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4.18 03:09
채만식 '레디메이드 인생'
조선 시대, 대다수 양반은 무직자였다.
정기, 수시 과거가 열릴 때마다 전국에서 응시생들이 한양까지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돌아갔다.
그러다가 낙방을 거듭하고 서울까지 신고 갈 (하루에 한 켤레씩 닳는) 짚신을 마련할 수 없으면 포기했다.
등과(登科)하지 못한 양반의 초라함은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직종 다양화로 서민의 일자리는 늘었지만 인텔리들의 일자리는 드물었다.
현진건, 염상섭, 채만식 등의 식민지 시대 문학에는 인텔리 실업자 이야기가 많다.
채만식 단편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의 주인공 P는
'취직운동에 백전백패(百戰百敗)의 노졸(老卒)인지라
K씨의 힘 아니 드는 한마디의 거절에도 새삼스럽게 실망도 아니 한다.'
필자의 성장기였던 1950년대에는 주위에 실직자가 일하는 사람보다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사업을 일궜거나 고위직에 오른 사람은 일가친척들의 일자리 마련에 골수가 말랐다.
그 때문에 '죄와 벌'에서
"빌붙어 볼 곳도 없는 처지가 어떤 건지 아십니까?"라는 여주인공 아버지의 대사를 읽었을 때
무한한 슬픔이 밀려왔다.
그런데 1960년대 경제개발을 하면서 피눈물 나는 보릿고개가 마침내 사라지고
그런데 1960년대 경제개발을 하면서 피눈물 나는 보릿고개가 마침내 사라지고
지극히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나마 자력 생존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무작정 상경한 농촌 처녀들도 입주 가정부로 프라이버시 없는 삶을 살기보다 공장에 취직했고
점차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게 됐다.
1970년대와 80년대 학번들은 유신에서 5·18로 이어지는 엄혹한 시기를 통과하며
1970년대와 80년대 학번들은 유신에서 5·18로 이어지는 엄혹한 시기를 통과하며
데모가 주업이 되다시피 했다. 당연히 학업 성취가 상당히 미약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증오한 군사 정권들의 경제정책과 고속성장 덕분에
그들에게는 취업 문이 활짝 열렸고 나라의 번영에 기여할 기회도 주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한편으로 복 받았고 다른 한편으론 불행했던 내적 분열의 세대이다.
봄이 되어 신록과 꽃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산과 들을 보며
전국의 민둥산을 울창한 숲으로 가꾸어낸 우리 민족의 저력에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봄빛도 외면하고 싶은 수많은 청년 실업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대선 후보들이 저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일자리 창출을 약속하고 있다.
그중에서 지속 가능하고 성장·확장 가능성이 큰 탄탄한 일자리 창조 계획을 내놓은 후보를
잘 가려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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