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자연은 우주가 베푸는 커다란 은혜이자 선물이라고 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만나고 가꾸면서 참된 행복을 누리는 법을 설파했다. 인간과 자연의 참된 소통을 일깨우는 그의 맑고 향기로운 가르침을 들어본다. 자연 친화적인 삶과 함께 그가 강조한 것은 비우는 삶이다. 그는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사소한 일상에서 우러나는 기쁨이 진정한 행복인데도, 다들 그걸 놓친 채 가짜 쾌락을 찾고 있다며 "밖이 아닌 안으로 넉넉해지라"고 가르쳤다. 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불가의 가르침은 초월해야 할 허무가 아니라 순간 속에서 살고 순간 속에서 죽는 삶의 절박함을 가리킨 것이라고 풀이했다. 어지러운 세상에 휘둘리는 것은 마음에 중심이 없어서라고 했던 그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그에게 마음을 기대곤 했다.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B9%FD%C1%A4+%BD%BA%B4%D4&nil_profile=newskwd&nil_id=v20100311171610007" target=new>법정 스님은 한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는 대학 재학중이던 1955년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날 집을 나선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대산으로 가기 위해 밤차로 서울에 내린 스님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의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스님(1888~1966,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삭발하고 먹물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그 길로 밖에 나가 종로통을 한바퀴 돌았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부목(負木ㆍ땔감을 담당하는 나무꾼)부터 시작해 행자 생활을 했다.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 박완일 법사(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이 함께 공부했다. 법정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C7%D8%C0%CE%BB%E7&nil_profile=newskwd&nil_id=v20100311171610007" target=new>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하다 4.19와 5.16을 겪은 스님은 19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B5%BF%B1%B9%BF%AA%B0%E6%BF%F8&nil_profile=newskwd&nil_id=v20100311171610007" target=new>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절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했던 법정스님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후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B9%DD%C3%BC%C1%A6%BF%EE%B5%BF&nil_profile=newskwd&nil_id=v20100311171610007" target=new>반체제운동의 의미와 출가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 다시 걸망을 짊어진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법정스님은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C8%AD%C0%FC%B9%CE&nil_profile=newskwd&nil_id=v20100311171610007" target=new>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스님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지난해 겨울은 제주도에서 보냈다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법정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대중과의 소통도 계속했다. 특히 1996년 고급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 할머니(1999년 별세)로부터 아무 조건없이 기부받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한 후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줬다. 법정스님은 2003년 12월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기법문은 계속하면서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들을 위로했다.
산문인으로서 법정스님은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우리 출판계 역사에도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겼다. 스님은 해인사에 살 당시 팔만대장경이 있는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C0%E5%B0%E6%B0%A2&nil_profile=newskwd&nil_id=v20100311171610007" target=new>장경각을 가리켜 "빨래판같이 생긴 것이요?"라고 묻던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있는 한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 전통과 타성에 젖어 지극히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맹목적인 수도생활에 선뜻 용해되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스님의 이런 원력은 스님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의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법정스님은 다른 종교와도 벽을 허물었던 것으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교수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이밖에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1994년부터는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어왔다.
헤럴드생생뉴스(online@heraldm.com)
동창카페에 친구가 올려준 기사를 감사히 이리 옮겨왔습니다.
나도 올리고 싶었던 기사라서 얼른 얻어왔습니다.
~법정스님같으신 어르신들과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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