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세상

[음악]비발디의 500여 협주곡

colorprom 2021. 6. 7. 16:11

[박종호의 문화一流]

비발디의 500여 협주곡, 고아를 위해 쓰고 고아들이 연주한 음악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비발디, 신학교 졸업 후 사제가 돼
베네치아 고아원서 음악 지도… 일주일에 두 차례 新曲 콘서트

 

박종호 풍월당 대표

입력 2021.06.07 03:00

 

베네치아 ‘방문의 성모 피에타 교회’. 비발디가 활동했던 고아원이 있던 자리다. /위키피디아

 

베네치아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는 스키아보니 해변을 걷다 보면

바다를 향해 서있는 커다랗고 흰 성당이 보인다.

피에타 성당, 정확히는 ‘방문의 성모 피에타 교회’라는 이름의 성당에는

“여기서 비발디가 활동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이 성당은 비발디 사후에 세워졌으며,

그 자리에는 ‘오르페달레 델라 피에타’라는 고아원이 있었다.

비발디는 30년 가까이 이 고아원에서 근무한 사제였으며,

그의 많은 명곡들은 고아원에서 탄생했다.

 

베네치아 출신의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는

이발사이자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천식으로 병약했던 아이를 교회에 바치겠다고 서원하였다.

그래서 비발디는 신학교에 들어가서 10년의 공부 끝에 사제가 되었다.

 

그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발령받았다.

 

러시아 황태자 파벨 페트로비츠의 1782년 베네치아 비공식 방문 때 열린

고아원 오케스트라 연주회 그림.

비발디는 신학교 졸업 후 사제가 됐고, 고아원에 발령받아

여자아이들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를 지도하며 음악적 명성을 높였다. /위키피디아

 

그는 고아원에서 여자아이들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의 지도를 맡았다.

그는 바이올린 연주를 하면서 소녀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악장이 되고 작곡도 하게 된다.

 

그런데 그의 지도가 좋았던지 오케스트라는 점점 인기를 끌게 되었다.

비발디의 고아 소녀 오케스트라는 베네치아의 명물이 되었고,

외국인들은 “베네치아에 가면 소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꼭 들어보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인기를 끌고 청중이 많아지면서,

오케스트라는 일주일에 두 차례나 콘서트를 열어야 했다.

당시는 가급적 새로운 곡을 선호하는 분위기였기에,

비발디는 콘서트를 위해 끊임없이 작곡을 해야 했다.

또한 청중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점점 어려운 곡을 쓰게 되었다.

그렇게 단원의 기량이 늘고 작품의 숫자도 많아지면서, 비발디의 명성도 함께 커져갔다.

 

베네치아에는 고아들이 많았다.

중세의 베네치아는 지중해를 제패한 해양 강국이었다.

그들은 해양 무역을 통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하지만 국가 발전의 이면에는

바다로 나가서 사고나 전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남자들도 많았다.

 

이렇게 생긴 고아들을 국가가 양육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고아원을 만들어

교회와 함께 운영하였다.

그런 아이들을 위한 대형 고아원이 네 개나 생겼다.

고아들의 교육에서는 교양과 실용을 함께 갖춘 음악을 중요한 과목으로 다루었다.

 

그렇게 교육받던 아이들이 15세가 넘으면,

남자아이는 무역이나 회계 등을 공부시켜 국가의 일꾼으로 만들었다.

대신 소녀들에게는 음악을 전문가적 수준으로 계속 교육시켰다.

 

당시 유럽 상류층은 자녀의 음악 교육이 필수였기에,

음악이나 라틴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최초의 전문 직종의 하나였다.

물론 악사로도 진출이 가능하며 취업의 범위는 유럽 전체였다.

 

그렇게 고아 소녀 오케스트라가 발전했다.

 

고아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음악은 따뜻한 가정에서 예쁜 옷을 입고 즐겁게 익힌 것이 아니었다.

한 벌밖에 없는 누더기를 입고 열악한 기숙사에서 힘들여 연마한 것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신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런 그들의 가슴속에 응어리져있던 것이 비발디의 음악으로 울려나왔다.

 

천상의 아름다움만이 예술은 아니다.

비참한 환경과 지난한 일상의 그림자가 더 큰 감동을 줄 수도 있다.

 

청중은 그들의 연주에 감탄했다.

호기심으로 구경 왔던 여행객들이 접한 것은 기적과 같은 은총이었다.

비참한 아이들을 먹이고 살리기 위해서 가르친 음악이 예술을 피웠다.

비발디는 그들을 위해서 수백 곡의 음악을 작곡했다.

그 음악들 뒤에는 고아를 향한 국가와 사회의 배려비발디의 사랑이 있다.

 

비발디는 30년간의 고아원 생활을 접고 사제의 임무로부터도 자유로워져 베네치아를 떠난다.

이미 그의 명성은 온 유럽에 퍼져있었다.

그가 고향을 떠난 것이 소녀들과의 추문 때문이라는 말이 있지만, 전혀 근거는 없다.

반면 유명해진 그를 끌어내리기 위한 시기와 음모가 난무하는 상황이었다.

 

대신에 많은 음악가들은 그를 존경하였다.

바흐비발디의 악보들을 검토하여 자신의 기악곡의 바탕을 만들었다.

비발디의 음악은 유럽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특히 500여 곡에 달하는 협주곡들은

낭만시대까지도 그가 세웠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비발디는 유럽의 주요 도시와 극장들을 거치면서

가장 인기가 높은 오페라 작곡가로 변신하였다.

그가 작곡한 오페라는 무려 80여 편에 이르는데, 현재는 40편 정도가 남아 있고

최근 들어서 점점 비발디 오페라의 공연들이 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황제 카를 6세비발디의 음악에 매료되어 그를 빈으로 초빙하였다.

비발디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황제에게 달려갔는데,

정작 그가 빈에 도착하자 황제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졸지에 후원자를 잃어버린 비발디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그만한 사람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결국 그는 극빈자가 되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비발디의 마지막 거처. 현재 유명한 ‘카페 자허’다.

건물에는 “비발디가 1741년 이곳에서 살았다”고 쓰여 있다. /Stefano Costa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자리는 지금 유명한 케이크 가게가 되어,

매일 케이크를 사기 위한 관광객들이 줄지어 있다.

건물에는 “여기서 비발디가 죽었다”고 쓰여 있지만,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고아들을 위한 한 사제의 불굴의 노력이 지금 세상 사람들을 위한 음악의 숲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