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관리를 잘 해오셨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오신 분이었다.
병실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눌 땐 즐겁게 환담하셨지만 헤어지기 전 기도할 때엔 눈물을 보이셨다.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까?”
질병은 분명 비정상이다. 하지만
비정상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과연 비정상이라 할 수 있을까 싶다.
전통적으로 질병은 하나님의 징벌이나 죄의 결과로 생각해 왔다.
그런 인식으로는 중한 병일수록 중한 죄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전통적 인식으로 모든 질병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눈먼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익숙한 본문이지만 우리가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던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그가 누구의 죄로 질병에 걸렸는지 물은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라는 점이다.
둘째, 질병의 원인에 대해서 본인의 죄만 언급한 게 아니라 부모의 죄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를 이어 축복이나 징벌이 이어진다는 개념은 비교적 오래 유지되고 있는데
어쨌든 자기 문제가 아닌 질병 개념이 그전부터 있었다는 말이다.
셋째, 이 내용이 눈먼 자가 눈을 떴다, 즉 질병이 고쳐졌다는 것에만 국한되는 성경 내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이 이 상황에서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4∼5)고 말씀하시고,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를 가진 실로암 연못에 가도록 한 것을 반드시 같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의 눈먼 사실이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를 포함하여 질병은 정말 죄 때문은 아닌가? 사실 죄의 요소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예수님과 비슷한 어법으로 말할 때, 앞의 말이 정말 아니라서가 아니라 뒷말을 강조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질병은 비정상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죄다.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그 죄가 자신의 죄가 아닐 수도 있다.
공해로 인한 암 발생은 우리 인류의 죄인 것이다.
암에 걸린 사람은 그 죄의 애꿎은 피해자가 된 셈이니 우리 죄를 대신 졌다고 생각하자.
암이 무서운 것은 죄가 무서운 것과 한 가지 흡사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과 너무 닮아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죄인이라서 죄를 우리 일부처럼 여기며 자연스럽게 친화된다.
비슷하게, 암세포는 우리 몸의 정상세포처럼 인식되어서 빠르게 증식돼도 면역력으로 처리가 안 된다.
항암제를 쓸 때 머리가 빠지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무엇이 암세포인지 구분 못하는 상황에서
일단 빨리 자라는 세포들을 모두 억제 혹은 사멸시키는 목적의 약을 사용하면
비교적 빨리 자라는 세포에 해당하는 머리가 빠지는 것이다.
항암치료는 나날이 발전하여 우리 몸이 스스로 구분하지 못하는 암세포를 구별해내고 있다.
죄에 대한 우리의 분별력도 나날이 발전하면 좋겠다.
‘장로님, 우리 죄를 대신하여 암에 걸린 게 참 안타깝습니다.
저희를 대신하여 죄와 싸우게 되셨으니
저희는 이제 기도와 관심과 구체적인 도움으로 이 싸움의 아론과 훌이 되겠습니다(창17:12).
부디 모세처럼 피곤한 중에도 저희와 함께 잘 견디기 바랍니다.
매일 기도하며 함께하겠습니다.
암과 싸우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이 글을 함께 나눕니다. 힘내세요.’
◇최의헌 약력: 연세의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복음교회 협동목사,
심리상담연구원 나무와 새 원장, 한국자살예방협회 부회장, 연세로뎀정신건강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