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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년, 루터의 길을 가다](이한수 기자, 조선일보)

colorprom 2017. 6. 9. 14:20

[종교개혁 500년, 루터의 길을 가다] [1] 보름스

루터 심문받았던 자리엔… 종교개혁 큰 걸음의 '신발'이

입력 : 2017.05.26 03:04 | 수정 : 2017.05.26 07:42   

황제 소집 제국회의서 심문받고 '法外者' 규정
루터 "나의 양심을 취소 못 해… 하나님, 이 몸을 도우소서"

마르틴 루터

'교황은 어떠한 죄책도 용서할 수 없다. 자신의 판단 영역에 속한 사건들만 사할 수 있을 뿐이다.'

1517년 10월 31일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독일 북부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문에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면벌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논제'를 붙였다.

권위와 인습에 사로잡힌 중세에서 벗어나 서구의 근대를 여는 첫걸음이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루터의 자취를 찾고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작은 도시를 조금 헤맸다.

"글쎄, 이 근처인데…. 미안, 잘 모르겠어요." 강아지 데리고 산책 나온 시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독일 남서부 보름스(Worms). 인구 8만5000명 작은 도시다. 마을 동쪽으로 라인강이 흐른다.

지난 8일 오후 구름 낀 하늘은 금세라도 비를 뿌릴 듯했다.

1521년 4월 18일 오후 6시 서른여덟 살 수도사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이곳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고위 관리들 앞에 섰다.

보름스 대성당(성 페터 돔) 옆 주교궁(宮)에서 열린 제국회의였다.


보름스는 이전에도 군사·재정 문제를 논의하는 제국회의가 열리던 곳이다.

이번에는 다른 주제였다. 회의 탁자에는 루터가 쓴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3년여 전인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에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논제'를 붙인 이후

쓴 책들이다.

이 기간 '로마 교황의 지위' '그리스도인의 자유'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 같은 팸플릿 책자를 여럿 냈다. 모두 교황과 로마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몇 달 전 교황(레오 10세)이 보낸 파문 경고 교서를 불태워 이미 수도사 지위를 박탈당한 상태였다.

루터가 심문을 받은 보름스 ‘성 페터 돔’ 옆 옛 주교궁 자리. 공원이 된 이곳에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루터의 신발’ 조형물이 설치됐다.
루터가 심문을 받은 보름스 ‘성 페터 돔’ 옆 옛 주교궁 자리.
공원이 된 이곳에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루터의 신발’ 조형물이 설치됐다.
 /이한수 기자

루터가 심문받은 곳은 지금 잔디 깔린 공원이다.

현지 주민들도 장소를 잘 알지 못했다. 당시 건물은 17세기 프랑스군 공격에 파괴됐다 한다.

대성당은 보수 공사 중이다. 일부 벽면은 흰 천막에 덮여 있다.

환하게 웃는 프란치스코 교황 얼굴 사진이 천막 위에 걸려 있었다.

대성당 광장 오른편 철문 안쪽이 루터가 심문받던 자리다. 기념 조형물이 서 있다.

제국회의 450주년을 기념해 1971년 세운 청동 조형물이다. 주교궁 건물에 번개가 치는 모습을 나타냈다.

지역 로터리클럽은 올해 종교개혁 500년을 맞아 이 조형물 앞에 신발 모양 조형물을 더했다.

'루터의 신발'이라 이름했다. 종교개혁의 큰 발걸음을 내디딘 곳이란 뜻을 담았다.


루터는 이곳에서 16~18일 사흘간 심문을 받았다.
4월 17일 오후 4시 열린 심문에서 최종 답변을 하루 늦춰달라고 요청했다.
심문을 맡은 요한 에크 대주교의 질문은 두 가지였다. 이 책들을 썼는가? 주장을 철회하는가?

"어제 저것들을 부정하느냐고 물으셨지요? 모두 제 것입니다.
제 주장이 분열을 일으킨다 하셨지요?
'화평이 아니라 검(劍)을 주러 왔다'는 주님의 말씀으로 답변을 대신합니다."

보름스 위치 지도

루터는 이 자리에서 유명한 연설을 남긴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연설 원문에는 "여기 제가 서 있습니다. 저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한다.

교회사(史) 학자인 롤런드 베인턴 예일대 교수는

1978년 'Here I Stand(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루터 평전을 쓰기도 했다.

황제 카를 5세는 루터를 '법외자(法外者)'로 선언했다.

누구든 루터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

황제는 5월 6일 '보름스 칙령'에 서명했다.


"루터를 이단으로 확정한다. 그에게 4월 15일부터 21일간의 여유를 주었다.

시간이 되면 그를 환대해서는 안 된다. 그를 따르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그의 책들은 인간의 기억에서 말끔히 지워질 것이다.

보름스 루터 광장에 있는 ‘루터 동상’.
보름스 루터 광장에 있는 ‘루터 동상’.

그러나 보름스는 이제 황제가 아니라 루터를 기억하고 있다.

루터가 심문받은 곳 거리 이름은 '루터링(Lutherring)'이다. 인근에는 '루터 광장(Luther Platz)'이 있다.

광장 가운데에는 루터 동상이 서 있다. 1868년 세운 것이다.

당시 프로이센 군주이자 훗날 독일 황제가 되는 빌헬름 1세가 제막식에 참석했다.


루터를 비롯해 여러 인물 동상을 함께 세워 종교개혁 과정을 나타냈다.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루터 동상이 서 있다.

발 아래에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이 몸을 도우소서"라는 루터의 말이 새겨져 있다.


루터 동상 아래에는 종교개혁의 선구자 동상 넷이 동·서·남·북 방향으로 앉아 있다.

왼쪽부터 사보나롤라, 얀 후스, 위클리프, 발데스 동상이다.

바깥 둘레에는 루터를 후원했던 프리드리히 선제후, 종교개혁 동지인 멜란히톤 동상 등이 서 있다.

보름스에서 루터 심문이 열린다는 소식에 독일 민중 1만4000여 명이 몰려들었다.

그때 보름스 인구는 7000명이었다. 로마 교황에 맞선 독일인 루터의 용기에 민심(民心)이 꿈틀거린 것이다.

루터는 제국회의에서 먼저 독일어로 연설했다.

라틴어로 말하라는 명령을 받고서 자신의 주장을 라틴어로 다시 펼쳤다.

그리고 승리자처럼 두 팔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루터바움 스트라세’에 있는 루터 나무.               
‘루터바움 스트라세’에 있는 루터 나무. /이한수 기자






민중 소망에 잎 피운 說話 속 '루터 나무'


보름스 취재 중 '루터바움 스트라세' 즉 '루터 나무 거리'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지도 앱에 'Lutherbaum Strasse'를 입력했다. 루터 광장에서 2.2㎞ 떨어져 있다 한다.

렌터카를 몰아 도착한 곳은 2층 주택이 늘어선 한적한 마을이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은 굵은 나뭇등걸이 보였다. 썩어 사라진 나무줄기 일부를 철판으로 덧댔다.

안을 들여다보니 가는 나무가 새로 자라 푸른 잎을 피웠 다.

루터를 심판하는 보름스 제국회의가 열렸을 때 동네 할머니 둘이 논쟁을 벌였다.

한 할머니가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루터 주장이 옳다면 여기에서 잎이 솟을 것이라 했다 한다.

그 지팡이가 나무가 되었다는 것.

믿기 어려운 설화(說話)지만 종교개혁에 희망을 품었던 당시 민중의 소망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덧댄 철판에는 두 할머니가 논쟁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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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루터의 길을 가다] [2] 비텐베르크

교회 門에 붙인 '95개 논제',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입력 : 2017.05.30 03:05 | 수정 : 2017.05.30 10:47

'면죄부 판매' 교황 비판하며 종교개혁의 시작 알려

루터가 후반 35년 보낸 도시
수도원은 전시관으로 변신… 城 교회 안에는 그의 묘 있어

온통 '루터'로 가득했다.
시내 안내판에 적힌 도시 이름은 '루터슈타트 비텐베르크(Lutherstadt Wittenberg)'.
1938년부터 쓰고 있는 공식 지명이다.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라는 뜻.
베를린 남쪽 100㎞ 떨어진 인구 5만명의 작은 도시다.
루터의 얼굴 윤곽 로고가 도시 이름 앞에 그려져 있었다.
옛 도심 시청 광장에는 루터 동상이 서 있다.
인근 상점에서는 루터 모습을 인쇄한 포스터, 티셔츠, 컵 같은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마르틴 루터(1483~1546)는 63년 생애 중 후반 35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곳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성서학을 가르쳤다. 종교개혁을 여기서 시작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대문에 면죄부(면벌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논제'를 붙였다.
공개 논쟁을 요구하는 당시 관례였다 한다.
이 일이 종교개혁의 첫걸음이 되리라고는 자신도 처음엔 생각지 못했다.
인쇄·출판업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을 때였다.
업자들은 '95개 논제'를 독일어로 번역해 곳곳으로 실어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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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루터가 1517년 10월 31일‘95개 논제’를 붙인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대문.
1858년 아예‘논제’를 새긴 청동 대문을 만들었다.
지난 9일 유럽 관광객들이 문 앞에 모여 연신 사진을 찍었다.
(오른쪽 사진)루터의 묘.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안에 있다.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이한수 기자

"교황이 누군가를 연옥에서 구출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면
모조리 다 꺼내고 연옥을 폐쇄하는 것이 사랑의 도리 아닌가?
돈을 받고 숱한 사람을 구원한다는데 거룩한 사랑으로 그곳을 텅 비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로마 교황을 정면으로 공박한 루터의 '논제'는 독일인들에게 큰 화제를 뿌렸다.

성 교회 대문은 이제 '기념물'이 됐다. 아예 '95개 논제'를 새긴 청동 대문을 달았다.
1858년 프로이센 군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지시했다.
대문 위 그림에도 루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왼쪽에 루터가 성경책을 들고 앉아 있다.
오른쪽에는 그의 후배이자 동지였던 멜란히톤(1497~1560)이 그려져 있다.
지난 9일 오후 유럽 관광객들이 청동 대문 앞에서 연신 사진을 찍었다.
원통형 기둥 첨탑이 솟은 성 교회 앞에는 대형 버스가 관광객 수십 명을 내려놓고 있었다.

교회는 평일에도 개방 중이었다. '루터의 묘'가 이곳에 있다.
교회 안 열을 지어 있는 긴 의자 앞과 제단(祭壇) 사이 공간 오른쪽에 어른 무릎 높이쯤 되는 묘지석이 있다. '마르틴 루터가 묻혀 있다'는 라틴어 글귀가 적혀 있다. 묘지석 앞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반대편 왼쪽에도 같은 크기 묘지석이 있다. 멜란히톤의 것이다.

독일 비텐베르크

시청 광장 루터 동상은 1821년 세운 것이다. 왼쪽엔 멜란히톤 동상이 조금 작은 크기로 서 있다.
시청 광장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첨탑 두 개가 우뚝한 '성 마리아 시립 교회'가 있다.
루터가 독일어로 처음 설교했던 곳이다.
루터는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이단 판정을 받은 후 1522년 3월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평신도도 미사 때 사제만 마시던 포도주를 빵과 함께하는 '양종(兩種) 성찬(양형 영성체)'을 처음으로 행했다. 교회 밖 영문 설명문에는 '종교개혁의 어머니 교회(The Mother Church of Reformation)'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루터가 소속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은 지금 박물관 '루터하우스'가 됐다.
루터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1525년 마흔두 살 루터가 결혼했을 때 이곳에서 살도록 했다.
스물여섯 살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공감해 수도원을 탈출한 수녀였다.
둘은 결혼 후 여섯 자녀를 낳는다. 건물 앞 '루터 정원'에는 아내 폰 보라의 등신대 동상이 있다.
바닥 돌을 보수하는 공사 중이어서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루터하우스 전시관에는 당대에 그린 루터 부부의 초상화가 있다.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궁정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1528년 작품이다.
2층에는 루터 가족이 살았던 거실이 있다. 방에 놓인 탁자는 루터가 실제 사용하던 것이라 한다.
한글 안내 책자(2유로)가 있어 반가웠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1534년 판본)도 전시 중이다.
루터는 1522년 신약성서를 번역하고 이어 2년에 걸쳐 성경 전체를 번역했다.
'루터 성경'은 당대 베스트셀러였다. 이후 여러 민족어로 성경 번역이 이뤄지게 된다.
덴마크어·핀란드어·슬로베니아어 번역이 이어졌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이 유럽 여러 민족의 잠자던 의식을 깨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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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 루터의 길을 가다] [3] 아이제나흐

숨어살던 골방서 번역… 모국어 성경 선물하다

입력 : 2017.06.02 03:03

法外者 낙인에 도망다니던 시절… 벼랑 위 城에서 11주 만에 번역
루터 "잉크로 마귀와 싸웠다"

산 아래 마을엔 성 게오르크교회
소년 루터가 성가대원 활동하고 음악가 바흐 유아 세례 받은 곳

독일 동부 아이제나흐(Eisenach).
인구 4만2000명의 이 소도시는
도심 거리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루터 어록을 쓴 현수막이 빼곡히 걸려 있다.
그 현수막 너머로 도시 어디에서나 보이는 성(城)이 있다.
도시 남쪽 바위산 위에 우뚝 솟은 바르트부르크성(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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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1521년 5월부터 10개월간 은신한 독일 아이제나흐 바르트부르크성.
산꼭대기에 지어진 이 요새 같은 성에서 루터는 11주 만에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고,
10여권의 책을 썼다. /김한수 기자

1521년 루터는 '도망자' 신세였다.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법외자(法外者)'로 낙인 찍힌 그를 구해준 것은 프리드리히 제후였다.
보름스에서 비텐베르크로 가면서 도중의 마을마다 들러 설교하던 루터
납치하는 형식으로 이 성에 데려왔다.
해발 400m 높이 깎아지른 벼랑 위에 지어진 성은 천혜의 요새. 성문을 닫으면 세상과 단절되는 이곳은
'루터의 밧모섬'이었다.
사도 요한이 에게해의 작은 섬 파트모스(밧모)의 산꼭대기 동굴에서 계시록을 쓴 것에 빗대 붙은 별칭이다.
루터는 이 성에서 정수리를 동그랗게 미는 수도자의 헤어스타일을 버렸고 수도복을 벗고 수염을 길렀다.

독일 아이제나흐
이 성의 북향(北向) 작은 방에 10개월간 머무르면서 11주 만에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완역했다.
1521년 9월에 완성됐다 해서 '9월 성서'로 불리는 책이다.
쫓기는 몸, 고립된 상황, 루터는 이 방에서 마귀(사탄)의 환영(幻影)을 봤고 잉크병을 던져 쫓아냈다고 한다. 당시 그는 "나는 잉크로 마귀와 싸웠다"고 했다. 그렇게 완성된 '9월 성서'는 루터의 필생의 무기였다.
문맹률이 95%에 이르던 시절,
사제들이 읽어주는 라틴어 성서는 일반 신자들에겐 이해 불가능한 외계어나 같았다.
루터는 그들에게 모국어 성서를 선물했다.
당시 소 한 마리 값에 육박했다는 '9월 성서'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종교개혁의 불길도 확산했다.
성서를 읽은 독자들은 루터의 강력한 우군(友軍)이 됐다.

지난 23일 찾은 바르트부르크성
전체가 '루터와 독일인(Luther and The Germans)'이라는 주제의 특별전 전시장으로 탈바꿈한 상태다.
루터가 당시 교황에게서 받았던 파문 예고 칙서를 비롯한 고문서들이 전시돼 있었다.
루터와 당시 교황이 줄다리기하는 모습을 그린 풍자화도 전시되고 있었다.
전시 코스 마지막은 '루터의 방'이었다. 신약을 번역한 책상 하나에 벽난로가 재현된 단출한 구조였다.
안내원은 "관람객들은 '루터가 마귀에게 잉크병을 던진 자국이 어디냐'고 묻는다"며 웃었다.

(위)루터가 잉크병을 던져 마귀를 물리친 설화를 따서 만든 에너지 음료‘루터 잉크’. (아래)아이제나흐 성 게오르크교회 입구에 있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동상.
(위)루터가 잉크병을 던져 마귀를 물리친 설화를 따서 만든 에너지 음료‘루터 잉크’.
(아래)아이제나흐 성 게오르크교회 입구에 있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동상.
루터가 성가대원으로 활동한 이 교회에서 바흐는 유아 세례를 받았다.

성문을 나서 시내로 내려오자 종소리가 들린다.
도시 중심에 자리한 성(聖) 게오르크 교회 종탑의 정오 종소리가 5분간 이어졌다.
어린 학생들이 인솔교사를 따라 교회로 줄지어 들어간다.
교회 안에는 신자 10여 명이 정오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1498년 15세 루터는 고향인 광산도시 아이슬레벤을 떠나 이 도시의 외가 친척집에 머물며
게오르크 교회 부속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의 뜻을 좇아 법률가가 되기 위해 라틴어를 배웠고, 성가대원으로도 활동했다.
교회 현관 옆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의 동상도 서있다. 이곳은 바흐의 고향이기도 하다.
바흐는 이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게오르크 교회 부속 학교에서 공부했다.
루터와는 게오르크 교회 학교 '동문'인 셈이다.
칼뱅 등 다른 종교개혁가들과 달리 루터는 교회음악을 중시했다. 직접 찬송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루터가 뿌려놓은 종교음악의 토양에서 바흐라는 열매가 탄생한 셈이다.

교회 인근엔 루터가 살았다는 집을 개조한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서는 지금 '신앙의 교사: 가톨릭의 시선으로 본 루터' 전시가 열리고 있다.
입구에선 각각 빨강과 파랑색 셀로판테이프가 끼워진 종이안경을 나눠준다.
벽면에 루터와 교황의 그림이 겹쳐 그려져 있다.
안경을 쓰고 양쪽 눈을 번갈아 뜨면 '사탄의 사도'와 '적그리스도'라는 글자가 보인다.
당시 루터파와 가톨릭이 상대를 그렇게 봤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시 기법이다.
박물관 기념품점엔 온통 루터의 이름으로 도배된 기념품들이 쌓여있다.
눈에 띄는 것은 '루터잉크'. 진짜 잉크가 아니라 에너지 드링크다.
'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Hi er Stehe Ich)'는 글귀를 새긴 양말도 보인다.

게오르크 교회 스테판 쿨러(50) 목사는 "500년 전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최근 100년 사이, 특히 제2차 대전 후 이 지역이 동독에 편입됐을 때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소수자였기 때문에 협력이 잘되고 있다"며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축제도 함께 열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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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 루터의 길을 가다] [4] 토르가우 -세계 첫 개신교 교회

聖畵·조각상 뺀 설계'개신교 교회 모델' 되다

입력 : 2017.06.08 03:02


개혁 후 가톨릭 성당 쓰던 루터
후원자 작센 영주 궁전 지을 때 개신교 정신 담은 첫 교회 세워
내부 장식 없고 설교대·제대만말씀·성찬에만 집중하게 만들어

루터

"루터를 이야기할 때 비텐베르크바르트부르크 성(城)은 대부분 알고 있지만,

보름스아이슬레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안 된다.

그리고 극소수 사람만 토르가우가 한때 종교개혁의 정치적 수도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독일 동부 작센주 토르가우(Torgau) 관광 팸플릿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루터가 건축에 참여한 세계 최초의 개신교 교회가 있는 도시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지난달 24일 오후 토르가우 성을 찾았다.

비텐베르크, 아이제나흐, 아이슬레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관광객이 적었다.

게다가 교회도 금방 눈에 띄지 않았다.

동쪽으로 엘베강을 끼고 지어진 성은 밖에서 보면 요새, 안뜰에서 보면 아름다운 궁전이었다.

 

이 성이 완공된 것은 1544년.

루터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요한 프리드리히

1532년 작센 선제후 지위를 계승한 후 착공해 1544년 완공한 궁전에 루터를 위해 '개신교회'를 지어준 곳이다.

당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옹호하는 영주들이 갈라져 전쟁을 벌이던 시기.

프로테스탄트의 가장 든든한 울타리인 작센 영주의 궁전이 있는 토르가우

'프로테스탄트의 수도'라 불릴 만했다.


루터 역시 1520년대 이후 종교개혁 동료인 멜란히톤, 요나스, 부르하겐 등과 함께 수시로 토르가우를 찾아 종교개혁 방안에 대해 논의했으며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1530)가 기초 된 곳도 토르가우였다.

독일 동부 엘베강을 끼고 세워진 토르가우 성(城). 밖에서 보면 요새, 안에서 보면 화려한 궁전인 이 성의 한쪽에 루터가 설계에 참여한 세계 최초의 개신교 교회가 있다.
독일 동부 엘베강을 끼고 세워진 토르가우 성(城).
밖에서 보면 요새, 안에서 보면 화려한 궁전인 이 성의 한쪽에
루터가 설계에 참여한 세계 최초의 개신교 교회가 있다. /김한수 기자


궁전 뜰에 들어서니 유명한 나선형 계단 등은 눈에 띄는데 교회는 보이지 않았다. 안내 직원에게 물었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안뜰 왼편 성벽에 뚫린 작은 아치 문이 좀 특이하게 보였다.

아치 위에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 지고 오르는 예수상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 아치엔 예수를 십자가에 박은 못 3개와 면류관을 든 천사가 부조로 새겨져 있다.

교회는 독립 건물이 아니라 성채 안에 슬쩍 스며든 것처럼 보인다.

화려한 그림이나 조각상 없이 흰색으로 단순하게 꾸민 토르가우 교회 내부. 오른쪽에 설교대가 보인다.
화려한 그림이나 조각상 없이 흰색으로 단순하게 꾸민 토르가우 교회 내부. 오른쪽에 설교대가 보인다.






교회 안으로 들어선 첫인상은 단순한 흰색이다.

중앙은 천장까지 뻥 뚫리고 좌우와 뒤쪽은 3층 회랑으로 구성된 내부는 온통 흰색.

스테인드글라스도, 성상(聖像)과 성화(聖畵)도 없다.

정면엔 성찬례를 거행하는 대(臺)가 있고, 예배당 우측 중간쯤에 설교대가 있을 뿐이다.

파이프오르간이 있지만 1990년대에 설치된 것이라 한다.

오로지 말씀과 성찬례에만 집중하도록 설계된 구조다.


루터가 세상 떠나기 2년 전에 봉헌된 이 교회는 '개신교 교회의 모델 하우스'다.

1517년 '95개 논제'를 내걸고 종교개혁의 기치를 걸었지만 루터 당시에 개신교 교회 건물은 없었다.

가톨릭 성당이던 건물을 교회로 사용했다.

중세 가톨릭 성당엔 글 모르는 신자들에게 성경 내용을 알려주기 위한 성화와 성상도 많았다.

성화와 성상이 아무것도 없는 토르가우 교회

성경을 모국어(독일어)로 번역한 루터와 개신교 신자들에게

그런 설명은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선언으로 보였다.


독일 토르가우 지도

이 교회의 하이라이트는 설교대. 설교대는 마이크 등 음향 시설이 없던 시절

설교자가 잘 보이고, 말소리가 잘 들리도록 계단을 통해 올라가 설교하도록 만든 장치.

이 교회 설교대에는 신약 성경의 핵심 내용 세 장면이 그려져 있다.


앞쪽에서 볼 때 설교대 왼쪽엔

간음한 여인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땅바닥에 예수가 무언가 적고 있는 모습이다.

바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며 '용서'를 강조한 장면이다.

가운데는 열두 살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율법학자들을 가르치는 사건을 그렸다.

오른쪽엔 예수가 채찍을 들고 예루살렘 성전의 환전상을 쫓아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 그림은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왼쪽은 '오직 은총으로(sola gratia)',

오른쪽 성전 정화 사건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즉 루터의 종교개혁 3대 원리를 보여준다.

토르가우 교회는 개신교 교회의 모델이 됐다.

지금 한국의 대부분 개신교 교회에 성화와 성상이 없는 것도 그 뿌리는 토르가우 교회에 두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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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루터의 길을 가다] []

 아이슬레벤 루터가 태어나고 잠든 곳

아이슬레벤(독일)=김한수 종교전문기자

입력 : 2017.06.09 03:03


"복음, 더 전해야 하는데… " 마지막 설교


광장엔 파문 칙서 구겨 든 동상, 길바닥·교회 천장에는 루터 紋章
건물 벽 곳곳에 종교개혁가 초상도시 전체가 종교개혁 박물관

루터 초상화

"제 이름과 아빠, 엄마, 가족 그리고 친구들 이름과 소망을 적은 거예요."

지난달 24일 오전 독일 아이슬레벤(Eisleben)의 성() 베드로·바울 교회 곳곳에는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적은 종이쪽지가 놓여 있었다.

이 교회는 루터(1483~1546)가 유아세례를 받은 곳. 교회 내부는 새로 단장돼 있었다.

세례반(盤)엔 아이들이 얹어놓은 아기 인형이 놓였고, 주변엔 소망을 적은 천 조각이 덮였다.

인솔 교사 요하나 슈스턴씨는

"학생들과 함께 루터의 세례 교회를 찾아 오늘날 세례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고 했다.

학생들은 "매주 교회에 나오진 않는다"고 했다.

최근 유럽 교회의 신자 감소 현상이 두드러지만

현지에서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종교성을 이어가는 모습이었다.

아이슬레벤마르틴 루터가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곳이다. 루터 63 인생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루터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학업을 위해 10대 중반에 고향을 떠났지만 고향과의 관계는 꾸준히 유지했다.

루터의 마지막 고향 방문은 사망 한 달 전이었다.

루터는 1546년 1월 23일 세 아들과 함께 비텐베르크를 출발해 고향으로 향한다.

이 지역 만스펠트 백작의 영토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서였다.

닷새 만에 고향에 도착한 루터는 2월 15일 시내 중심의 성 안드레아스 교회에서

마태복음 11장을 본문으로 마지막 설교를 한다.

약 30여분간 설교를 이어가던 루터는

"이 복음에 관해 훨씬 더 많은 말을 해야겠지만, 내가 너무도 연약하여 여기서 이만 맺고자 한다"며

설교를 마쳤다.

사흘 후 성 안드레아스 교회가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방에서 영면했다.

아이슬레벤 광장의 루터 동상. 왼손엔 성경, 오른손엔 교황의 파문 칙서를 구겨 들고 있다.
아이슬레벤 광장의 루터 동상.
왼손엔 성경, 오른손엔 교황의 파문 칙서를 구겨 들고 있다.




아이슬레벤은 도시 전체가 루터 박물관 같았다.

생가(生家)와 숨을 거둔 집이 박물관으로 개방되는 것은 물론

거리 건물 벽면에 루터와 종교개혁가들의 얼굴을 벽화로 그려놓은 곳이 수두룩했다.

심장과 십자가, 장미로 구성된 루터의 문장(紋章) 역시

도로와 중앙 광장 바닥 그리고 성 베드로·바울 교회 천장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특히 중앙 광장에 서 있는 루터의 동상은 여타 도시와 다른 포즈였다.

대부분 도시의 루터 동상이 왼손에 자신이 번역한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인데 반해,

아이슬레벤의 동상은 오른손에 레오 10세 교황이 보낸 파문 칙서를 구겨서 들고 있는 게 독특했다.


레오 10세 교황은 애당초 루터가 '95개 논제'를 제기했을 때만 해도 사태를 대수로이 여기지 않았다.

"루터는 술 취한 독일인이다. 술 깨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루터가 치켜든 횃불은 확산했고, 교황은 말을 바꿨다. "주님의 포도밭에 뛰어든 멧돼지다."

루터가 유아세례를 받은 독일 아이슬레벤의 성 베드로·바울교회. 루터의 세례를 기념해 바닥을 둥글게 파서 만든 침례탕 주변에 어린이들이 가족들의 이름과 소망을 적은 종이를 펼쳐놓았다. 이 교회엔 루터 부부와 부모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천장엔 루터의 문장(紋章)이 그려져 있다.
루터가 유아세례를 받은 독일 아이슬레벤의 성 베드로·바울교회.
루터의 세례를 기념해 바닥을 둥글게 파서 만든 침례탕 주변에
어린이들이 가족들의 이름과 소망을 적은 종이를 펼쳐놓았다.
이 교회엔 루터 부부와 부모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천장엔 루터의 문장(紋章)이 그려져 있다.
/김한수 기자

교황의 표현처럼 루터는 저돌적(猪突的)으로 번역하고, 저술하고, 설교했다.

마침 보급되던 금속활자 인쇄술은 종교개혁의 날개가 됐다.

1500년부터 1540년까지 독일에서 나온 책의 3분의 1이 루터의 저서였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설교는 루터의 또 다른 무기였다.

그가 평생 한 설교 중 현재까지 남은 것은 2300편에 이르며,

특히 1528년에는 145일 동안 195번까지 설교한 기록도 있다.

아이슬레벤 지도
500년 전 루터 종교개혁의 현재 모습을 확인해볼 수 있는 현장은 지난달 말 베를린 '교회의 날' 행사장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던 1949년 독일 개신교계가 사회 통합을 위해 창설해 격년으로 열리는 '교회의 날'은 현재 독일인들에게 개신교가 차지하는 위상을 잘 보여주는 현장이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토론을 벌인 브란덴부르크 광장,
대규모 박람회가 열린 메세(Messe), 알렉산더 광장 등 도심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알렉산더 광장에서 만난 키라 라우덴(28)씨는 "12년 전 하노버 행사 때부터 매번 '교회의 날'을 찾고 있다"며 "이 행사를 통해 크리스천으로서 소속감을 확인하고,
토론과 강연을 들으며 크리스천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주 루터 종교개혁 유적을 순례한 기독교한국루터회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국장 원종호 목사는
"흔히 유럽에선 개신교가 쇠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들에게 개신교는 삶과 문화에 녹아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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