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세상

[영화] '조제'

colorprom 2021. 1. 18. 14:16

[시네마 천국과 지옥] 한국과 일본 ‘조제’ 차이점과 닮은 점

 

김성현 기자

 

입력 2020.12.17 07:00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조제'

 

조제는 스크린에서 그토록 사랑 받는 걸까요.

배트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흥행 보증 수표도 아닌데,

한국과 일본에서 조제가 나오는 영화와 애니메이션만 벌써 세 번째입니다.

 

우선 일본 감독 이누도 잇신의 2003년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있지요.

이듬해 국내 개봉 당시 흥행 성적을 찾아보니, 관객 7만5000명입니다.

사실 엄청난 흥행 기록이라고는 보기 힘들지요.

 

그런데도 개봉 이후에도 젊은 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회자되더니,

올해는 한국판 리메이크 ‘조제’가 개봉했습니다.

‘최악의 하루’와 ‘더 테이블’로 주목 받은 김종관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고,

남주혁한지민이 남녀 주인공 역으로 출연했지요.

두 배우가 호흡을 맞춘 건 지난해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 이어서 벌써 두 번째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도 내년 1월 개봉을 앞두고 있지요.

 

이쯤 되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네요.

도대체 조제는 왜 그렇게 인기인 걸까요.

단편 소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편

 

얼마 전 국내 재출간된 다나베 세이코의 원작 소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읽다가

뒤늦게 힌트를 발견한 듯 싶었습니다.

영화의 원작인 이 소설은 한국어판으로는 30여 쪽 분량에 불과한 단편입니다.

 

하반신 장애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조제와 대학생 츠네오의 사랑이라는 얼개는 동일하지만,

단편 특성상 극적인 사건이 두드러지지는 않습니다.

제목처럼 사랑에 빠진 남녀가

호랑이와 물고기를 보기 위해 동물원과 수족관에 가는 정도가 전부라고 할까요.

자초지종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느 한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한 듯한 단편의 매력이 잘 살아 있습니다.

 

꽉 짜여진 반전 미스터리나 시대극만이 아니라

이처럼 여백이 많은 단편도 시나리오 작가나 연출가에게는 흥미로운 도전 과제가 됩니다.

여백이 많다는 건 그만큼 자유롭게 채워넣을 여지도 많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재량이 커질수록 감독들도 신나는 건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제의 인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극적 사건이 두드러지지 않은 단편 소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지요.

그런데도 조제가 영화와 애니메이션로 계속 제작되는 건

특별한 매력을 감추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역시 단편을 통해서 조제의 숨은 매력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운신이 자유롭지 않기에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조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가냘프고 연약한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제는 걸핏하면 화를 내고 상대를 나무라지요. 단편에서 츠네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조제의 이런 거만한 태도가, 투정의 역설적 표현이 아닌가 하고.”(한국어판 53쪽)

 

어쩌면 조제의 투정은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험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보호 장치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조제가 마음을 여는 순간, 누구보다 어리고 여린 아이로 돌아오지요.

조제는 난생 처음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본 뒤에 비로소 이렇게 고백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무서워도 안길 수 있으니까.”(65쪽)

 

 

일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일본 영화는 이런 조제의 ‘반전 매력’을 제대로 살린 경우입니다.

모처럼 힘들게 찾아간 수족관이 휴업 중이라는 식의 유머 감각도

반전의 재미를 살리는 데 단단히 한몫을 하지요.

 

일본 영화의 조제가 엉뚱하고 천진난만한 소녀에 가깝다면,

얼마 전 개봉한 한국판 조제(한지민)는 순도 높은 멜로물의 여주인공입니다.

“네가 나한테 걸어오던 소리가 기억나. 난 이제 무섭지 않아.”

한껏 절제했다가 무심한 듯이 툭 던지고 지나치는 한국판 대사는

산문보다는 차라리 운문을 듣는 것만 같지요.

 

한국판 ‘조제’김종관 감독은

카페와 골목 같은 일상적 공간에서 싹트는 애틋한 감정을 카메라로 포착하는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작 ‘최악의 하루’에서 남산의 구석구석, ‘더 테이블’에서 비좁은 카페가 그 무대였다면

이번 ‘조제’에서는 철거를 앞둔 마을이라는 한국적 풍경을 골랐지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찌개, 부러진 상다리와 비닐 봉지에 담긴 우유까지

그의 영화에서 언제나 중요한 건 디테일입니다.

영화가 낭만적 동화보다는 현실적 멜로물에 가까울 것이라는 예고 역할을 하지요.

 

눈 내리는 골목길에서 휠체어에 앉은 조제와 무릎 꿇은 대학생 영석(남주혁)이 입 맞추는 순간,

시종 푸르렀던 색조의 화면도 가로등 불빛으로 노랗게 물듭니다.

조제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이 서서히 걷히면서,

영화도 서정성을 담뿍 머금은 ‘김종관의 조제’로 거듭나지요.

 

이렇듯 한국과 일본의 ‘조제’는 다른 점이 적지 않지만,

두 영화에는 닮은 점이자, 원작 소설과의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삶에서 소중했던 존재를 도망치듯이 남기고 떠나온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두 영화는

장애가 아니라 실은 우리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회한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남녀가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서 아련한 슬픔이 남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고 떠나온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영화가 끝나면 자꾸만 되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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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천국과 지옥#시네마 클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