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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민주주의 연구하는 세계적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

colorprom 2022. 2. 7. 08:51

“달콤한 거짓이 아닌 불편한 사실이 민주주의 지켜…

선거땐 소셜미디어 끊어라”

 

[김신영이 만난 사람]


가짜 민주주의 연구하는 세계적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

입력 2022.02.07 03:00
 
 
 
 
민주주의와 폭정의 관계를 연구해온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소셜미디어를 통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려 하는 정치적 맹신이 강화했다. 민주주의를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프로이에마흐트

‘달콤한 꿈은 거대한 거짓 안에서 자란다.’ 폭정과 독재의 형성 과정 연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티머시 스나이더(Snyder·53)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는 지난 1월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문구를 적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며 미 의회에 난입한 지 1년이 지난 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거짓에 대한 글을 썼다. 스나이더가 말한 ‘거대한 거짓’이란 사실과 동떨어져 사회를 둘로 쪼개는 정치적 맹신을 가리킨다.

스나이더 교수는 최근 전화 인터뷰에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란 원래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통령 선거를 앞둔 한국의 유권자에게도 당부하고 싶다고 했다. “오로지 사실만이 시민의 아군(我軍)입니다. 사실의 힘을 통해서만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시민을 분열시키는 거짓을 경계하라”

-1년 전 폭도들의 미 의회 점거는 충격적이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보나.

“미국인 상당수, 아마도 수백만명이 그 사건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짓일지언정 선거가 조작됐다고 믿고 싶어한다. 전형적인 ‘거대한 거짓’이지만 결과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귀엔 달콤하게만 들린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사실이라 믿고, 자신이 속한 집단이 주류였으면 하고 바란다. 쉽게 거짓의 먹잇감이 되는 이유다.”

-일반적인 거짓과 ‘거대한 거짓’은 어떻게 다른가.

“정치인은 능숙하게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한다. 나는 정치인이 ‘우리의 세상’과 ‘저들의 세상’을 가르고, 현실에 불만을 가진 집단을 허구에 근거한 대안적 세계로 끌어들일 때 이를 거대한 거짓이라 부른다. 트럼프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사실은 내가 이겼다’라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준 것처럼 말이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패배는 민주주의에서 종종 일어난다.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평화로운 승계가 일어나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완성된다. 하지만 거짓에 넘어간 유권자들은 선거 결과는 사기라고 믿고, 그렇기 때문에 복수 차원으로 의회 불법 난입 같은 일을 저질러도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예전보다 ‘거대한 거짓’에 더 취약해졌나.

“최근 들어 미국의 유권자는 더욱 극단적으로 양분돼 있고 민주주의의 기반이어야 하는 사실이 아니라 감정에 이끌려 투표하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런 경향이 커졌다고 보나.

“원인 가운데 하나는 분명히 소셜미디어다. 소셜미디어는 인간의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단추’를 찾아내 그 자극을 반복해서 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용자가 어떤 일에 분노하는지를 파고들어 사람을 휘두른다. 사실보다는 감정에 몰두하게 만들고, 이런 경향이 투표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지난해 1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미 의회에 난입하는 모습. 스나이더 교수는 “유권자가 거짓에 넘어간다면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선거철엔 소셜미디어 끊어라”

스나이더는 지금까지 낸 책에서 사실의 힘을 강조했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사실(fact)이란 단어를 반복적으로 썼다. 저서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에선 사실이 결여된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로 변질될 위험을 경고했다. 그는 “참된 사실과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할 때 권위주의가 시작된다. 사실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마음먹은 냉소주의자는 폭군을 환영하게 된다”고 적었다. 사실을 무시하고, 감정대로 투표하는 유권자가 폭군에게 길을 열어준다는 뜻이다.

-한국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유권자에게 무엇을 당부하고 싶은가.

“나는 한국의 정치 지형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모든 선거에 적용될 수 있는 공통의 조언이 있는데 몇 주 동안 ‘소셜미디어 휴식기(vacation)’를 가져보라는 것이다. 선거철이라면 몇 주 동안 페이스북을 끊고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당신의 결정에 근거가 될 사실이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수집하기를 권한다.”

민주주의와 폭정의 관계를 연구해온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소셜미디어를 통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려 하는 정치적 맹신이 강화됐다. 민주주의를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모글스 엥겔룬드

-사실이 그렇게까지 중요한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정말로, 정말로 중요하다. 사실이야말로 시민의 유일한 친구다. 시민이 사실이라는 무기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거대한 권력이나 재력으로부터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까. 만약 시민이 사실을 확인하려는 노력을 포기한다면 그는 추측의 세계에 투신하겠다고 마음먹는 셈이 된다. 민주주의를 포기하겠다는 결심과 다름없다.”

국내에 출간된 스나이더의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는 원제가 ‘비자유의 길’(The Road to Unfreedom)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1944년 출간한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에서 따왔다. 스나이더의 책은 러시아와 트럼프를, 하이에크는 파시즘과 나치를 주로 다뤘지만 말하려는 맥락은 같다. 전체주의와 독재는 ‘우리’와 ‘그들’을 가르고 적대심과 분노를 유발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악용함으로써 자라난다는 것이다. 이런 통치자들은 정책 입안자가 아닌 분노 유발자에 가깝다고 스나이더는 썼다.

 

◇“민주주의 유지는 매우 어렵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 상당히 어렵게 들린다.

“사람들은 인간 사회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리라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전혀 아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것은 항상 매우 어려웠다. 직선제를 한다고 민주주의가 자동으로 성립되지도 않는다.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한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자는 시민, 그중에서도 민주주의를 소중히 여기고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사실을 알아내고 목소리를 내는 시민들이다.”

-2년 넘게 이어진 코로나 때문인지 ‘공동체의 미래’라는 개념이 막연하게 느껴진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요즘 들어 좋은 미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드물어졌다. 코로나 탓에 미래에 거대한 위기가 닥치면 우리가 대응할 수 있을지, 회의주의가 팽배해진 듯도 하다. 점점 심화되는 부의 불평등도 미래에 대한 건강한 논의가 사라진 원인 중 하나라고 본다. 갑부들이 목소리 높여 외치는 미래의 주제를 보라. ‘우주로 가자!’ ‘영원히 살자!’ 이런 식 아닌가. 공동체를 위한 미래의 논의가 아니라 오로지 그들 자신을 위한 미래를 고민하는 목소리만 크게 들린다.”

◇“달콤한 거짓보다는 불편한 진실을”

지난해 나온 스나이더의 저서는 ‘치료받을 권리’(원제 Our Malady·우리의 질병)다. 2019년 말 맹장염에 이은 간염으로 3개월 동안 병원 다섯 개에 입원·퇴원을 반복하며 목격한 미국 의료 시스템의 붕괴를 적었다. 이런 실상은 결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미국의 코로나 방역 실패로 이어졌다고 그는 평가했다.

-그래도 미국 기업이 백신을 만들지 않았나.

“제약사는 백신을 개발했지만, 공동체를 위해 백신을 맞는 일이 유익하다고 설득하는 일을 정부는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미국의 코로나 백신 접종률은 64%로 주요 국가 중 낮은 편이다.) 코로나 방역의 실패는 사실의 실패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검사조차 제대로 시행하려 하지 않았다. 필수 의료 장비가 부족하다고 보고한 공무원은 해고했다. 그렇게 폭정이 작동했다. 여러 거짓이 판쳤지만 현장에서 습득한 사실로서 거짓에 맞설 지역 신문과 기자가 줄어 있었다는 현실이 문제를 키웠다.”

미국 미네소타주 로리의 지역 신문 '스위프트카운티 모니터 뉴스' 리드 안핀슨 발행인이 신문을 들어 보이고 있다. 티머시 스나이더 교수는 본지 인터뷰에서 "최근 지역 신문과 현장의 실상을 전할 기자들이 줄어들고 있어 미국의 코로나 위험을 키웠다"라고 말했다. /AP 연합뉴스

-지역 신문을 대체할 다른 수단은 없나? 예컨대 소셜미디어가 대안이 되지는 못했나.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는 어떤 의미에선 지역 신문의 자리를 꿰찼다. 소셜미디어가 지역 언론을 소멸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소셜미디어는 지역 신문의 역할, 즉 사람들의 삶과 직결되는 사실들을 제대로 수집하지 못한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실상, 그 지역의 정치인들이 벌이는 일, 마시는 물의 질(質) 같은 사실을 취재해 기사로 만들어낼 수 없다. 취재는 오로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실재하는 인간만이 적확한 시간에 바른 장소에 찾아가서 사실을 목격해 기록하고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현장 보도가 줄어든 탓에 “많은 미국인은 코로나를 추상적인 이야기로 느꼈다”고 책에 썼다. “미국인에겐 자기 지역의 정보가 거의 혹은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병원이 이미 예상치 못한 호흡기 질환과 씨름하고 있음을, 요양원에 시체가 쌓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소셜미디어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당신을 기분 좋게 해주는 추상적인 이야기를 경계하라. 사실과 무관하게 ‘우리 편이 무조건 이겼어’라고 주장하는 말에 휘둘리지 말라. 아무리 불편하게 들리더라도 민주주의, 그리고 시민을 지켜줄 것은 사실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한다.”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교수로 미국과 유럽, 홀로코스트 등을 주로 연구해온 역사학자다. 두 차례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전체주의 출현 과정 등을 다룬 ‘피의 땅’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 등의 책을 썼다. 20세기 역사를 토대로, 전체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시민 지침 20개를 담은 ‘폭정: 20세기의 스무 가지 교훈’(2017년)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