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6개월간 머리 못 깎았죠, 수술 환자한테 미안해서”
‘슬의생’에 영감 준 의사, 정의석 흉부외과 교수
입력 2021.10.16 03:00
정의석 교수가 진료실에서 삼각김밥과 바나나맛 우유를 들고 카메라를 바라봤다.
정 교수는 “집사람이 ‘삼각김밥 먹는 사진은 절대 찍지 말라’고 했는데…”라며 활짝 웃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천재 의사가 퍼포먼스 하듯 화려한 의료기술을 자랑하는 수술 신,
병원 내 파벌 간 권력 다툼, 거대한 외부 세력과의 투쟁, 의료 사고를 가장한 살인….
이런 뻔하고 자극적인 설정 없이도 성공한 의학 드라마가
지난달 종영한 ‘슬기로운 의사생활(슬의생) 시즌 2′다.
시청자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 속 의사들’이라 애써 부정하지만,
환자의 몸은 물론 마음까지 어루만지고 치유하려 애쓰는 의사들에게 감동하고 열광했다.
슬의생이 성공하면서 새삼 소환된 책이 있다.
지난 2015년 출간됐다가 절판된 에세이 ‘심장이 뛴다는 말’이다.
눈 밝은 시청자들이 ‘슬의생’ 시즌1 방영 당시 엔딩 크레디트에서 책 제목을 포착했고,
드라마 속 여러 에피소드가 이 책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지며 화제가 됐다.
저자인 흉부외과 전문의 정의석(50) 교수가 최근
‘병원의 밥: 미음의 마음’(세미콜론)을 새로 펴냈다.
음식을 매개로 의사·환자·보호자·간병인 등 정 교수가 “병원 서식자”라고 표현한 이들과
이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에세이다.
정 교수를 그가 지난 5월부터 근무하고 있는 서울 강북삼성병원 외래 진료실에서 만났다.
◇의사들은 모여 앉아 커피 마시지 않는다
-책의 어떤 내용이 슬의생에 나왔나.
“딱 두 가지다.
하나는 시즌1 제1화에서 산부인과 의사 양석형(김대명 역)이
“(깜짝 놀라서) 심장 터질 뻔했어”라고 하자,
흉부외과 의사 김준완(정경호 역)이
“심장 터지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데 그런 말을 함부로 하냐”며 화내는 장면이다.
다른 하나는 8화에서 산모가 위급한 상황인데 병원에 없는 양석형 대신
치프 레지던트 추민하(안은진 역)가 수술하고, 뒤늦게 도착한 양석형이
‘혹시라도 이번 환자가 잘못되면 네가 산부인과를 그만둘까 걱정했다.
도망치지 않고 책임감 있는 넌 좋은 의사가 될 것’이라고 격려하는 에피소드다.
실제 내가 겪은 일이다.”
-그 밖에도 많은 에피소드가 책에서 나오지 않았나?
응급 호출이 이어지면서 결국 퇴근하지 못하는 장면이라든가,
가족이 입원하자 냉혈한 의사가 안절부절못하는 보호자로 변하거나,
너무 힘들어서 잠수 타는 수련의라든가.
“아니다. 의사라면 누구나 겪는, 일상적인 일들이다.”
-주인공의 롤모델이란 얘기도 있다.
“전혀 아니다. 주인공들처럼 의대 다닐 때 밴드 활동 하면서 드럼을 했지만, 잘 못 친다.”
-그럼에도 굳이 한 명을 꼽는다면 누구와 비슷할까.
“없다. 아, 간담췌외과 부교수 이익준(조정석 역)처럼 되고 싶다.
익준이는 지치지 않고 일한다. 자기 일을 힘들어하지 않고 즐긴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주인공 5인방.
정의석은 “일을 즐기며 지치지 않고 일하는 의사 이익준(조정석 역·가운데)처럼 되고 싶다”고 했다.
/tvN
-’외과의사 봉달의’ ‘흉부외과’ 등 다른 의학 드라마에도 참여했더라.
“외과의사 봉달의는 계속 촬영 현장에 있었다. 전공의 끝나고 시간이 좀 남을 때였다.
예전에는 4년 차 끝나면 한두 달 쉬게 해줬다.
만날 버스에서 자고, 아침에 찜질방 가서 샤워하고, 나와서 졸다가 촬영장에서 일하고….
병원보다 훨씬 힘들더라(웃음).”
-촬영 현장에서 무슨 일을 했나.
“예를 들어 대본에 ‘수술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지문이 한 줄 나온다.
그러면 그 ‘열심히’를 구성해주는 거다. ‘지금 이런저런 거를 하면 된다’고 알려줬다.”
-슬의생이 ‘비현실적’이라며 보지 않은 이들도 있다.
그렇게 인간적이고 따뜻한 의사들이 정말 있나.
“의사인 내가 볼 때는 리얼하다. 따뜻한 말과 행동을 해야 진짜 따뜻한 건 아니다.
그저께 수술한 환자한테 엄청 화를 냈다.
수술하고서 가래도 잘 뱉고 기침도 해야 빨리 낫는데 하지 않아 그랬다.
어제 보니 환자가 열심히 기침하고 가래 뱉어 좋아졌더라.
퇴원하면 그가 나를 친절한 의사로 기억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나쁜 놈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환자들은 말 한마디 걸기 힘든,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의사에 실망한다.
“의사는 냉정해야 한다. 냉정하지 않으면 환자가 죽는다.
드라마에서는 수술 마친 의사가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던 가족에게 자상하게 설명한다.
현실에서는 힘들다.
환자를 침대에 싣고 수술실을 밀고 나가서 바로 중환자실로 같이 가서 환자를 돌봐야 한다.
설명하는 그 시간도 위험할 수 있다.”
-슬의생에서 비현실적인 부분은 없나.
“만날 모여서 밥 먹고 커피 마시는 거.
의사들이 커피 살 때는 모여있지만 받으면 바로 헤어진다.
밥 먹는 데에도 오랜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보통 10분 미만이고, 먹고 바로 다시 일한다.
일주일쯤 전 누가 찾아와 병원 밖으로 나가 정동에 있는 한 식당에서 점심 먹다가 깜짝 놀랐다.
‘세상에, 점심 시간에는 사람들이 다 나와서 밥을 먹는구나,
밥 먹고 커피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직장에) 들어가는구나’라고.”
◇'붕산 떡볶이’로 날아간 요리사의 꿈
정 교수는 어렵게 의사가 됐다.
본래 학력고사 세대지만, 본고사와 수능까지 치러가며 94학번으로 의대에 입학했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고3 때는 현대무용 전공을 잠시 고민했고,
지난번 책에 들어간 일러스트를 직접 그릴 정도로 그림 솜씨도 있던데.
“재수하면서 보니 의사가 제일 재미있을 것 같았고,
의대에 가보니 흉부외과가 제일 재밌을 것 같아 지원했다.”
-라텍스 알레르기가 있다는데. 수술할 때 라텍스 장갑은 필수 아닌가.
“약을 발라도 봤는데 별로 나아지지 않아 그냥 산다. 심하면 갈라지거나 찢어지기도 한다.
주부습진 비슷하다. 어떤 직종이든 직업병은 있다.”
-그럼에도 의사 일을 계속할 만큼 여전히 재미있나.
“재미라는 표현보다는 보람이 맞을 것 같다. 열심히 수술하면 환자가 회복되니까.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좋다.”
-의사였던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았나.
“정형외과 의사였던 아버지를 어려서는 그리 동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흉부외과 전공의로 엄청 고생하는 걸 보고
‘쌤통이다. 내가 힘들게 흉부외과 하지 말라고 그랬지’라며 엄청 재밌어 하셨다(웃음).”
-중학교 2학년 때 떡볶이를 직접 만들어 동생과 먹었다가 큰일 날 뻔했다고.
“어머니가 외출한 사이, 출출해서 떡볶이를 만들었다.
귀가한 어머니가 ‘집에 설탕이 없는데 어떻게 만들었냐’고 물으셨다.
내가 설탕이라고 추정하고 넣은 물질은
바퀴벌레 퇴치하려고 어머니가 찬장 맨 위칸에 숨겨둔 붕산이었다.
다행히 치사량을 넣지 않았지만, 며칠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이 사건으로 요리사의 꿈은 깨졌다(웃음).”
-그럼에도 음식을 주제로 에세이를 썼다.
“요리를 되게 좋아한다. 집에서는 프랑스 요리 하기를 즐긴다.
식구들은 다 싫어하지만, 강제로 먹인다(웃음).”
-보통 프랑스 음식을 만들어주면 가족이 좋아하지 않나.
“똑같은 음식을 계속 해주니까. 할 줄 아는 게 몇 가지 없어 돌려 막기 한다.
제일 자신 있는 건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채소 스튜 라타투이(ratatouille)다.”
-그렇게 음식을 좋아하는데 하루 종일 굶는 날도 많더라.
“심장, 대동맥 등 흉부외과 수술은 다른 과보다 긴 편이다.
보통 아침 9시 30분에 시작하면 오후 3시 정도 끝나지만, 20시간 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하루 종일 굶는 거다.”
정의석 교수가 "지겹도록 먹지만 그래도 맛있다"는 삼각김밥과 바나나맛 우유.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힘들게 일하고 나서 먹는 밥맛은 최고! 시장이 반찬! 이런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썼더라.
“맛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먹는다. 그래야 일을 하니까.”
‘누군가 시켜놓고 응급수술에 들어가 주인을 잃었을,
스티로폼 접시에 담겨 랩으로 포장된 짜장면이었다.
열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곱게 기름이 껴 있는 짜장면이… 맛있었다.
매일 지겹도록 먹는 컵라면, 삼각김밥, 바나나맛 우유보다 훨씬 맛있었다.’
-모든 환자가 맛없다는 환자식, 맛있으면 안 되나.
“환자식이 맛없다기보다는 환자로서 병원에 있으면서 먹는 음식은 맛있을 수 없다.
특히 코로나 상황에서 보호자가 1명밖에 같이 있지 못하고, 중환자실은 면회도 거의 불가능하다.
음식 자체보다 환자의 컨디션이나 그가 처한 상황·분위기 때문에 맛없지 않을까.”
-과거 메르스 때 의사라서 카페 예약이 거절됐던 경험을 썼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비슷한 경험 하나.
“조금 다르다. 과거 메르스에 대해서는 혐오가 있었다.
코로나는 두려움은 약간 있지만 혐오는 덜하다.
같이 살아가야 할 질병이라고, 코로나와는 다르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환자한테 미안해서 머리를 자주 깎지 않는다고.
“지금 머리가 2주 전 6개월 만에 자른 거다.
내가 멀끔하게 나타나면 환자가 ‘나는 이렇게 아픈데 너는 놀고 다니냐’라는 기분이 들까 봐
죄송하다. 기사가 나갈 때 인터뷰한 날짜도 빼줬으면 한다.
오늘 수술한 환자가 있는데, 수술한 날 인터뷰했다는 기사를 보면 속상할 것 같다.
그런 것들에 결벽증이 있다.”
-’돌아오는 길은 항상 가는 길보다 길지 않아’라는 제목의 에필로그로 책을 마무리했다.
“모든 환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길지 않기를 염원하는 마음에서 붙였다.
인디 밴드 ‘혹시 몰라’의 앨범 제목에서 따왔다.
사람들이 정말 모르는 밴드지만 나는 엄청 좋아한다.
지나가다 우연히 들었는데 너무 음악이 훌륭해 계속 찾아 들었다.
수술할 때 들으면 집중을 도와주고, 지칠 때 힘이 된다.
밴드 멤버들에게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는 힘이 될 수 있다’고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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