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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엔리케 그라나도스(1867~1916), 스페인 음악의 거장

colorprom 2022. 9. 28. 18:22

[박종호의 문화一流]

아내와 함께 비극적으로 떠난 스페인 음악의 거장

 

스페인의 감성을 살린 음악으로 작곡가와 피아니스트 명성 얻어
1차 대전 소용돌이 속에서도 뉴욕 메트로폴리탄·백악관 무대 올라
귀국 배편이 독일 잠수함 공격에 침몰하면서 아내와 비극적 죽음

 

입력 2022.09.28 03:00
 
 

엔리케 그라나도스(1867~1916)는 긴 생애를 살지도 않았고 많은 작품을 남기지도 않았지만,

스페인 음악에 한 획을 그은 작곡가다.

카탈루냐 출신으로서 바르셀로나에서 성장한 그는 어려서 피아노를 배웠고,

곧이어 그는 뛰어난 피아노 기교에 독특한 감성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는 파리음악원에서 공부하기 위해서, 파리로 갔지만 입학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2년 동안 그는 파리음악원의 청강생으로 공부하거나

음악원 교수들에게 개인 지도를 받으며 프랑스 음악을 자신의 카탈루냐 감성에 조화시켰다.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그는 오페라 ‘카르멘의 마리아’를 작곡하여

스페인 왕 알폰소 13세의 찬사를 받고 22세에 작곡가로서 존재를 굳힌다.

또한 마드리드 왕립 음악원 경연에서 최고 독주자상을 받아서 피아니스트로서 명성도 떨친다.

 

1916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오른 오페라 ‘고예스카스’ 출연진들(왼쪽 사진).
이 극장에서 상연된 최초의 스페인 오페라였다.
작곡가 엔리케 그라나도스(가운데 위 사진)는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양산’(가운데 아래 사진) 등
밝은 느낌의 그림에서 감동받아 피아노 모음곡 ‘고예스카스’를 썼고 이를 바탕으로 오페라가 제작됐다.
그라나도스 부부(오른쪽 사진)는 미국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승선한 배가 독일 잠수함에 피격돼 목숨을 잃었다. /바르셀로나 음악박물관·위키피디아

 

그러던 중에 그라나도스는 프라도 미술관을 비롯한 몇몇 미술관에 있던,

스페인 최고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그림들로부터 큰 감명을 받는다.

고야의 회화들 가운데에 알려진 그로테스크하거나 공포적인 작품이 아닌,

밝고 천진하며 토속적인 풍속이나 풍경을 그린 그림들에서

그는 자신의 뿌리인 스페인 정서에 대한 강렬한 감동을 느낀다.

그리하여 고야의 그림에서 받은 인상으로, 6곡의 피아노곡을 작곡하는데,

그것이 1911년에 발표한 ‘고예스카스(Goyescas)’라는 곡이다.

고예스카스란 말은 ‘고야풍’ 내지는 ‘고야 스타일’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글만으로는 음악을 들려줄 길이 없으나,

‘사랑의 속삭임’ ‘등불 옆의 판당고’ ‘비탄, 또는 처녀, 그리고 나이팅게일’ 등의

곡 제목만으로도 음악을 짐작해볼 수가 있다.

나중에 ‘지푸라기 인형’을 추가하여 모두 7곡으로 된 ‘고예스카스’는

스페인적인 감성을 기막히게 나타낸 피아노 모음곡이 되었다.

이것은 그라나도스가 그린 특유의 향취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연주하기 어렵고 까다로운 피아노곡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런 스페인 감성에 대한 그의 음악적 자각은

후배 작곡가인 마누엘 데 파야파블로 카살스의 음악관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프랑스의 음악학자 롤랑 마뉘엘은 그를 ‘스페인의 그리그’라고 부르면서,

‘고예스카스’는 세련되고 관능적인 향수가 절절히 묻어나는 곡이라고 평했다.

 

고예스카스’는 크게 성공하였는데, 이것에 감동받은 미국 피아니스트 어니스트 셀링

그라나도스에게 ‘고예스카스’를 오페라로 만들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고예스카스’의 피아노 악보들을 바탕으로 해서

스페인을 무대로 하는 짧은 오페라고예스카스’를 완성하였다.

 

애당초 이 오페라는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상연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공연 직전에 그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파리 공연은 취소되고 말았다.

본인이 직접 피아노를 치기만 하면 되는 피아노곡과는 달리,

오페라는 여러 분야가 협력하여 극장에서 올리지 않으면 꽃을 피울 수가 없다.

파리 오페라 극장의 공연이 무산되자 그라나도스

유럽의 여러 극장에 공연 의사를 타진하였지만,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유럽에서

신작 오페라에 관심을 갖는 곳은 없었다.

 

그런데 멀리 뉴욕에서 연락이 왔다.

셸링의 얘기를 전해 들었던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상연 의사를 보인 것이다.

그라나도스는 기뻐하며 부인과 함께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렇게 하여 1916년 1월 18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고예스카스’가 초연되었으니,

그것은 이 극장에서 공연된 최초의 스페인 오페라였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라나도스 부부는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워싱턴에서 전화가 왔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그라나도스에게

백악관에서 연주해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그리하여 부부는 워싱턴으로 가서 백악관 콘서트를 하였다.

그라나도스가 직접 ‘고예스카스’를 연주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예정에 없던 연주회가 추가되어

부부는 미국으로 올 때 예매했던 돌아가는 여객선을 놓쳤다.

그 사이에 바르셀로나로 가는 배편들이 전쟁으로 완전히 끊겨버렸다.

그리하여 그라나도스 부부는 여객선이 운항하고 있던 영국으로 가는 배편을

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도버해협을 거쳐서 파리를 경유하여 육로로 바르셀로나로 가려고 했다.

 

영국에 도착한 그라나도스 부부는 페리를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고 있었다.

그때 독일 잠수함인 유보트가 페리를 향하여 어뢰를 발사하였고,

명중한 배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배의 승객들은 급하게 구명정으로 올랐고, 그라나도스도 구명정에 탔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라나도스의 뒤를 가리켰다.

그라나도스의 부인이 미처 구명정에 타지 못한 채로 가라앉는 배에 혼자서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라나도스는 부인을 구하려고 가라앉는 배로 다시 올라갔다.

 

하지만 그라나도스는 부인을 구하지 못하였다.

부부는 구명정에 탄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배와 함께 도버해협으로 가라앉았다.

 

당시의 정황은 목격자에 따라 말들이 좀 달라서,

물에 빠진 부인을 구하기 위해 그라나도스가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말도 있다.

 

어쨌거나 그렇게 부부는 함께 익사하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두 동강이 났던 배에서 그라나도스 부부가 탔던 부분은 가라앉지 않았고,

다른 부분만이 가라앉아 80여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당국은 한동안 수색 작업을 펼쳤지만 부부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이제 막 꽃을 피우려고 하던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는

쉰 살도 되지 못한 채로 이렇게 생을 마감하였다.

 

오페라고예스카스’는 그라나도스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