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에서 온 편지] [30]
영국軍 승리를 이끈 치명적인 비밀 병기는 그들의 ‘군기’였다
[대영제국에서 온 편지] [30] 영국軍 승리를 이끈 치명적인 비밀 병기는 ‘군기’였다
개전 한 달이 지난 우크라이나 전쟁이 결정적인 기류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어쩌면 러시아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채
‘실질적인’ 패배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도 종전과 평화까지는 갈 길이 멀긴 하겠지만
“러시아군이 어떤 식으로든 종국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함락시킬 것”이란 예상이
깨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의 진격은 곳곳에서 막히고 있고,
일부 지역에선 우크라이나군이 점령당했던 요충지들을 탈환하고 있다는 외신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이 수도 키이우를 함락시킬 가능성은 현재로선 많이 낮아진 듯 합니다.
러시아의 키이우 공략은 북서쪽과 북동쪽, 두 축선에서 진행됐습니다.
이 양쪽 전선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전세를 역전시키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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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단무기라는 함정
북서쪽 전선의 경우, 러시아군은 개전 초기 이르핀·부차·호스토멜 지역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키이우 도심에서 20~25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러시아군은 키이우를 바로 코 앞에 둔 이곳에서 몇 주째 거의 전진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군이 이르핀의 대부분 마을을 되찾았고, 안토노프 국제공항이 있는 호스토멜쪽으로 러시아군을 밀어내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키이우에서 서쪽으로 50km 거리에 있는 마카리우도 우크라이나군이 수복했다고 하는데, 이럴 경우 이르핀·부차·호스토멜 지역에 있는 러시아 주력군이 포위 공격을 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됩니다.
북동쪽 전선에서도 러시아군이 뒷걸음질치는 상황입니다. 키이우 전방 20~30km까지 진격했던 러시아군이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뒤로 25~35km나 후퇴했다는 소식입니다. 북동쪽 전선의 경우 구체적인 도시나 마을은 외신에 잘 나오지 않고 있지만, 미국의 CNN과 영국의 BBC·가디언 등이 자국 고위 정부 또는 군 관계자를 인용해 러시아군의 후퇴 상황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북동부와 남부 등 다른 지역에서도 우크라이나군의 환호성이 계속 들리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이 가장 먼저 점령했던 남부 해안도시 헤르손에선 최근 양측간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시청에 우크라이나 국기가 다시 걸리는가 하면, 공항에 주둔했던 러시아 헬기가 철수했다고 합니다. 우크리아나의 제2 도시인 북동부 하르키우에서도 러시아군은 도심쪽으로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도시는 러시아 국경에서 30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도 말이죠.
이와 함께 남동 해안 지역의 최대 전장(戰場)인 마리우폴에서도 우크라이나군의 저항이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친러 반군이 장악한 돈바스 지역과 2014년 러시아가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 중간에 있는 곳인데, 러시아는 돈바스와 크림반도를 연결하기 위해서 이 곳을 필사적으로 점령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곳 인근에서 탱크 등 러시아군 무기와 보급품을 실어나르는 군함이 우크라이나 공격으로 침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리우폴의 경우 결국에는 러시아군에 함락될 가능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다른 지역과 분리돼 완전 봉쇄된 채 몇주째 러시아군의 집중 포위공격을 받아 도시의 90% 가까이가 폐허가 됐다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수도 키이우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요 도시는 러시아군의 점령 위기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다만, 마리우폴은 조만간 함락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러시아도 이런 상황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5일 러시아의 고위 군 관계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첫번째 작전 단계는 끝났다. 이젠 동남부 돈바스 지역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집중할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러시아군 작전이 대부분 지역에서 실패했고, 그나마 점령 가능성이 있는 마리우폴 등 동남부 지역 전선에 집중하겠다는 변명처럼 들립니다.
한편, 러시아의 국방장관인 세르게이 쇼이구가 최근 2주간 자취를 감췄다가 이에 대한 의문이 커지자 방송 화면에 몇 초간 등장했었는데요. 우크라이나와 외신들은 그가 심장마비를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초기 작전 실패 때문에 푸틴이 그를 엄청나게 질책했고, 이 때문에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무려 1250발 이상의 미사일을 쐈다고 합니다. 러시아 공군은 매일 300회 이상 출격, 우크라이나 곳곳에 폭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실전에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최첨단 무기인 ‘킨잘’ 극초음속 미사일도 쏘고, 대량살상무기인 ‘열압력탄(진공폭탄)’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도 전쟁을 이기지 못하고 있네요.
병력 규모나 첨단 무기 수준, 국가 경제력 등 그 어떤 면을 봐서도 러시아의 압도적 완승으로 이미 결론났어야 할 전쟁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첨단 무기가 지배하는 현대전에서도 군인 수와 무기가 전쟁의 승리를 무조건 보장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과거 역사를 통해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무굴제국과 마라타 동맹
무굴제국(1526~1857)은 이슬람 종교를 받아들인 몽고의 후예, 바부르가 델리에 세운 나라입니다. 무굴은 아라비아어로 몽고를 뜻한다고 합니다. 3대 악바르(재위 1556~1605년) 황제가 세력을 크게 넓혔고, 6대 황제 아우랑제브(1658~1707) 때는 인도 대부분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아우랑제브가 데칸고원 원정 도중 사망하자 후계자들이 왕위를 놓고 갈등을 빚으면서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18세기 중·후반을 지나면서 무굴은 이름만 남은 껍데기에 불과한 신세가 되고, 대신 중북부엔 마라타 동맹, 중남부엔 하이데라바드 왕국, 남부엔 마이소르 왕국 등이 들어서 군웅할거 시대를 맞게 됩니다. 벵골 등에도 지방 권력이 활개를 쳤습니다. 이중 벵골 지역은 지난주 편지에서 설명했듯이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1757년 플라시 전투를 통해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지배자로 등극했습니다.
무굴에 이어 인도의 주도권을 쥔 세력은 마라타 동맹(1674~1818)입니다. 무굴의 아우랑제브 황제가 점점 이슬람 근본주의를 강화함에 따라 인도 중서부 마하라슈트라 서해안 지역에 살던 힌두교 세력의 반발이 거세졌습니다. ‘마라티어’를 말하는 이들 세력은 1674년 지역 토후였던 시바지 본슬레를 군주(차트라파티)로 세우고 마라타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무굴의 아우랑제브 황제가 위세를 떨치던 시대였기 때문에 마라타는 크게 기를 펴지는 못했습니다. 아우랑제브 사후 무굴제국이 내분에 휩싸이고 세력이 약화되면서 마라타는 본격적인 세력 확장에 나서게 됩니다. 18세기 중반이 되면 마라타는 무굴제국의 보호자를 자처할 정도가 됩니다.
한편, 웰링턴 장군의 지휘로 1799년 남부의 마이소르 왕국을 무너뜨린 영국 동인도회사는 이제 인도 최대 세력인 마라타 동맹을 겨냥하게 됩니다. 벵골의 지배자를 넘어, 인도의 지배자로 올라서려 하는 참입니다. 당시 마라타 동맹은 인도의 75%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인도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마지막 세력이었습니다. 당시 마라타 동맹은 5대 세력의 동맹체였습니다.
◇ 아사예 전투 (1803)
영국과 마라타 동맹은 모두 3 차례 맞붙었습니다. 제1차 영국-마라타 전쟁(1775~1782)은 마라타 동맹 내 권력 다툼에 영국 동인도회사가 얽혀들면서 발발했습니다. 당시 마라타 동맹은 ‘페슈와(지도자라는 뜻)’라고 불리는 대재상이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는데요. 이 페슈와 자리를 놓고 삼촌과 조카 집안이 살육전을 벌였습니다. 즉, 페슈와가 죽고 그 형이 후임이 됐는데 삼촌이 후임이 된 큰 조카를 살해하고 스스로 페슈와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 큰 조카의 유복자가 태어나면서 주요 마라타 세력들이 그 아이를 옹립했고, 쫓겨난 삼촌이 영국 동인도회사에 영토 일부를 떼주면서 군사 지원을 받는 ‘슈라트 조약(1775)’을 체결했습니다. 전투는 엎치락뒤치락했습니다. 영국군 부대가 전멸하기도 하고, 마라타 부대가 패배하기도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무승부 정도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1803~1805) 때에는 전쟁사에도 곧잘 등장하는 아사예 전투가 하이라이트입니다. 오늘은 군사 역사학자인 맥스 부트가 쓴 책 ‘전쟁이 만든 신세계(Made in War)’라는 책을 중심으로 아사예 전투를 들여다볼까 합니다. 아사예 전투를 시작으로 3년간 지속된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도 제1차 때와 마찬가지로 마라타 동맹 내 갈등과 분열이 원인이었습니다.
19세기 초 마라타 동맹은 페슈와 세력 이외에 홀카르, 신디아, 베라르, 가에크와드 등 모두 5대 세력이 주도했습니다. 이중 홀카르와 신디아가 가장 강력했고, 둘은 격하게 대립했습니다. 결국, 1802년 전투에서 ‘홀카르’가 ‘신디아’와 당시 페슈와인 바지 라오 2세 연합군을 패퇴시켰습니다. 그러자 바지 라오 2세가 영국의 동인도회사측에 자신이 페슈와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영국의 웰즐리 총독은 지금이 인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얻기 위해 마지막 장애물인 마라타 동맹을 무릎 꿇릴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웰즐리 총독은 당시 소장이 돼 있던 동생 아서 웰즐리(후에 웰링턴 공)에게 군사작전에 대한 전권을 부여했습니다. 웰링턴은 바지 라오 2세를 복귀시키기 위해 마라타 동맹의 수도 푸네로 진격했습니다. 예상과 달리 웰링턴은 아무런 저항없이 푸네를 점령했고, 바지 라오 2세는 페슈와를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다른 마라타 세력이 반발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신디아와 베라르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투는 지금의 뭄바이에서 내륙으로 약 200km 떨어진 아사예에서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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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때 영국측 병력은 9500명이었습니다. 2개 보병연대와 1개 기병연대를 중심으로 한 순수 영국군이 4500명, 마이소르 왕국의 인도병 5000명이었습니다. 대포는 17문이었습니다. 반면, 마라타측은 신디아와 베라르의 연합군으로 총 병력이 최소 5만명에 달했습니다. 이중 핵심은 유럽인들이 지휘관을 맡고 있는 1만명 규모의 보병이었습니다. 그 뒤에는 1만~2만명의 비정규 보병과 3만~4만명 정도의 비정규 기병이 있었습니다. 대포는 100문 이상이었습니다.
당초 웰링턴은 부하인 제임스 스티븐슨 대령과 각기 독자적인 작전을 벌이다 9월 24일 병력을 합쳐 총공격을 가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직전 예상보다 적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스티븐슨 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독자적인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당시 그는 영국군이 공격당할까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적이 후퇴해서 일전을 벌일 기회를 놓칠까봐 걱정”이었다고 합니다.
이날 전투는 실질적으론 영국군 4500명과 신디아·베라르군 1만명간의 대결이었습니다. 오후 3시 스코틀랜드 병사들로 구성된 제78보병연대가 “(영국군의) 취약한 대열에 죽음을 토해낸” 마라타군의 100여문 야전포를 향해 곧장 진격을 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막이 올랐습니다. 영국군은 규정대로 1분에 75보로 전진을 계속했습니다. “정지, 준비, 어깨총, 발사” “탕탕탕” “착검” 영국군의 진격에는 추호의 망설임이나 전열의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다른 쪽에선 영국군 피해가 컸습니다. 오른쪽 전선 최전선에 있던 중대 절반 규모의 선발대가 수천 발의 머스킷 총알과 수십 발의 포탄 집중 공격을 받아 전멸했습니다. 그러자 마라타군이 여세를 몰아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습니다. 급박한 상황이 되자 제74보병연대 병력이 강력한 방어망을 구축해 마라타군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여기에 세포이(인도병) 부대도 합류하면서 마라타의 공세를 주춤해졌고, 곧 전세가 역전됐습니다. 이렇게 마라타의 1만명 주력은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에 있던 다른 마라타 병력들은 왠일인지 전투에 거의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영국군 입장에서 보면 마라타의 싸움 방식은 이해 불가였습니다. 한 영국 장교는 “만약 그 수 많은 (주변에 있던 마라타) 기병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더라면 (이 전투는)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웰링턴은 나중에 “나의 모든 친구들을 잃었으니 사실 나는 이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사예 전투는 대영제국과 인도의 운명을 좌우한 결정적인 장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후 3개월 동안 웰링턴은 마라타 군대의 패잔병을 쫓았고, 아르가움에서 또 한번 마라타 군대를 격퇴하고 가윌구르 요새를 점령하게 됩니다. 또 북쪽에서도 제럴드 레이크 장군이 지휘하는 또 다른 영국군이 마라타 군대를 상대로 비슷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결국, 1803년 말 마라타 동맹은 엄청난 영토를 동인도회사에 넘기고 그 관리를 영국인에게 맡기는 조약에 사인을 하게 됩니다.
이후, 동인도회사 지배에 불만을 품은 마라타 동맹이 영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제3차 영국-마라타 전쟁(1817~1818)에 나서지만 결국 패함에 따라 마라타 동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대영제국은 인도의 거의 대부분을 손에 넣게 됩니다.
◇ 영국軍의 비밀 병기
아사예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자기들이 갖고 있던 것(17문)보다 훨씬 많은 100여문의 대포를 획득했습니다.
웰링턴은 이 대포들을 보면서 “우리가 써도 좋을 만큼 훌륭한” 대포였다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마라타 정예병력은 한때 영국군에 복무했던 독일군 장교와 프랑스 출신 용병이 지휘를 맡았습니다.
이 정예병력은 유럽인들처럼 제복을 입었고, 최신 소총으로 무장을 했습니다.
또, 유럽인 지휘에 따라 현대식 훈련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참패를 당했습니다.
아사예 전투 결과 영국군은 428명이 전사하고 1138명이 부상, 18명이 행방불명됐습니다.
이에 반해 마라타군은 사망 1200명을 포함해 최소 6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합니다.
마라타는 왜 졌을까요.
대포도 많고, 영국군처럼 소총도 보유했고, 병력도 많았는데 말이죠.
우선, 대표적인 이유로는 내분을 들 수 있습니다.
1차 전쟁 때도, 2차 전쟁 때도 마라타 동맹은 권력을 둘러싸고 자기들끼리 싸웠습니다.
그리고 외세(동인도회사)를 끌어들였습니다. 힘은 분산되고 여론은 분열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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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측에는 인도인들로 구성된 병사들(세포이)도 많았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자기 나라를 빼앗기게 된 전투가 발생했는데,
그 전투에 자기들이 참전한 셈이지요.
아사예 전투에서도 영국측에 합류한 인도병이 전체(9500명)의 절반이 넘는 5000명에 달했습니다.
영국군이 소총을 더 많이 가졌다는 이점도 있었습니다.
마라타군 중에선 소총을 갖춘 경우도 있었지만,
여전히 활과 화살 등으로 무장한 군인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장교와 하사관 수도 영국군이 우세했습니다.
영국군에는 장교가 27명 있었는데, 마라타군에는 유럽 장교 2명과 포르투갈 포수 6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국군의 가장 큰 무기, 비밀병기는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영국군 자체였습니다.
영국군은 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하는 전술을 갖추고 있었고,
웰링턴을 중심으로 한 현대식 지휘체계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군인들은 마라타군보다 훨씬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맥스 부트는 ‘전쟁이 만든 신세계’에서
“아사예에서 영국 병사들은 무모할 정도로 싸웠던 반면,
마라타 정규군은 대포를 빼앗기자 힘없이 무너졌다”고 말했습니다. 마
라타 군인들은 ‘능숙한 개인들의 집단’으로 싸울 뿐이지,
중앙의 명령에 복종하는 ‘응집된 부대’로서 싸우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 볼까요.
그렇다면 영국군처럼 현대적인 군대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국군 같은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마라타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맥스 부트는 “유럽 스타일로 전투를 하려면 유럽인이 되어야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부대 구성과 무기, 훈련 만으로는 현대화된 군대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군대를 만들기 위해선 사회 전체를, 국민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와 일본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들,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등
후발국의 지도자들은 이런 진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서구에 견줄만한 군사력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단지 군대만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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