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은 동유럽 가이드북, 속은 한인 독립운동史
[3] 정지돈 장편소설 ‘모든 것은 영원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김인환·오정희·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
입력 2021.02.26 03:00 | 수정 2021.02.26 03:00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가 이달의 소설을 추천합니다.
이달 독회의 추천작은 모두 3권.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우다영),
‘노라와 모라’(김선재),
‘모든 것은 영원했다’(정지돈)입니다.
심사평 전문은 chosun.com에 게재합니다.
/한국문학번역원
시집 정도의 작은 판형에 200쪽밖에 안 되는 소설이다.
경장편 중에서도 짧은 편에 속하는데
작품 말미에 행갈이도 없이 나열된 참고문헌은 다섯 쪽에 달한다.
다독가로 이름난 데다 그 무수한 독서 경험을 고스란히 소설 쓰기에 끌어오는
정지돈의 작품은 그리하여 언제나 페이지 수를 훨씬 능가하는
시간과 공간과 인물을 담는다.
그러니 문장은 축약되어 ‘여러 겹으로 읽히거나’
소설의 구조 역시 ‘한 몸인 듯 하면서 수많은 층위’로 이루어진다.
과거와 현재를 종축으로 삼고 다큐와 픽션을 횡축으로 삼아
새로운 흥미를 종횡무진 엮어내는 솜씨는
‘누구도 그런 적 없는 개성적인 궤도’를 그린다.
프라하에서 의사가 된 주인공 정웰링턴은
처음 들어보는 인물일지는 몰라도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어머니가 현앨리스며 박헌영의 애인이라 하여
북에서 박헌영과 함께 처형당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정웰링턴이라는 인물로 시작해서
한반도와 미국과 중국에서의 한인 공산주의 독립운동사가 펼쳐지고,
그가 살던 프라하를 중심으로는
미국에서 추방당한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최종 입북을 위한 기착지적 삶이 그려진다.
그러나 어머니 현앨리스가 목적했던 땅에 다다라 죽음을 맞이했듯
정웰링턴 또한 시립병원 중앙연구소 소장으로 있던 헤프에서 체코 비밀경찰과 연루되어
스스로 독극물을 마시고 삶을 마감하니
이 또한 두 사람만의 비운이 아니요
‘남한과 북한, 미국과 체코 모두에 버림받고 이용당했던’
많은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운명이었다.
내용적으로는 이 소설을 개인의 삶에 드리운
‘어둠과 슬픔과 그리움’이라는 그늘을 음각해내면서
‘이념이라는 환(幻)에 휘말려 드는 일의 허망함과 불가피성을 반추’하는
‘거대한 환멸의 서사’라 할 수 있다면,
형식적으로는 흩어진 무수한 작은 얘기들이 각자의 완결성을 견지하면서
소설 전체의 통일된 구조에 조응하는 병행정치 혹은 무정부적 글쓰기의 예를 보여준다.
더 보여주는 것이 있다면,
알고는 있되 어쩌면 사탐 세계사나 동유럽 여행 가이드북의 것이 전부일지도 모르는
앎 위에 겹치는 우리의 숨은 역사.
그리고 프라하의 살구색 물결에 오버랩되는 코리안 랩소디 인 블루.
정지돈
-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2015년 젊은작가 대상, 2016년 문지문학상
- 소설집 ‘내가 싸우듯이’(2016년),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2020년),
산문집 ‘영화와 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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