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은 1㎝ 차이… 부모님 덕에 제가 살았죠”
데뷔작으로 美 ‘에드거 상’ 재미교포 앤지 김 인터뷰
1980년, 모국어가 영글어 가던 열한 살 한국 소녀가 하루아침에 이국 땅의 구불구불한 글자들에 포위됐다. 유일한 안식처는 한국에서 가져간 소설 여섯 권. 에드거 앨런 포 등이 쓴 추리 소설 한글판이 소녀를 위로했다. 마침 그곳은 포가 살던 미국 볼티모어. 40년 뒤 소녀는 첫 소설로 포의 이름을 딴 ‘에드거 상’ 신인상, ITW(국제스릴러작가협회) 신인상 등 각종 상을 휩쓴다. 소설 ‘미라클 크리크’로 미 추리 문학계를 사로잡은 재미교포 작가 앤지 김(한국명 김수연·53). 최근 한국어판을 낸 그를 이메일과 메신저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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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가 초등학생 수준이라 이해는 못했지만 한국어판을 펼쳐 보는데 눈물이 후두두 떨어졌어요. 사십 여년의 세월을 지나 집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달까요.” 질문보다 수십 배 긴 답으로 작가는 모국의 기자에게 진심을 보였다. 소설은 한국인 이민자 가족이 운영하는 고압 산소 치료 시설에서 일어난 방화 사건의 범인을 찾는 이야기. 제목 미라클 크리크(Miracle Creek)는 ‘기적의 계곡’이라는 뜻을 지닌 가상의 동네 이름이다. 이곳을 배경으로 이민으로 부서진 가족,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 대체 의학을 찾은 장애아 가정의 상처가 뒤엉켜 드러난다.
등장인물 유씨 부부와 10대 딸 메리에겐 작가의 경험이 녹아 있다. 이민 초기 부모는 볼티모어 우범 지역에서 식료품점을 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식료품점에 설치된 방탄 유리막 밖으로 잠깐 나와 있는 사이 강도가 들이닥쳤다. 강도가 쏜 총알이 아버지 목을 스쳤다. “상처가 났지만 정말 1㎝ 차이로 목숨을 건지셨어요. 그때 깨달았죠. 삶과 죽음이 1㎝ 차이로 엇갈릴 수 있다는 것, 부모님이 목숨 걸고 날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미슐랭 레스토랑을 즐기는 푸디(foodie·미식가)지만 밥·김치·된장찌개(음식은 한글로 표기했다)를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토종 한국 입맛. 연기자를 꿈꾸며 몰래 부모 서명을 위조해 예술고에 지원한 적도 있다. 하지만 아시아계는 연기자가 되기 어렵다는 선생님의 말에 꿈을 접고, “법정 변호가 연기와 비슷해 보여” 변호사가 됐다. 명문 하버드 로스쿨 출신. 오바마 대통령도 거쳤던 법률 학술지 ‘하버드 로 리뷰’ 에디터로도 활동했다.
이후 매킨지 컨설턴트, 사업가로 활동했지만 전업주부를 택했다. “지금은 건강하지만 아들 셋이 각기 다른 병을 앓고 있어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에 다녀야 했어요. 거친 직업 중 제일 힘들었답니다.” 어느 날 동네 마켓에서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엉엉 울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가온 친구에게 안겨 모든 일을 털어놓고 나니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그날 밤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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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장애아 엄마, 변호사 경험은 작가로서 탄탄한 밑천이 됐다. 소설에 등장하는 고압 산소 치료는 셀리악병을 앓아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구토가 심했던 아이를 위해 썼던 치료법. ‘잠수함’이라 불리는 고압 장치에 세 가족씩 들어가 순산소를 마셨다. 소설을 쓰겠다고 맘 먹었을 때, 꽉 닫힌 그 공간에서 장애아 부모들이 나눴던 동병상련이 바로 떠올랐다. 소설가가 되어서야 변호인의 환상을 실현하고 있다며 웃는다. “증인이 내가 원하는 말만 하게 법정 장면을 쓸 수 있으니까. 하하!”
그는 “단서와 ‘붉은 청어(red herring·관심을 딴 데로 돌려 헷갈리게 하는 것)’를 섞어 독자들에게 지적 만족감을 주려 했는데, 정작 독자들을 만나 보니 감동 포인트는 따로 있었다”고 했다. “누구나 삶의 어느 지점에선 아웃사이더일 때가 있더군요. 그래서 소설에 등장한 사회적 약자 이야기에서 위안을 느꼈다고 해요.”
가제본을 받아본 어머니는 한참 뒤 미안하다면서 울먹였다. “저는 소설일 뿐이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우리 가족 얘기를 읽으신 거죠.” 앤지 김은 “자식의 현재를 위해 당신의 과거를 희생한 부모님께 이 책을 바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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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일문일답 요약
-자전적 소설이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첫 소설이기에 내 경험을 최대한 녹였다. 내 삶의 토대는 한국인 이민자로서 보낸 어린 시절이다. 열한 살 때 부모님과 함께 서울에서 볼티모어로 이민 왔다. 부모님은 볼티모어 다운타운의 우범 지역에서 식료품을 운영했다. 거기서 숙식을 하셨는데 너무 위험한 곳이라 나는 먼저 이민 와 있던 이모 집에서 살았다. 한국에선 부모님과 무척 친했는데 미국에선 두 분의 부재를 견뎌야 했다. 부모님 가게엔 방탄 유리막이 설치돼 있었다. 아버지가 그 가림막에서 잠시 나와 있는 사이 강도가 쏜 총에 맞아 목에 상처를 입은 적도 있었다. 딱 1cm 차이로 목숨을 건지셨다. 그때 깨달았다. 삶과 죽음이 1cm 차이란 걸, 부모님이 목숨 걸고 저를 위해 희생한다는 걸.”
-1980년대 한국을 생각하면 문화 충격이 상당히 컸을 듯한데.
“한국에서 우리 집은 진짜 가난했다. 집 밖에 변소가 있고 펌프로 물을 길어 썼다. 욕실이 없어 엄마와 일주일에 한 번 대중목욕탕에 갔다. 공기놀이용 돌을 찾고, 수업이 끝나면 책상 위에 의자를 올려놓고 반 아이들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왁스 칠 하며 교실 청소하던 기억도 난다. 참, 달고나 먹던 기억도! 우린 땐 ‘오징어 게임’처럼 바늘로 하진 않았지만(웃음). 객관적으론 컬러 TV에 냉장고까지 있는 미국 이모 집이 훨씬 좋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가난했지만 부모님과 함께하던 한국에서 더 행복했다. 이 경험 때문에 학부(스탠퍼드대)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행복의 상대성’에 매료된 것 같다.”
-이민 갈 때 한국 소설 여섯 권을 가지고 갔다고?
“에드거 앨런 포, 애거서 크리스티 같은 거장들이 쓴 고전 미스터리 6권이었다. 열 살 생일 때 부모님이 선물해주신 책이었다. 한국에선 친구도 많고 똑똑한 아이였는데 미국 와선 영어도 못하고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 중학생이 됐다. 이해할 수 없는 구불구불한 글자만 쓰여 있는 이국 땅에서, 이 책들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같은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장면과 장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상상했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사랑이 그때 시작된 듯하다. 지금도 그때 가져온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 책을 곁에 두고 있다. 포는 내게 정말 특별한 작가다. 그의 작품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볼티모어에 살았다는 공통점도 있다. 뭣보다 그의 이름을 딴 상을 받았으니!”
-스탠퍼드대,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온 소위 ‘엄친딸(엄마 친구 딸)’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도 거쳤던 유명 간행물 ‘하버드 로 리뷰’ 에디터 출신이기도 하던데.
“오바마 전 대통령 바로 다음 기수로 ‘하버드 로 리뷰’ 에디터를 했다. 남편은 오바마 전 대통령과 하버드대 로스쿨 동기다. 학창 시절 그와 농구 시합을 했다가 대패한 이야기를 종종 한다(웃음). 어린 시절 나는 부모님께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반항이 심했다. 부모님 서명을 위조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예술 고등학교에 몰래 지원하기도 했다. 이민 와서 ‘바보’ 취급 받으며 느꼈던 불안감에서 출세욕이 생겼다. 나를 심하게 괴롭힌 친구들에게 뭔가 보여주겠다면서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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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변호사, 맥킨지 컨설턴트 등 화려한 경력을 뒤로하고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궁금하다.
“10대 때는 연기자, 특히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연기 선생님이 아시아계 미국인이 연기자가 되는 건 사실상 힘들다고 얘기했다. 대신 법정에서 변호하는 행위가 연기와 비슷해 보여 변호사가 되기로 맘먹었다. 이후 맥킨지 경영 컨설턴트와 사업가를 거쳐 전업주부를 선택했다. 지금껏 한 직업 중 제일 어려운 게 주부였다. 지금은 건강한 세 아들이 어릴 땐 각기 다른 병을 앓아 계속 병원에 다녀야 했다. 삶이 너무 벅찼다. 어느 날 동네 홀푸드 마켓 통로에서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엉엉 울었다. 그때 한 친구가 날 보고 다가와 안아줬다. 그 친구에게 겪은 일들을 다 털어놓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날 밤부터 글을 쓰며 감정을 쏟아냈다.”
-첫 작품으로 법정 드라마를 선택한 이유는.
“변호사로 일하면서 법정이라는 공간이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고조시키는지 직접 목격했다.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법정의 요구를 접하면 확신에 찬 증인마저 동요하게 된다. 자기 기억이 진짜 맞는지 의심하게 되고, 별것 아니라고 생략한 내용과 의도적인 거짓말 사이의 구분이 희미해질 때도 있다. 법정은 서스펜스와 긴장을 최대화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다. 게다가 증인이 원하는 말만 하게 쓸 수 있으니 얼마나 재미있는지. 소설가가 되어서 변호인의 환상이 실현됐다. 하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고압산소 치료를 직접 경험했다고?
“아들 하나가 셀리악병과 궤양성 대장염을 심각하게 앓았다. 구토가 심해 살이 빠져 갈비뼈가 보일 정도였다. 일반 치료로는 안 돼 고압 체임버에서 순산소를 들이마시는 치료를 시도했다. 아들이 처음에 그 장치를 보고 ‘잠수함이다!’라고 외치더라. 한 번에 세 가족씩 들어갔는데, 그 공간에서 부모들은 아이가 앓는 여러 질병에 대한 정보를 교환했다. 소설을 쓰겠다고 맘먹었을 때 그 어둡고 꽉 닫힌 공간에서 나눈 솔직한 고백을 바로 떠올렸다.”
-이민자, 아픈 아이를 기르는 ‘엄마’ 등 사회적 약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가 있는가.
“이 책은 부모가 하는 희생의 극치, 사회에서 아웃사이더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탐구하는 책이다. 나는 딸을 위해 삶을 희생한 한국인 이민자 부부와 고압 산소 치료 시설에서 치료받는 환자 부모를 나란히 놓았다. 장애와 질병을 앓는 자식들을 기르는 부모도 똑같이 자기 삶을 희생하고 있으니.”
-데뷔작으로 에드거 상을 받은 비결이 뭘까.
“미스터리물을 읽을 때 독자로서 작가가 여기저기 써놓은 단서와 ‘붉은 청어(red herring·관심을 딴 데로 돌려 헷갈리게 하는 것)’를 꿰맞추며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면서 지적인 만족감을 얻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책에 서스펜스적 요소를 넣었다. 그런데 북클럽 등으로 독자와 만나 보니 아픈 가족이 있거나 다른 문화권에서 온 이들이 소설 속에 등장한 다양한 상처받은 주인공들의 모습에 공감과 위안을 느꼈다고 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어떤 시점, 어떤 맥락에서는 아웃사이더임을 느끼더라.”
-부모님 반응이 궁금하다.
“가제본을 드렸을 때 아버지는 한 주 만에 두 번 읽으셨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 아무 말씀 없으셔서 재미가 없나 보다 했는데, 어느 날 울먹이며 내게 (혼란을 겪게 해) 미안하다고 하시더라. 나는 이건 소설일 뿐이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소설 속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읽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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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군데군데 한국적 디테일이 숨어 있다. 특히 음식으로 한국 정서를 표현하는 부분이 많던데.
“요리는 젬병이다. 농반진반 물도 태울 거라고 말한다(웃음). 하지만 재료 태울 일이 없는 김밥과 유부밥을 ‘만드는’(말 그대로 그냥 한데 모은다는 의미다) 건 좋아한다. 미슐랭 스타를 받은 프렌치 레스토랑이나 스시 오마카세 바에 가는 걸 좋아하는 ‘푸디(foodie·미식가)’지만 불고기에 밥과 김치, 된장찌개, 자장면을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음식은 정확히 한글로 표기했다).”
-’파친코’ 이민진 작가, 영화 ‘미나리’ 정이삭 감독 등 최근 미국 문화계에서 재미교포 예술가의 활약이 눈에 띈다.
“여전히 한국인이 성공에만 집착한다거나, 로봇 같은 기억력으로 수학만 잘하는 괴짜, 일은 열심히 하지만 딱히 창의적이지 않다는 식의 스테레오타입이 있다. 그들의 성취가 백인 중심 미국 주류 사회의 선입견을 깨고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낀다.”
-이 시대, 문학의 역할은 무엇일까.
“완전히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타인의 관점으로 보고 느끼게 하는 것, 그래서 설령 인정하기 부끄러운 것일지라도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목소리 내지 못하던 존재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
-앞으로 계획은.
“‘행복 지수’라는 제목의 소설을 준비 중이다. 엔젤만 증후군을 앓아 말을 못하는, 백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십 대 소년 이야기다. 전작처럼 미스터리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뼈대지만, 진수는 가족 드라마다. 내 우상인 한강 작가 책을 펴낸 미국 호가스 출판사에서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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