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땔감 때문에…경찰 발포로 농민 17명 사망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1930년 7월 함남 단천 주민 2000명 군청, 경찰서 습격...삼림조합의 가혹한 벌목 단속 항의
‘군중 습격과 경관 發銃’ ‘즉사 4명, 중경상26명’ ‘군청과 경찰서에 2000명 쇄도’
1930년 7월22일 조선일보 사회면에 심상찮은 기사가 났다.
톱 기사만큼 굵직한 제목이었다.
함경남도 단천에서 군중 2000명이 경찰서와 군청을 습격,
4명이 경찰 발포로 즉사했다는 내용이었다.
2000명 넘는 시위대가 경찰서, 군청을 습격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실탄 사격으로 4명이나 죽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21일(실은 20일) 오후4시경에 함남 단천군 하다면의 면민 약 2000여명이
수일전부터 삼림조합(森林組合)을 중심으로 한 분규사건 때문에
단천읍내에 있는 군청에 쇄도하야 군수를 면회하고
삼림조합의 해산과 이 사건으로 전일 검거된 오십사명의 면민을 석방하여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였으므로 군중들은 격앙하야 곤봉과 돌로 군청의 창문과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군중 습격과 경관 發銃’, 조선일보 1930년7월22일)
경찰 총격에 따른 사망자는 17명까지 늘어났다.
3·1운동을 떠올리게 하는 대규모 시위였다.
총독부의 신경이 함남 북쪽의 산간지대에 쏠렸다.
조선일보는 특파원을 현지에 파견했다.
‘단천 民擾사건 진상’(7월25일)이란 제목 아래
‘검거는 의연계속’ ‘가족은 통곡, 경계는 엄중’ ‘절명(絕命)된 13명 성명’ 등
시시각각 속보를 내보냈다.
◇박경리 소설 ‘토지’에도 등장
‘단천 삼림조합 반대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지금은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하지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에도 이 사건이 등장할 만큼, 주목을 받은 대사건이었다. 등장인물(관수, 해도사, 소지감)간의 대화에서 ‘단천 사건’의 원인을 묻자 이렇게 답한다. ‘반일 감정이 팽배해있던 차에 불을 붙인 것은 흔히 있었던 일 때문인데, 불법 벌채를 했다 하여 군청에서 조사하러 나간 놈이 남정네도 없는 집에서 아낙을 모욕했던 모양이라….’(’토지’ 14권 166~167쪽, 나남출판, 2002년)
◇주민 괴롭히는 삼림조합 반대
군중들이 군청에 몰려간 가장 큰 이유는 삼림조합 반대였다. 삼림조합은 1920년대 중반 임야조사사업을 마친 뒤, 각 군(郡)에 조직한 관제조합이었다. 임야 소유자와 연고자를 강제로 가입시키고, 벌목을 제한하면서 땔 나무 채취 시기와 채취량을 결정해 시행하는 역할이었다. 조합원들에 조합비를 거두고, 산불방지활동이나 송충이 구제, 벌채 제한 등 부역도 부담시켰다. 사실상 군청 직원이 겸임하는 사실상의 행정 기구로 이름만 조합이었다.
단천군에도 1929년 하반기에 조합이 설립돼 조합비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7월 하다면 연대리에서 삼립조합 직원이 조합비를 안낸 주민 집을 찾아갔다가 땔 나무를 발견하고, 폭언을 했다. 이에 주민들이 면사무소에 몰려가 항의하면서 삼림조합과 면직원, 순사를 구타했다. 그러자 경찰이 주민 수십명을 체포했고, 이에 분노한 주민들이 20일 군청에 몰려가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이다.
◇삼림조합의 가혹한 벌목 단속
총독부는 벌목을 제한하는 ‘금벌(禁閥)주의’를 고수했다. 국유림은 물론 사유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수령 20년 미만의 침엽수와 10척 미만의 활엽수는 베지 못하게 하고, 6척 미만의 나무는 가지도 꺾지 못하게 했다. 취사·난방을 땔 나무에 거의 100% 의존하던 주민들에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조합비도 부담스러웠지만, 돈을 낸다고 해도 땔감을 마음대로 채취할 수 없었다. ‘금벌주의’를 일선에서 시행한 삼림조합 직원과의 마찰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단천 주민들도 ‘이와 같은 가혹한 삼림간수 취체에는 견딜 수없다. 그리하여 삼림조합이라는 것을 해산케 하자!’(‘취지 모르는 촌민에게 취체 過酷이 禍因’, 조선일보 7월26일)면서 들고 일어난 것이다.
◇광화문, 동대문 등 경성 거리에도 격문 나붙어
‘단천 사건’의 여파는 컸다. 사건 며칠 후 경성 거리에도 단천 사건 진상을 알리는 격문이 붙기 시작했다. 29일 새벽 광화문 사거리 체신국 앞과 순사교습소 담장에 대자보가 나붙었다.(’단천사건에 관한 격문을 또 시내에 첨부’, 조선일보 7월30일) 관할 종로서 고등계는 긴장했다. 시내 한복판, 더욱이 순사교습소 담장에 버젓이 ‘조선만세’란 제목아래 단천 사건을 알리는 격문이 붙었으니, 그럴만했다. 그런데, 며칠 뒤인 8월3일 오후5시 동대문성벽에도 등사판으로 인쇄한 대자보 여러장이 나붙였다.
◇신간회, 김병로, 김진국 진상조사차 파견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 경성지회는 즉각 ‘단천 사건’ 현장 조사에 나섰다. 가인 김병로와 김진국이 대표로 단천에 파견돼 나흘간 현장 조사를 마쳤다. 8월1일 밤 8시 종로2가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사보고회를 가진다는 예고 기사( ‘단천 사건의 조사보고회’, 조선일보 8월1일)까지 나갔다. ‘단천 민요사건의 진상은 여시(如是)하다’란 제목으로 김진국이 연설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관할 종로서 고등계는 ‘연설 내용이 불온할 것’이라며 연설회를 금지시켰다.
◇'단천 사건’으로 함흥 형무소 만원
‘단천 사건’여파로 인근 함흥 형무소는 수감자로 가득찼다. ‘함흥 형무소는 정원 초과 300명! 수감자의 고초는 상상코도 남는다’(조선일보 9월17일)는 기사가 날 정도였다. 원래 수용 인원 550명을 초과해 852명이 수용됐다는 것이다. ‘이삼백명의 초과인원이 생긴 이유는 근자에 돌발한 단천습격사건으로 근 이백명의 인원이 증가되었다’면서 ‘850여명중에 사상범이 350명’이라고 했다.
삼림조합의 가혹한 벌목금지 조치에 전국 곳곳에서 격렬한 항의와 시위가 빗발쳤다. 총독부는 삼림조합을 통한 벌목 통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말로는 산림녹화를 내세웠지만 연료 문제에 대한 해결책 없이 나무 베는 것만 금지하는 건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단속에 걸린 지역 주민들과 땔감 가격 상승으로 서민들만 고통받을 뿐이었다. 산림녹화의 꿈은 해방을 기다려야 했다.
◇참고자료
최병택, 한국 근대 임업사, 푸른 역사, 2022
성주현, 일제하 단천 지역의 민족운동, ‘순국’ 통권 137호, 2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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