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34] 함무라비 ‘눈에는 눈’ 형벌… 古代 보복 살해를 멈춘 公正이었다
함무라비 법전과4000년전의 公正
입력 2021.02.09 03:00
“백성들의 목자이며 유능한 왕으로서 평화를 지키고 악과 부정을 없애겠노라.”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을 포괄하는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한 함무라비 왕은 수도 바빌론 중앙광장에 검은 현무암으로 된 ‘함무라비 법전 석비'를 세우며 서문에서 이렇게 선포했다. 이 석비는 고대 국가의 공정과 균형에 대한 감각을 들여다보며 약 4000년이 흐른 지금 인간 사회는 얼마나 더 성숙해졌는지 돌아보게 하는 세계사의 거울이다. 함무라비 왕의 재판 모습을 묘사한 그림/AFP
바빌론 왕조의 6대 국왕 함무라비(재위 기원전 1792~1750년 추정)는 뛰어난 군사·외교 능력을 발휘해서 메소포타미아 거의 전 지역을 포괄하는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했다. 이후 광대한 영토를 어떻게 통치하느냐가 정복만큼이나 어려운 과제였다. 함무라비는 법을 정비해서 통치에 이용하는 방식을 취했다. 현재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한 ‘함무라비 법전 석비’가 이 사실을 증언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기원전 1754년 제국의 수도 바빌론의 중앙광장에 높이 2.25m의 검은색 현무암 석비를 세웠는데, 후대의 침략자인 엘람(Elam)인들이 기원전 13세기에 수사(Susa)로 옮겼던 것을 1901년 서유럽 고고학자들이 재발견하여 파리로 가져왔다.
석비 윗면에는 함무라비가 정의의 신 샤마시로부터 사법 권위를 전해 받는 장면이 있고, 그 아래에 서문 및 맺음말(epilogue)과 함께 282개조의 법령이 쐐기문자로 새겨져 있다. 함무라비는 서문에서 자신이 ‘인민의 목자이며 유능한 왕’으로서 평화를 지키고 악과 부정을 없애겠노라고 선언한다. 왕은 공포와 변덕으로 통치하는 다른 고대국가의 루갈(lugal·힘센 자)과 달리 법에 의해 통치하는 새로운 제국의 모범을 보인다고 자부하고 있다.
법의 내용은 무엇일까? 사실 ‘법전(Code)’이라고 부르지만 282개조의 내용들은 체계적인 원칙에 따른 법조문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여러 지역에서 행해졌던 판결 사례들을 수집하여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장래에도 유사한 사건들이 빈번하게 일어날 터이니 표준적인 판결들을 참조하여 이 방향으로 법질서를 세우면 좋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법전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원리나 법 철학 같은 것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다만 그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면 공정성과 균형을 기하려 한 느낌을 받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표현하는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talion)이 대표적이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함무라비 석비. 높이 2.25m 돌기둥에 282조 규정을 새겼다. /Mbzt/위키피디아
누군가의 눈을 멀게 한 사람에게 자신의 눈을 멀게 만드는 처벌은 고대의 여러 율법과 법령에 나오지만 함무라비 법전이 가장 유명한 사례다. 이것은 과연 공정한 처벌일까? 우리 관점에서 보면 잔혹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으나, 고대사회에서 이런 정도면 제법 질서가 잡힌 상태라 할 수 있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 친족 일원의 눈을 멀게 하면 우리 쪽에서 상대방 집안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그쪽에서 우리 집안의 형제를 살해할 수 있으며, 다시 이에 대해 상대방 친족 일원을 살해하는 식으로 보복의 연쇄가 일어나기 십상이다. 이런 혼란 사태를 막으려면 국가가 나서서 공정한 처벌을 가하고 더 이상의 보복 행위를 금지해야 한다. 이때 어느 정도의 벌을 가하는 것이 공정한지가 중요한 문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함무라비 법전의 문구를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동해복수를 이야기하는 196조를 정확히 옮기면 이렇다. ‘한 아윌루(awīlu)가 다른 아윌루의 눈을 멀게 하면 그의 눈을 멀게 한다.’ 아윌루란 신분이 높은 귀족을 뜻한다. 똑같이 눈을 멀게 하는 처벌은 같은 신분 내에서만 적용되는 방식이다. 이와 달리 아윌루가 평민의 눈을 멀게 하면 60셰켈(은 10그램 정도를 포함한 은화)을 지불하고(198조), 노예의 눈을 멀게 하면 그 절반인 30셰켈의 은을 지불한다(199조). 바빌로니아 제국은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한 세계가 아니라 신분으로 나뉜 사회이기 때문에 처벌 정도도 신분에 따라 다른 것이다. 그런 원칙에 따라 평민이 다른 평민의 뺨을 때리면 10셰켈, 아윌루가 다른 아윌루의 뺨을 때리면 60셰켈의 은을 내고 해결하지만, 만일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아윌루의 뺨을 때렸다가는 공공장소에서 쇠가죽 채찍으로 60대를 맞는다(202조). 여사제를 비난한 자는 머리카락 절반을 밀고 공공장소에서 채찍질을 한다(127조).
고대적 의미의 공정과 균형은 우리 생각과는 다른 여러 요소들을 함께 고려한 결과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어느 아윌루가 같은 신분의 임신부를 때려서 그 여성이 유산하면 10셰켈의 은을 낸다. 그런데 만일 그 임신부가 죽었다면? 가해자의 딸을 죽인다! 이런 정도의 고통을 가해야 죄와 벌의 균형이 맞는다고 본 것 같다. 그런 원리에 입각하여 다양한 종류의 신체형이 등장한다. 의사가 아윌루를 치료하는 중에 환자가 죽거나 눈이 멀게 되면 의사의 손을 자른다. 그렇지만 노예를 치료하다가 죽으면 같은 값의 노예를 대신 구해주면 된다. 양자가 자신을 입양한 아버지를 부인하면 혀를 뽑는다. 노예가 주인의 뺨을 때리거나 대들면 귀를 자른다. 유모가 맡아서 키우던 아이를 죽게 하면 한쪽 젖가슴을 잘라낸다.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면 손목을 자른다....
여러 판례를 수집해 정리한 형태인 함무라비 법전엔 고대의 부부와 남녀 관계에 관한 풍습과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사례와 판결도 적혀있다. 영국 화가 에드윈 롱의 그림‘바빌로니아의 결혼 시장’(1875년), 런던대 소장. /위키피디아
재산상의 손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면한 제방을 잘 관리하지 않아서 물이 넘쳐 다른 사람의 농사를 망쳤다면 그 손해를 갚아주어야 한다. 만일 돈이 부족하면 전 재산과 함께 그 사람 자신도 노예로 팔아서 갚도록 한다. 건축사가 일을 잘못해서 집이 붕괴하여 집주인이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면 건축사를 사형에 처한다. 만일 이 사고로 집주인의 아들이 죽는다면 건축사의 아들을 사형에 처한다. 고대판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해당할 텐데 처벌 내용이 훨씬 무겁다.
함무라비 법전 282개조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당시 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바빌로니아 제국은 평등 사회가 아니라 귀족, 자유민, 노예 등으로 신분·지위가 철저히 나뉜 계급사회였다. 거대한 제국 질서를 유지하려면 과거 전통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안 되고 법적 정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많은 경우 지나치게 엄격한 처벌을 규정하는 면이 있으나 그래도 통치자와 상층 계급이 자의적(恣意的)으로 지배하는 것보다는 분명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귀족들에 대한 범죄 그리고 귀족들이 저지르는 범죄에 더 엄한 처벌을 규정한 것을 보면 한편으로 상층 계급을 보호하면서도 동시에 더 무거운 책임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여성들의 지위는 오늘날에 비하면 훨씬 취약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무방비로 내쳐진 것은 아니고 법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역시 진일보한 면이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가혹한 법질서보다는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도 내미는’ 종교·도덕률이 더 높은 수준인 건 맞지만 현실 사회에서 그런 일은 애초에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차라리 공정한 법질서를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렇지만 함무라비 이후 4000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 인간 사회가 과연 더 성숙해졌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고대의 결혼과 이혼
남녀가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싸우고 헤어지는 일은 먼 옛날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고대의 법령들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엿볼 수 있다.
만일 한 남성이 아내를 놔두고 다른 지역에 가서 오랜 기간 살았고 그러는 동안 이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고 하자. 그런데 뒤늦게 남편이 돌아와서 그 여성을 다시 아내로 취하고자 한다면? 함무라비 법전은 그 여성이 원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판시한다. 만일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이 이혼을 원한다면? 남편은 결혼 때 아내가 가지고 왔던 지참금을 되돌려 주고 이혼할 수 있다. 원래 지참금 없이 결혼했다면 여성에게 합의금(귀족 여성이면 60셰켈, 평민이면 20셰켈)을 주어야 한다. 반대로 아내가 이혼을 원하는 경우, 아내가 집안 재산을 탕진하고 남편의 명예를 추락시킨 일이 있다면 남편은 한 푼도 안 주고 이혼할 수 있다. 심지어 남편은 다른 여성과 재혼하고 본부인을 이 집에서 노예로 일하게 할 수도 있다.
만일 기혼 여인이 다른 남성과 동침하다가 붙잡히면 어떻게 될까? 두 불륜 남녀를 묶어서 강에다 던진다. 다만 남편이 아내를 용서하기로 결정하면 두 사람 다 목숨을 구한다. 한편 남편이 아내의 불륜을 주장하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다면? 여성은 신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선서한 다음 친정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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