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거목’ 조순 전 경제부총리 94세로 별세
한국 경제학계의 대부이자 관료, 정치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23일 오전 94세로 별세했다. 조 전 부총리는 서울아산병원에서 노환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1928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기고와 서울대 상과대 전문부를 졸업했다. 6·25 당시 육군 통역 장교와 육군사관학교 교관 등으로 군에 복무했다. 종전 후엔 미국으로 유학해 UC버클리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8년 귀국해 서울대 교수로 강단에 섰다.
1968년부터 20년 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조순 학파’로 불릴 만큼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1974년 케인즈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교과서인 ‘경제학원론’을 펴냈다. 이 책은 정운찬 전 국무총리, 전성인 홍익대 교수, 김영식 서울대 교수 등이 차례로 개정판에 공동저자로 참여하면서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제학의 대표적인 교과서로 읽힌다.
고인은 육사 교관으로 있을 당시 제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88년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으며 경제 관료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1992년부터는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는데, 중앙은행의 독립성 문제를 두고 정부와 갈등을 빚다가 1년만에 사표를 냈다.
고인은 아태평화재단 자문 위원을 맡을 당시 인연을 맺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진출했다. 1995년 민주당에 입당해 제 1회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길고 흰 눈썹과 그 동안의 대쪽 행보가 강조되면서 ‘서울 포청천’ 별명을 얻었다. 취임 직전 벌어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에서 시장 취임식을 열어 화제가 됐다. 당시 아스팔트로 덮여있던 여의도 광장을 여의도공원으로 조성한 것도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시장 임기를 10개월여 남겨두고 통합민주당 대선 후보로 영입돼 대권에 도전했다.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전격 단일화하면서 대선은 완주하지 못했지만, 대신 초대 한나라당 총재를 맡았다.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은 고인이 직접 지은 것이다. 1998년 강원 강릉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돼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민주국민당 대표로 총선을 지휘했지만 선거 참패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엔 서울대·명지대 명예교수와 대통령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한반도선진화재단 고문 등을 맡아 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남희(92)씨와 장남 기송, 준, 건, 승주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5일이다.
♠[만물상] 조순
1966년 입학한 서울대 상대 24기는 경제학과 졸업생 49명 중 23명이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다수가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관계에도 진출해 경제 정책에 관여했다.
정운찬 전 총리, 김중수 전 한은총재, 구본영 전 과기처 장관, 최광 전 보건복지 장관 등이
이 기수다.
외국 여행 나가기도 만만치 않던 시절에 동기들이 떼를 지어 유학길에 오르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이 2학년이 된 1967년, 미 버클리대 박사 출신 조순 교수가 경제학과 강의를 시작했다.
케인스의 고전 ‘일반이론’을 교재 삼은 경제학 강독이었다.
그때까지 우리 대학 경제학 강의는
수요, 공급 곡선 달랑 그려 놓고 쌀 값, 연탄 값 파동을 논하는 수준이었다.
미국 본토에서 주류 경제학을 제대로 배운 조순 교수가
영어, 독어에 한시까지 곁들여 가며 설파하는 경제학 강의는 처음 경험해 보는 신세계였다.
젊은 학도들은 “나도 조순처럼 되고 싶다”며 너도나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세계 경제학의 바이블이 1948년 발간된 새무엘슨의 ‘이코노믹스’라면
대한민국 경제학 교과서는 조순 교수가 1974년 초판을 낸 ‘경제학원론’이다.
1990년 조 교수의 첫 제자 66학번 정운찬이 제2 저자,
정운찬의 첫 제자 78학번 전성인이 제3 저자로 차례차례 합류하면서 11판까지 나왔다.
조순은 경제부총리, 한은총재를 역임한 데 이어 정계에 진출해
서울시장과 고향 강릉 국회의원을 지냈다.
“햇볕 정책이 북한에 무조건 유연해야 한다는 경직성에 빠졌다”던
조순 의원의 국회 외통위 발언이 기억난다.
경직성이라는 경제학 용어로 유연함이 경직화된 햇볕 정책의 모순을 질타한 것이다.
▶어린 시절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운 조순은 서당 훈장님처럼 제자들에게 엄격했다.
학생들이 시국을 핑계 삼아 단체로 수업을 거부하자
“공부 안 하고 어떻게 나라를 구한다는 거냐”고 학점을 깎았고,
중간고사 때 커닝 기회 모색을 위해 뒷자리 쟁탈전을 벌이는 모습에
“당당치 못하게 무슨 짓이냐”고 호통을 쳤다.
평생 경제학을 공부하겠다는 제자들에겐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공부할 각오가 돼 있냐”고 물었다.
▶나라 경제 걱정하며 평생을 보냈지만 집안 살림 키우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서울대가 관악 캠퍼스로 옮긴 후 지은 봉천동 주택에서 25년 넘게 살았다.
자식들이 편한 곳으로 모시겠다고 하자
“내가 심고 가꾼 나무들이 이사 가지 말라고 말린다”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가 23일 94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대한민국 학계를 떠받쳐온 큰 나무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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