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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유대인 박물관에서 만난 '3중의 소수자' 번스타인

colorprom 2020. 8. 31. 14:48

 

[박종호의 문화一流] 역경에도 굴하지 않았던 3중의 소수자

 

조선일보

 

  • 박종호 풍월당 대표

 

 

입력 2020.07.27 03:08

 

오스트리아 빈 유대인박물관 내 지휘자 번스타인 전시관

이미지 크게보기①1978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지휘를 끝낸 레너드 번스타인.

②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유대인 박물관.

③유대인 박물관에 전시된 번스타인이 썼던 몽당연필들.

그는 이를 ‘작은 병사들(little soldiers)’로 불렀다.

/빈 필하모닉 페이스북·위키피디아·번스타인 트위터

 

유대인 박물관이라면 대부분 베를린에 있는 것을 떠올리지만,

중부 유럽 도시 대부분에는 유대인 박물관이 있다.

 

유대인 박물관은 흔히 홀로코스트, 즉 나치에 희생당한 참상을 전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지만, 그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유대 문화유대교 혹은 유대 인물도 전시한다.

 

에는 몇 년 전에 새로운 유대인 박물관이 하나 더 생겼다.

그곳은 한 층이 전부 한 유대인에 대한 전시로 펼쳐져 있어 적잖이 놀랐다.

그는 바로 미국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1918~1990)이다.

사람들은 그를 1960~1970년대에 카라얀과 함께 세계 지휘계에서 우상 같은 인기를 구가했던

화려한 지휘자로 기억한다.

그러했기에 그에 대한 오해도 많았으며,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과 거부감을 갖는 사람으로 양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은 취향 문제일 뿐,

음악가들 사이에서조차 다들 번스타인의 비범한 음악적 능력은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미국인이고 하버드대 출신이며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동일시하다시피 했던 번스타인의 전시를 에서 맞닥뜨린 것은

예상 밖이었다.

 

빈 유대인 박물관에서 만난 번스타인

 

번스타인은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하여 보스턴에 정착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지휘자일 뿐 아니라 교향곡 세 곡과 '캔디드' 등 오페라 세 편 등의 작곡가이며,

교육자, 해설가, 피아니스트, 작가 등 다방면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화려한 활약 뒤에 숨은 그의 개인적 아픔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예술가이자 대표적 지성인으로서

역대 대통령 부부들과 깊은 개인적 친분도 지니며 살았지만,

고통스러운 차별 속에서 고군분투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흔히 그를 '3중의 소수자'로 말한다.

번스타인은 자유주의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유대인이었으며 좌익 성향이었고 동성애자였다.

세 가지는 1950년대 미국에서는 최악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런 조건을 지닌 채로 번스타인

미국 최고 악단인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번스타인 청소년 음악회'를 TV 클래식 프로그램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성공시켰으며,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작곡하여 대중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국에 구스타프 말러 열풍을 일으켰고, 세계 최초로 말러 교향곡 전곡 음반을 녹음하였다.

또한 미국 현대 음악을 세계적으로 알렸으며, 미국 출생은 대형 지휘자가 될 수 없다는 편견

(당시 미국의 일류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극장 지휘자들은 유럽 출신 이민자였다)을 처음 타파했다.

 

그는 미국 클래식 음악 사상 전무후무한 수퍼스타였다.

그러나 그는 하버드 졸업 논문으로 '인종적 요소가 미국 음악에 미친 영향'을 쓴 이래로

한 번도 소수자 편에 서지 않은 적이 없었다.

사상적 성향 때문에 평생 FBI의 감찰 대상자였던 그는

자신의 조건이 미국에서 큰 장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겉으로라도 정체성을 굽힌 적이 없었다.

 

대신에 탁월한 실력과 특유의 친화성으로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포섭해나갔다.

적도 그를 만나면 대부분 인정하고 심지어 매료되었다.

번스타인은 사실 두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하나는 저명하고 인기 있는 예술가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기득권의 반역자였다.

그는 세 가지 마이너리티 중에서 하나라도 전향한다면 더 큰 혜택과 명예가 따른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득을 위해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정치를 멀리하면서 다만 고독한 지성인으로만 남았다.

 

'말러의 도시' 빈에서 말년을 마무리

 

박종호 풍월당 대표

 

1969년 12년을 지낸 뉴욕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를 사임한 그는 유럽으로 날아갔다.

그는 자기가 존경했던 말러의 도시에서 새로운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에서 보낸 만년의 활동은 의외로 젊은 뉴욕 시절을 능가할 정도로 빛났다.

 

자유분방한 미국인이 지휘대에서 카우보이처럼 춤을 추자

처음에는 유럽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그의 지시를 듣지도 않았다.

말러가 직접 지휘했다는 자부심으로 넘치던 빈 필하모닉 단원들은

말러를 본 적도 없던 이방인의 지휘가 황당했다.

 

그러나 번스타인은 실력으로 그들을 제압하고 친화력으로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번스타인은 이후 24년간 빈 필을 197회나 지휘하며 무수한 명반을 남긴다.

번스타인은 연주 여행 때 옷가지보다도 책을 더 많이 들고 다녔던 쉬지 않는 독서가였다.

책을 담은 트렁크가 3개가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재능이 넘치니 쉴 틈이 없었다.

매일 담배 100개비를 피우고

콘서트에서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무대 뒤에서 위스키를 한 잔씩 비우던 20세기 낭만주의자는

결국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대인 박물관에는 번스타인이 남긴 몽당연필들이 나무 상자에 담겨 있다.

멈추지 않았던 공부와 노력의 증거다.

인간이 남긴 흔적 중에 거대한 작품 이상으로 감동적인 것의 하나였다.

고통 속에서 본인을 소진한 그가 인내한 시간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몽당 연필들이다.

닳아서 짧아진 못난이들을 그는 버릴 수 없었다.

예술가를 예술로 판단하지 않고,

인종·종교·사상·정체성 등 성향으로 공격하는 것은 참으로 비예술적인 행위다.

 

무수한 박해를 당하면서도 적을 적으로 대하지 않았고,

대신에 예술이 가진 최고 미덕인 인류애로써 그들을 형제로 만들고

나뉜 인간을 안아주었던 번스타인은 우리가 기억할 만한 위대한 소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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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27/20200727000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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