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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륙의 자유인들 <20회>최고 권력자가 사라진 후...숨막히는 권력투쟁의 시작

colorprom 2022. 2. 26. 13:58

최고 권력자가 사라진 후...숨막히는 권력투쟁의 시작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2.02.26 09: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20회>

 

<1976년 4월 4일 오전, 톈안먼 광장에 결집한 군중. 베이징 홍기(紅旗) 월극단(越劇團)의 배우 리톄화(李鐵華)가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李曉斌 https://news.sina.com.cn/c/p/2018-11-28/doc-ihmutuec4405159.shtml>

오늘날 이 세상에서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나? 인신공격, 인격살해, 거짓선동, 허위날조, 무속 논란, 댓글조작, 사이버 테러, 공약(空約) 남발, 공무원 노비삼기, ‘법카’ 돌려막기, 옆집 사는 기생충, 꼭꼭 숨은 ‘그분’, 줄 잇는 자살 행렬, 까발려진 녹취록, 고관대작 ‘50억 클럽’, 선거 직전 현금 쾌척, 암흑가 검은 돈, 지방정부 눈먼 돈, 부정부패, 탈법·위법, 권모술수, 공작정치! 분초 다퉈 폭로되는 막장 선거를 바라보면서 민주주의의 사망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타락한 민주주의가 일당독재의 전제주의보다 나을 수 있다면,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다수 언론의 혹독한 검증, 복수정당의 상호감시와 상호견제가 제도적으로 보장되기 때문은 아닐까.

‘권력자는 민주를 팔아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고 나선 민주를 부르짖는 민중을 탄압한다.’ 1977년 7월 1일 정계에 복귀한 덩샤오핑이 이후 1년 반에 걸쳐 화궈펑(華國鋒, 1921-2008)을 물리치고 중공중앙의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이 바로 그러했다. 1978년 12월 덩샤오핑은 민주화의 열망을 이용해 중앙권력을 장악하고 나선, 1979년 3월 활활 타오르는 민주화의 불길을 급히 밟아 껐다. 그 후로 40여년이 지났건만, 중국에선 여전히 민주화의 불씨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숨막히는 권력투쟁...4인방의 체포와 덩샤오핑의 복권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1978년 12월 말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 최고영도자로 추대되었다. 바로 그 2년 3-4개월의 시간동안 중국에서는 무혈의 소리 없는 권력 교체가 일어났다. 마오쩌둥 사상이 지배하는 “계급투쟁”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덩샤오핑 실용주의가 이끄는 “개혁개방”의 시대가 열렸다. 멀리서 보면 그 과정은 도도히 흘러가는 대하(大河)처럼 이미 결정된 역사의 대세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하루하루 숨 막히는 권력투쟁의 연속이었다.

1977-1978년 중공중앙에서 권력 교체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주역은 중공 부주석 예젠잉(葉劍英, 1897-1986)과 덩샤오핑이었다. 이에 맞서 완강하게 낡은 이념을 붙들고 저항했던 중심인물들은 중공 주석 화궈펑(華國鋒)과 중공 부주석 왕동싱(汪東興, 1916-2015)이었다. 처음엔 화궈펑을 지지하던 리센녠(李先念)은 나중엔 덩샤오핑의 편에 섰고, 그 결과 1983-1988년 국가주석을 역임할 수 있었다. 이상 다섯 명이 당시 중공중앙 정치국 상임위원이었는데, 당 서열로는 제1위 화궈펑, 제2위 예젠잉, 제3위 덩샤오핑, 제4위 리센녠, 제5위 왕동싱 순이었다.

<“가장 견결하게 화궈펑 주석을 영수로 하는 당중앙의 주위에서 단결하자!” 1977년 추정, 마오쩌둥과 화궈펑 초상화가 담긴 중공중앙의 선전 포스터. 그림/ Bai Conglu (1941- ), 공공부문>

화궈펑은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타계했을 때 마오쩌둥이 국무원 총리로 발탁해서 후계자로 지명한 인물이었다. 왕동싱은 1960년대 초부터 중공중앙 판공청 경위국의 국장으로 지근거리에서 마오쩌둥의 경호를 맡았다. 죽기 전 마오쩌둥은 화궈펑에게 “그대가 일을 맡으니 안심이 된다!”는 유언을 남겼고, 군부의 실권자인 혁명원로 예진잉에게 화궈펑의 신변 보호를 부탁했다.

화궈펑과 왕동싱은 예젠잉과의 긴밀한 협의 아래 1976년 10월 6일 전격적으로 4인방을 체포했다. 마오쩌둥이 지명한 후계자가 마오쩌둥이 타계하자 한 달이 못 돼 마오쩌둥의 부인을 포함한 4인방이 순식간에 일망타진되었다. 마오쩌둥이 과연 암암리에 그가 죽거든 4인방을 제거하라는 유언이라도 남겼을까?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화궈펑의 “4인방 분쇄(粉碎)”는 어렵잖게 설명된다. 첫째, 당내 기반이 허약했던 화궈펑으로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왔던 4인방을 그대로 두고선 중공중앙의 실권을 장악할 수 없었다. 둘째, 대중적 지지가 미약했던 화궈펑은 요동치는 민심을 잡기 위해선 “문혁 10년의 대동란”을 단죄하는 강력한 조치가 필요했다.

불과 반년 전 4월 4-6일 청명절(淸明節)을 맞아 톈안먼 광장에 몰려든 “2백만” 군중은 저우언라의 총리의 서거를 애도하며 4인방을 비판하는 강렬한 시위를 연출했다. 4인방은 광장의 성난 군중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를 걸어 덩샤오핑을 축출했다. 광장의 군중은 “반공, 반(反)인민, 반(反)사회주의의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혔고, 덩샤오핑은 “그러한 반혁명분자들의 총(總)대표”로 몰렸었다. 중공의 기관지들은 일제히 덩샤오핑이 자신에게 내려진 “우경분자”의 판결을 뒤집기 위해 군중을 반혁명 시위에 동원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매스컴의 선전선동은 모두 4인방의 지휘 아래서 이뤄졌다. 따라서 4인방의 체포는 곧 덩샤오핑의 복권을 의미했다. 톈안먼 광장의 군중도 반혁명분자의 오명을 씻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4인방의 몰락”은 “문혁 10년의 대동란”에서 수백 만 명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피해를 보상하는 대규모 평반(平反, 복권)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76년 4월 5일 경,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4인방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하는 군중. 뒤에 보이는 건물은 톈안먼 광장의 인민대회당이다. 사진/ 공공부문>

마오쩌둥이 발탁한 화궈펑 “마오쩌둥이 무조건 옳다”

산시(山西)성 쟈오청(交城) 출신의 화궈펑은 1948년 중 국공내전 중 후난성에 배치되었다. 이후 마오쩌둥의 고향 마을이 있는 상탄(湘潭) 현(縣)위원회 서기로 근무하다가 문혁 시기 후난성의 당서기로 진급했다. 1973년 국무원 부총리겸 공안부 장관에 올랐다. 저우언라이가 서거한 후, 마오쩌둥은 화궈펑을 국무원 총리로 앉히고 중공중앙 제1 부주석의 직함까지 달아줬다. 화궈펑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중책이었지만, 절대권위자 마오쩌둥이 살아 있는 한 그의 지위는 보장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이 죽고 나자 화궈펑은 스스로 중공중앙 주석이자 국가원수가 되어 “마오쩌둥”의 역할을 떠맡아야 했는데, 그에게는 실상 카리스마도, 행정능력도, 미래 비전도 없었다.

화궈펑의 생존 방법은 마오쩌둥의 절대권위를 선양하는 길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이 무조건 옳다는 북한식 “수령 무오류의 원칙”이 성립되어야만 화궈펑을 후계자로 발탁한 마오쩌둥의 선택도 정당하다는 형식 논리가 성립된다. 지난 주 이미 언급했듯, 1977년 2월 7일 중앙 기관지에는 “마오 주석의 모든 결정과 정책을 굳게 지켜야 한다! 마오 주석의 모든 지시를 견결히 준수해야 한다!”는 화궈펑의 구호 “양개범시(兩個凡是, 두 가지 모두 다)”가 대서특필되었다. 결국 화궈펑은 마오의 명령에 따라 마오가 떠난 중국에서 마오의 역할을 대신해서 마오의 혁명을 이어가는 마오의 “카게무샤(影武者)”일 뿐이었다. “마오쩌둥 사상”은 화궈펑의 예리한 창이자 견고한 방패였다.

덩샤오핑, 마오쩌둥의 ‘실사구시’ 인용해 화궈펑 공격

1978년 2월 신문에서 화궈펑의 “양개범시”를 읽은 덩샤오핑은 격분했다. 상식적으로 마오쩌둥의 모든 지시, 모든 정책이 다 옳다면, 결국 4인방은 무죄라는 얘기가 된다. 문혁 시절 “천하대란(天下大亂)”의 모든 책임을 4인방에 뒤집어씌운다면, 마오쩌둥이 4인방의 꼭두각시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무엇보다 마오쩌둥의 지시와 정책을 묵수하면, 중국은 영원히 빈곤의 트랩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덩샤오핑의 정계 복귀를 추진한 예젠잉과 덩샤오핑. 1977년 추정. 사진/ 공공부문>

덩샤오핑은 그러나 섣불리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정치적 스턴트는 벌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화궈펑 명의로 서신을 써서 마오쩌둥의 사상의 본령이 “실사구시(實事求是)”임을 넌지시 가르치는 방편을 구사했다. “현실에서 진리를 찾는다!”는 이 명제의 전거는 고대(古代)까지 소급되지만, 가까이는 17세기 경세치용(經世致用) 학파의 구호였다. 1940년대 토착 공산주의자 마오쩌둥은 모스크바 유학파를 위시한 당내의 여러 분파와의 사상투쟁에서 “실사구시”를 외치며 싸웠다. 덩샤오핑은 1940년대 마오쩌둥의 어록에서 다시 “실사구시”를 불러냈다. 그리하여 “구시(求是)”파와 “범시(凡是)”파의 투쟁이 개시되었다.

덩샤오핑의 반격을 감지한 후 군부에서도 화궈펑에 대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가령 덩샤오핑과 절친한 광둥(廣東) 군구 사령관 쉬스요우(許世友, 1906-1985)는 화궈펑에 직접 서신을 발송해서 마오쩌둥이 문혁기간 저지른 오류를 인정하고, 류샤오치, 펑더화이, 린뱌오, 덩샤오핑을 복권시키라고 압박했다. 좌파 경제통 천윈(陳雲, 1905-1995)도 나서서 덩샤오핑의 복권을 요구했다. 결국 화궈펑은 1977년 3월 덩샤오핑의 정계 복귀를 준비하는 절차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1978년 5월 11일 <<광명일보>>, 5월 12일 <<인민일보>>에 7천 자 논문 “실천이 진리검증의 유일한 기준이다”가 게재되었다. 난징대학 철학과 후푸밍(胡福明, 1935- ) 교수가 초고를 쓰고 그 당시 중앙당교 총장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의 지시 아래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수정된 이 논문은 1978년 중국에서 “진리표준 대토론”을 촉발시킨 사상전의 무기였다. 그 무기는 일차적으로 화궈펑의 이념적 독단을 파괴하기 위해 정교하게 제조된 폭탄이었다. 나아가 공산주의 선전선동에 세뇌당한 다수 군중의 꽉 막힌 생각의 회로를 뻥 뚫는 “의식 해방”의 다이너마이트였다. 이 논문의 서두에는 마르크스의 다음 문장이 인용된다.

“인간 사유가 객관적 진리성을 갖느냐는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인간은 실천을 통해서 자기 사유의 진리성을 증명하여야만 한다.” (<<마르크스·엥겔스 선집>> 제1권 16쪽).

이어서 마오쩌둥의 다음 발언이 인용된다.

“진리는 오직 하나이다. 결국 누가 진리를 발견하느냐는 주관적 과장이 아니라 객관적 실천에 달려 있다. 많은 인민의 혁명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척도이다.”<신민주주의론>

실천이 진리의 유일한 검증 기준이라면, 교조주의적 독단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덩샤오핑은 화궈펑의 “양개범시”야 말로 마오쩌둥 사상을 오독하고 왜곡하는 조악한 우상 숭배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했다. 진정 중국에는 “정신적 굴레를 깨부수는 새로운 의식 혁명”이 요구되고 있었다.

1977년 7월 17일 중공중앙 정치국 상임위원으로 복귀한 덩샤오핑은 나흘 후 중국의 현대화 전략에 관한 강렬한 연설을 했다. 덩샤오핑은 청중의 환호를 받으며 단상에 올라 준비한 원고는 그대로 놔둔 채로 정면을 응시하고 생기발랄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연설했다. 그는 독단주의와의 투쟁을 선언하면서 마오쩌둥의 교시에 대한 창의적인 해석을 강조했다. 그는 “실사구시”를 다시금 강조하며, 독단과 허위를 깨는 공개 비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연설하는 덩샤오핑의 모습. 1977년 추정. 사진/ 공공부문>

문혁의 오류에 대한 목소리 봇물처럼 터져...마오쩌둥 비판까지

마오쩌둥이 “백화제방(百花齊放)”을 외치며 지식인들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공산당의 오류와 실수를 마음껏 비판하라고 고무한 지 거의 20년 만이었다. 덩샤오핑은 근대화 정책을 추구하면서 과학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지식인 및 전문가 집단을 우대했다.

덩샤오핑이 “의식 혁명”의 길을 트자 중국의 인민들은 입을 열고 4인방과 문혁의 오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터진 봇물처럼 개방된 언로(言路)를 통해 군중들은 목청 높여 억눌렸던 울분을 쏟아냈다. 언론에는 날마다 비판적 시론과 풍자 삽화가 게재되고, 도시 곳곳에서 성난 군중의 자발적인 비판 대회가 개최되었다. <<인민일보>> 등 중앙 기자들은 흥분된 논조로 격앙된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위대한 승리!” “희열로 들뜬 베이징!” “전 중국이 흥분하다!” 등등.

4인방에 대한 인민의 분노는 결국 마오쩌둥 비판으로 표출되었다. 군중의 민주화 요구는 마오의 “카게무샤” 화궈펑의 권력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었다. 덩샤오핑과 예젠잉은 그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덩샤오핑의 요구에 따라 1977년 조직부 장관으로 임명된 후야오방은 문혁 피해자 수천 만 명에 대한 전면적 조사를 진행시켰다. 문혁의 참상이 공개될수록, 마오쩌둥의 오류는 백일하에 드러났고, 화궈펑의 입지는 좁아졌다.

군중의 민주화 요구 칭송하던 덩샤오핑, 민주 투사들 잡아넣기 시작

1978년 11월부터 시작된 베이징 시단(西單)의 민주장(民主墻) 운동은 덩샤오핑이 부르짖은 “실사구시”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가령 1978년 11월 27일 일본의 민사당 위원장 사사키 료사쿠(佐々木 良作, 1919-2000)를 접견한 덩샤오핑은 대자보를 붙이는 군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했다.

“이는 매우 정상적인 현상이다. 우리나라의 상황이 안정됐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헌법은 대자보 붙이기를 허용한다. 우리는 군중이 민주를 발양하는 것을 부정하거나 비판할 권리가 없다. 대자보로 말하자면, 군중이 맺힌 기운이 있으면 그 기운을 풀어야 한다. 군중의 주장이 모두 심사숙고의 결과는 아니라 해도 완전한 정확성을 요구할 수는 없다. 두려워 할 바 아니다. 문화대혁명으로 단련이 된지라 우리나라 절대 다수의 인민 군중은 시비를 감별할 능력이 있으며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겠다는 각오 또한 대단하다.” (<<인민일보>> 1978.11.28.)

<1978년 11월 베이징 시단(西單)의 민주장(民主墻) 운동. https://alchetron.com/Democracy-Wall>

날마다 민주를 외치며 대자보를 써서 붙이던 대중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득의양양했다. 시단 민주장이 빈틈없이 들어차자 사람들은 톈안문 광장으로 몰려가서 “인민영웅기념탑”에까지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다.

다음 달인 1978년 12월 말 덩샤오핑은 최고영도자로 추대되었고, 한 달 후 그는 미국으로 날아가 카터 미대통령과 접견했다. 그때 미국에서 덩샤오핑은 민주를 옹호하는 개방적 지도자라고 칭송받았다. 바로 다음 달 (1979.3) 베트남 침공을 감행한 후, 덩샤오핑은 민주장의 투사들을 잡아넣기 시작했다. 대체 민주장의 대자보엔 어떤 내용이 있었기에 덩샤오핑은 표변해야만 했을까? 음모(陰謀)였을까? 양모(陽謨, 공공연한 모략)였을까? 광장의 군중들은 모르고 속았을까? 알면서 또 당했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