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환목사님

내 인생의 가시 (고후 12:7~10)

colorprom 2017. 3. 23.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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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가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고후 12:7~10)                                                                                



서론


인생은 힘들고 고달프며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우리의 삶에 고통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학자인 C. S. Lewis는 [고통의 이유]라는 책을 통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나

차별을 두지 않고 찾아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사용하셔서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고통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도구 중에 하나로써

여러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이는 육신의 질병을 통해서 올 수도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통해서 올 수도 있으며,

자녀문제를 통해서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모양이 어찌 되었건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을 사용하셔서 그분의 크신 뜻과 계획을 우리의 삶에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고통이라는 것을 사용하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그분의 크신 뜻과 계획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러한 고통이 우리에게 찾아올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우리에게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그리고 그러한 고통이 우리에게 임할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명쾌하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자리에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으로인해 믿음이 흔들리시거나 어찌할 바를 모르시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큰 위로와 기쁨을 찾으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여러분의 주변에 고통으로 인해 시험든 형제나 자매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오늘 말씀을 나눔으로써 사도 바울에게 임한 큰 깨달음이 그들에게까지 전달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문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고린도후서는 “눈물의 서신” 혹은 “고통의 서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웁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쓸때

지극히도 크고 어려운 고통과 아픔속에서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쓸 당시의 상황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로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거짓된 교사로부터 인격과 사역에 대한 심한 공격을 받았고,

심지어는 그들로부터 구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동역자들로부터 그의 충정과 지도력까지도 의심을 받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그가 2년동안이나 자신의 땀과 피를 흘려가며 가르쳤던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이

거짓교사들의 말에 넘어가 바울을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이 일들은 바울이 평생토록 겪어본 일들 중, 가장 심한 고통이었고 아픔이었습니다. 

바울 역시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왜 그에게 이토록 아픈 고통이 찾아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토록 막중한 고통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헤메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고린도후서속의 바울은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며, 불신을 당하고,

영혼의 깊은 고뇌를 경험하는 한 연약한 인간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역시 믿음의 장수답게도 그에게 이러한 고통을 허락하시는 예수님의 크신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자기에게 처해진 상황을 오히려 크게 기뻐하면서 그 고통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게 됩니다. 

그러한 바울의 고백을 처음부터 들어봅시다. 


7절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로 부터 받은 계시가 지극히 크다고 이야기 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영적인 특권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직접 뵙고 들었습니다. 

그 후에도 예수님께서는 최소한 네 번 이상 친히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꼭 필요할 때마다 그에게 지시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또한 갈 길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수 많은 귀신을 쫓고, 손수건으로 병자를 고쳤습니다. 

게다가 독 뱀에게 물려도 살아남고, 구타를 심하게 당해도 살아났으며, 험한 광풍속에서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1층천과 2층천을 지나 3층천인 천국에까지 가서 주님의 얼굴을 친히 뵙고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 바울의 평생에 부어주신 계시는 정말 차고도 넘쳤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히 큰 계시를 받은 사도 바울

남들보다 신령한 비밀을 더욱더 많이 안다는 영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드시,

이러한 특권을 받은 사도 바울에게는 교만해 질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주변에는 그처럼 계시를 받은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의 동역자인 디모데, 실라, 디도, 에바브로디도, 그리고 아볼로 역시도

예수님과 깊은 만남을 가지고 있는 신실한 신앙인들이였지만,

그 누구도 바울과 같은 계시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바울은 그의 동역자들 앞에서 교만해 질 수 있는 요소가 충분히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7절에 고백합니다.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즉, 이 말은 현대어로 바꾸어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남들보다 몇 갑절이나 크게 받은 계시들로 인하여 교만해 질 수도 있었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내가 교만해 지지 않도록

나에게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진심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의 육체에 가시를 박아놓으심으로써

그를 교만해 지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가시”는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은 아마도 장미를 손질하다가 손가락에 작은 가시가 박히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을것입니다. 

혹은 옷장을 나르다가 손에 밖히는 작은 가시를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몬에 씌인 가시라는 헬라어는 “가시”가 아니라 “말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로마 병정들이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밖기위해 썼던 대못을 나타내는 단어로써

이는 누군가를 찌르거나 고문하는 데 쓰였던 끝이 뾰족한 커다란 말뚝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말뚝이 사도 바울의 육신에 밖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손에 작은 가시가 밖혀 있어도 온 몸이 불편하고 아픈데,

커다란 말뚝이 몸안에 밖혀 있다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럽겠습니까? 

움직일때마다 이 말뚝이 속을 찌른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바울의 자랑과 교만을 찌르고 죽여 그를 겸손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러한 말뚝을 그에게 밖아놓은 것입니다.  


그 말뚝에 대해서 조금더 자세히 볼까요? 

바울은 더 나아가 자신의 몸에 박혀있는 그 말뚝은 곧 “사단의 사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누구는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던 눈병이라고 이야기 하고, 누구는 간질병이라고도 하며,

누구는 사도 바울의 서툰 화술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헬라어를 참고하지 않고 만들어진 견해입니다. 

왜냐하면 “사자”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신약성경에 188회 이상 사용되는데,

오직 인격적인 존재를 가르킬때에만 쓰였기 때문입니다. 


눈병은 인격적 존재가 아닙니다.  간질도,  서툰 화술도 인격적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면 뭐가 바울을 괴롭힌 인격적 존재일까요?  


고린도서의 흐름을 고려하자면 사탄의 편에 서서 바울의 사역을 공격하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명예를 훼손했고, 바울에게 욕을했으며, 그에 대해 거짓 증거를 하면서 다녔던 이들이

바울의 삶에 밖혀있는 말뚝, 즉 “사단의 사자”라는 것이지요. 


바울은 지금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며, 불신을 당하고, 영혼의 깊은 고뇌를 경험하는 바로 그 시점에 서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물론 자신에게 왜 이러한 고통이 오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교만해 지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뚝을 밖아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얼마나 컷던지 바울은 하나님께 이 육신의 말뚝을 뽑아달라고,

그 사단의 사자들을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합니다. 


8절입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이 말뚝을 뽑아달라고 3번이나 간구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3번이라는 숫자는 문자적인 3번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유대인의 관점으로 볼 때에 완전수를 나타내는 3은 지속적인 간구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어찌됐건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그 말뚝을 뽑아달라고 열심히 간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9절을 통해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바울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여기에 보면 사도 바울이 “나에게 이르시기를” 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표현은 헬라어 본문에서 완료 시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한 번 기도 했을때도 하나님께서 안된다고 응답하셨고,

두 번째 기도했을때도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셨으며,

세 번째 기도했을 때에도 마음을 바꾸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 수차례 간구했고 예수님께서는 바울의 요청을 그 때마다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사도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울에게 그 가시가 있는 것이 그의 영혼을 더 잘되게 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울의 가시를 뽑는 대신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여기서 “족하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차고 넘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의 육신에 밖힌 말뚝을 뽑는 대신, 차고도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예수님의 온전하신 능력을 경험하게 했던 것입니다.  


"바울아. 내가 너의 고통을 모르는 것이 아니란다. 

그러나 내가 그 말뚝을 너로부터 뽑아내지 않는 이유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고,

이로인해 내가 부어주는 차고 넘치는 내 은혜를 네가 경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왜 그로부터 말뚝을 뽑지 않으시는지에대해서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약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를 차고 넘치도록 부으시며,

이를 통하여 예수님의 능력이 그에게 온전히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이 위대한 사실을 깨닫게 된 바울은 역시 믿음의 장수답게 자신의 태도를 온전히 바꾸어

도리어 크게 기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깊이 밖혀있는 말뚝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9절입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기쁨으로 고백합니다.


"여러분, 제 안에는 커다란 말뚝이 밖혀 있습니다.

제가 교만해 질까봐 예수님께서 박아놓으신 말뚝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제게 이러한 말뚝을 통하여 저를 겸손하게 만드시는 것일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말뚝을 뽑지 않으시는 이유는

제가 이 말뚝으로 인해 연약해 질 바로 그때에

예수님의 능력이 제안에 온전히 머물게 되기 때문이랍니다!  

때문에 저는 이 말뚝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바울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그토록 밉고 싫었던 그 말뚝이 이제는 바울의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말과 행동과 주먹으로 괴롭혔던 그 형제들이 이제는 바울의 자랑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후로 사도 바울은 말뚝을 뽑아달라는 간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말뚝을 두손으로 부여잡고 그가 가야할 그 길을 기쁨으로 묵묵하게 걷기 시작합니다. 

그는 물론 그 말뚝으로 인하여 많이 아파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크고도 막중한 고통이 그 말뚝을 통하여 그에게 오리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말뚝이 주는 고통보다 그것을 덮어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쏟아 부어주시는

그분의 차고 넘치는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을 바울은 알았기에

믿음의 선한 경주를 달음박질하며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결국 그는 10절을 통하여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고백을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이 얼마나 믿음의 장수와도 같은 고백입니까?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매력이 아닙니까? 

우리는 죽음으로써 삽니다!  우리는 낮아짐으로 높아집니다! 

우리는 버림으로써 얻습니다! 

우리는 약할 그때에 강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거슬러 오르는 기독교의 역리의 비밀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그의 아픔과 낮음을 통하여 온전하여 진다는 사실! 

내가 약할 바로 그때에 예수님의 능력이 나에게 절정으로 임할 수 있기에 내가 가장 강해진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깨달은 고통의 이유인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어떠한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겠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석가인 매튜 헨리는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통의 이유를 깨달은 바울은

그의 육체에 대한 말뚝에서부터 벗어나기를 간구하기를 멈추고

자신의 연약함을 환영하고

또한 그것들을 자신에게 거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크게 기뻐함으로 자랑한다. 

찬란한 태양이 거대한 산의 어두운 계곡들을 밝혀 그 모습을 새롭게 변화시키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사도 바울의 구석구석에 심지어는 가장 보잘 것없는 곳까지 스며들어

바울을 승리로 이끈다."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이 본문말씀에서 발견되어지는 진리는 사도 바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바로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에게도 있고, 여러분에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고통이 너무 싫어서 하나님께 울부 짖으며 이 고통을 떠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적도

수 없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기도로 인해서 떠나간 고통도 있고, 떠나지 않은 고통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떠나가지 않을때...  어떻하지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을 불신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꼭 필요한지 아시기에 고통을 남겨 두신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고로 우리는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그 고통은 하나님께서 내가 교만해 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남겨두신 사랑의 증표이니까요.  


그러나 이것도 명심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고통만 주지 않으십니다. 

고통을 주신 후에는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충만하신 은혜까지 부어주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은혜가 내게 차고 넘칩니다”는 고백까지도 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는 것...  


고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주님의 능력은 저의 약함을 통하여 온전해 집니다. 

당신의 은혜는 제 고통보다 훨씬더 큽니다.  때문에 저는 기뻐하면서 고백합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맺습니다.  인생은 힘들고 고달프며 어렵습니다. 

그 대표적인 이유는 우리의 삶속에 고통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신 사랑의 증표요,

또한 차고 넘치는 은혜를 부르는 사랑의 호루라기라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이 사실 기억하면서 우리의 말뚝을 부여잡고 열심히 살아봅시다!  

우리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운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늘 기쁘고 당당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읍시다!  

우리 약한 것을 자랑합시다!  육신의 말뚝을 자랑합시다!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에게 차고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우리의 말뚝을 자랑합시다! 


예수님의 지극히도 크고 놀라우신 은혜가

여기에 말뚝을 품고계신 모든 성도 여러분들 위에 차고 넘치도록 부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