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영화가 끝났습니다. 극장에 불이 켜졌습니다. 뒤를 돌아봤습니다. 예상대로입니다.
몇몇 관객은 자리를 뜰 줄 몰랐습니다.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불 꺼진 스크린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는 걸까’.
작은 영화입니다. 그래도 최근 1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입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저도 한참 앉아 있었습니다.
저도 한참 앉아 있었습니다.
영화는 76년 세월을 함께한 할아버지(98)·할머니(89)를 통해 노년의 일상과 행복을 보여주더군요.
마지막에는 할아버지가 이별의 강을 건너갑니다.
강의 이편에서 할머니가 내놓는 독백에 가슴이 아리더군요.
“추워서 어째? 할아버지 생각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수 이상은의 노래를 틀었습니다.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수 이상은의 노래를 틀었습니다.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관조하듯 노래하는 가수의 목청을 타고 고조선 때 지었다는 노랫말이 흘렀습니다.
‘님아 님아 내 님아 물을 건너가지 마오/님아 님아 내 님아 그예 물을 건너시네/
아~물에 휩쓸려 돌아가시니/아~가신 님을 어이할꼬’.
노래를 듣고, 다시 듣고, 또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에는 강이 흐릅니다. 삶과 죽음, 둘을 나누는 강입니다.
그렇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에는 강이 흐릅니다. 삶과 죽음, 둘을 나누는 강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그 강 앞에 서야 합니다. 육신의 무너짐과 함께 그 강을 건너야 합니다.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강물이 얼마나 차가운지, 강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그곳에도 삶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삶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각자의 종교, 각자의 신념을 통해서 믿거나 꿈꿀 뿐입니다.
그래서 낯설고, 그래서 두렵고, 그래서 슬픕니다.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궁금해집니다. 강은 정말 그곳에만 있을까.
삶과 죽음을 나누는 강이 정말 그곳에만 흐를까. 눈을 감습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일상을 살펴봅니다.
그러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곳. 거기에만 강이 흐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나의 오전, 나의 오후에도 수십 개, 수백 개의 강이 흐르고 있더군요.
우리는 수시로 그 강 앞에 섭니다. 그리고 고민합니다. 강을 건너야 하나, 아니면 말아야 하나.
그 강의 이름이 뭐냐고요? 다름 아닌 ‘고집의 강’입니다.
꺾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꺾지 못하는 나의 고집. 그런 고집들이 뭉쳐서 ‘나’라는 에고를 만드니까요.
그 강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망설입니다.
고집을 꺾으면 내가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 강을 건너다가 내가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돌아서고 맙니다. 강을 건너지 않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말합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결국 미지의 땅으로 남습니다. 강 저편의 풍경, 강 저편의 삶이 말입니다.
반면 고집을 꺾어본 사람은 다릅니다. 그들은 오히려 “님아, 그 강을 건너가오”라고 소리칩니다.
내가 한 번 죽어야 고집도 따라 죽습니다. 죽기를 각오해야 자신의 고집도 꺾을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강을 건너게 됩니다.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강을 건넌 사람은 미지의 땅을 밟게 됩니다.
자신의 삶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풍경입니다. 강의 저편, 내 고집의 저편을 보게 되니까요.
그곳의 평화를 아는 이들은 말합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가오.”
그렇게 강을 건너고, 건너고, 또 건너다 보면 결국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강을 건너고, 건너고, 또 건너다 보면 결국 어떻게 될까요.
강의 이편과 강의 저편 사이에 차이가 없어집니다.
그때는 강을 건너는 일이 예전만큼 두렵지는 않을 겁니다.
영화 속 할아버지처럼 언젠가 우리도 삶과 죽음을 나누는 강 앞에 서게 됩니다.
가뿐하게 건너고 싶으신가요. 그럼 자신의 일상에서 강 건너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노래와 함께 말입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가오!”
-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