해야 할까요. 내 안에서 올라오는 자연스러운 물음을 찾아야 합니다. 그게 ‘나의 물음’입니다.

그걸 따라가면 됩니다.

덧셈이 궁금하면 덧셈을, 곱셈이 궁금하면 곱셈을 풀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미적분과 ‘이뭣고’를 미치도록 풀고 싶은 날이 찾아옵니다.

그때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간절합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모든 물음은 간절한 법이니까요.

과학자 에디슨이 왜 헛간에서 거위알을 품었을까요?

사람들은 “천재는 어렸을 때부터 엉뚱하고 유별나다”고 분석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어린 에디슨은 자신의 물음을 따라갔던 겁니다.

“어미 거위가 품으니까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오네. 그럼 내가 품어도 나올까?”

자신의 가슴에서 저절로 올라온 물음을 따라서 간 겁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할 때도 그랬습니다.

700회 넘게 연거푸 실험에 실패할 때 사람들은 그게 ‘거위알 품기’라고 봤을 겁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자신의 가슴에서 올라온 ‘나의 물음’을 따라갔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남이 준 물음, 남이 준 문제에 너무 익숙한 건 아닐까요.
불교 수행자뿐만 아닙니다.
과학자도, 예술가도, 철학자도, 학생도, 회사원도, 살림하는 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가슴에서 올라오는 ‘나의 물음’을 무시하고 사는 건 아닐까요.
너무 유치하거나, 너무 사소하거나, 너무 민망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남이 준 물음이나 남들이 알아주는 더 큰 물음을 잡느라고 말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계단이 있다고 봅니다.
어떤 계단은 밟을 때 발이 쑥 빠집니다. 실속이 없는 구름 계단입니다.
또 어떤 계단은 단단하게 발이 탁!탁! 놓입니다. 그걸 디디면 다음 계단을 밟을 수가 있습니다.
눈앞의 계단을 탁!탁! 밟아갈 때 우리는 진화합니다.
‘나의 물음’이 그런 계단입니다.
그럼 나의 삶, 나의 화두를 향해서 한번쯤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게 나의 물음인가, 아니면 남의 물음인가.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출처: 중앙일보] [백성호의 현문우답] 에디슨, 거위알 품은 진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