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들도 종종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개혁을 추진했던 정조에 대한 독살설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가톨릭 교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1세의 죽음은 불과 36년 전이니까요.
요한 바오로 1세는 이름부터 파격이었습니다.
요한이면 요한, 바오로면 바오로지 ‘요한+바오로’는 가톨릭 역사상 전례가 없던 교황명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닮고 싶었던 교황이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요한 24세’ 혹은 ‘바오로 7세’라는 교황명 대신 ‘요한+바오로’를 택했습니다.
이걸 보면 그가 걷고자 했던 길이 한눈에 보입니다.
요한 23세는 무척 자유롭고 개방적인 교황이었습니다.
갈수록 경직되는 가톨릭에 유연한 생명력을 불어넣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한 인물입니다.
바오로 6세는 그걸 마무리한 교황입니다.
중세 때부터 650년 넘게 교황은 삼층관(삼중관)을 머리에 썼습니다.
숱한 다이아몬드와 보석들로 치장된 화려한 ‘왕관’입니다. 왕 중의 왕을 상징합니다.
바오로 6세는 “주의 종이 이렇게 화려한 왕관을 쓸 수가 없다”며
삼층관을 베드로 성당의 제단 위로 올려놓았습니다.
닷새 뒤 삼층관은 뉴욕의 자선 기금 행사에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교황이 삼층관을 쓰는 전통이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교황의 문장(紋章)에만 그림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요한 바오로 1세는 그걸 닮고자 했습니다. 그런 꽃을 피우려 했습니다.
요한 바오로 1세는 대관식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대관식과 착좌식을 거부한 첫 교황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교황이 자신을 지칭할 때 쓰던 ‘짐(朕)’이라는 표현을 ‘나’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교황도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서려 했던 요한 바오로 1세의 이 모든 지향과 노력은
즉위 33일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볼 때마다 요한 바오로 1세가 떠오릅니다.
어쩌면 ‘교황의 멘토인 교황’이 아닐까란 생각까지 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바티칸 교황청을 수술대 위에 올리고 있습니다.
교황청 내에서 개혁적 인사를 단행했고, 바티칸의 재정 투명성도 들쑤십니다.
예전의 대관식에 해당하는 ‘교황 취임 미사’를 가리키며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업무 첫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티칸에서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정진석 추기경은 “교황님은 자유인이다”라고 표현하더군요.
요한 바오로 1세와 프란치스코 교황, 둘은 닮은꼴입니다.
이유는 하나.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향해서 꽃을 피우려는 겁니다.
요한 바오로 1세의 못다 핀 꽃 한 송이. 8월에 한국을 방문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피워 내시길 기도합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