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홍콩 빈과일보(蘋果日報) 사주인 지미 라이(黎智英)

colorprom 2020. 8. 14. 16:39

[만물상] 빈과일보

 

조선일보

 

 

 

입력 2020.08.13 03:18 | 수정 2020.08.13 05:27

 

홍콩 빈과일보(蘋果日報) 사주인 지미 라이(黎智英)가

작년 홍콩에서 반중(反中) 시위가 한창일 때 직접 광고에 등장했다.

화살을 연속으로 얻어맞지만 꿋꿋하게 빨간 사과를 베어 먹는 모습이었다.

 

사과가 중국어로 '빈과'다.

중국홍콩 민주화 보도에 앞장서온 빈과일보와 자신을 아무리 탄압해도

꺾이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라이는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사과)에서 '빈과'라는 이름을 지었다.

"선악과를 따지 않았더라면 악(惡)도 없고 뉴스도 없을 것"이란 의미라고 한다.

빈과일보 로고는 IT기업 애플과 유사하다.

 

▶1948년 광저우에서 태어난 라이는 12세 때 홍콩 돈 1달러를 갖고 밀항한다.

81년 의류업체 지오다노를 창업하고 홍콩 재벌이 됐다.

 

그의 인생을 다시 바꾼 건 89년 '천안문 학살'이었다.

당시 홍콩 인구 500만 가운데 100만이 거리로 몰려나왔는데

라이지오다노 티셔츠에 반중 구호를 찍어 나눠줬다.

 

95년 빈과일보를 창간했다.

 

 

▶원래 홍콩언론 자유가 만개하던 곳이었다.

영국 총독부공산당과 국민당의 공존을 허용했다.

공산당은 서방 정보를 얻었고

홍콩 언론들은 공산당 권력 투쟁 같은 내밀한 얘기를 전하며 부패상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그러나 1997년 홍콩 반환이 다가오자 언론들의 펜도 무뎌지기 시작했다.

'알아서 기는' 매체가 늘어났다.

유력 영자지는 중국 대기업 손에 넘어갔다.

 

그 와중에도 빈과일보는 할 말을 했다.

홍콩 자유를 옹호하며 중국 지도부의 부패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김정일과 후진타오 통역을 했던 중국 관리의 처형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중국 선전 기관들은 이런 빈과일보를 "서방 앞잡이" "쓰레기"라고 매도했다.

 

2015년 빈과일보홍콩의 '우산 시위' 보도를 이끌자 본사와 라이 자택에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라이는 작년에도 화염병 테러를 당했다.

 

홍콩 경찰이 엊그제 '안전법' 위반 혐의빈과일보를 압수수색하고 라이를 체포했다.

그러자 홍콩 시민들이 가판대의 빈과일보와 그 주식을 대거 구입하는 방법으로 응원에 나섰다.

평소 10만부 발행하던 빈과일보는 55만부를 찍어 다 팔았고 주가는 한때 10배 급 등했다.

 

라이가 어제 보석으로 풀려나자

경찰서 앞에는 수십 명이 '계속 싸우겠다'는 제목의 빈과일보를 흔들며 환호했다.

 

중국이 '안전법'을 강행 처리한 이후 홍콩 민주 인사들이 줄줄이 잡혀가고 있다.

일당 독재는 언론 자유를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빈과일보라이의 고초는 이제 시작일 것이다.

 

자유와 민주를 위한 '횃불'이 꺼지지 않기를 멀리서 응원한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13/2020081300047.html

감방 갔다와도… 反中 언론사주 "내 선택 안 바꾼다"

 

조선일보

 

 

 

입력 2020.08.14 03:00

 

'불굴의 反中투사' 지미라이

지난 10일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던 홍콩 빈과일보 지미 라이(黎智英·72) 회장

보석으로 풀려난 당일인 12일 정오, 홍콩 동부 정관오 지역에 있는 신문사로 출근했다.

그가 편집국으로 들어서자 직원들은 박수를 치고 꽃다발을 건넸다.

그는 "홍콩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어

"빈과(일보)는 분명히 버텨낼 수 있습니다. 어떤 압박을 받아도 모두 버텨내야 합니다.

각자 산을 오릅시다. 계속 오릅시다"라고 했다.

2014년 '우산혁명' 땐 시위 선봉에 -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요구 시위인 '우산 혁명' 당시인

2014년 9월 28일 홍콩 반중(反中) 매체 빈과일보지미 라이(가운데) 회장이

홍콩 정부청사 앞에서 시위대를 향해 연설을 하고 있다.

그는 '우산 혁명'뿐 아니라 2019년 홍콩 범죄자를 중국에 보낼 수 있는 내용의

범죄인 인도법 제정 반대 시위 때도 최전선에 섰다.

라이 회장은 지난 10일 홍콩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가 40시간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EPA 연합뉴스

 

지난 6월 30일 홍콩 내 반중(反中) 세력을 감시·처벌하는 홍콩보안법이 시행된 후

체포된 사람은 알려진 것만 20명 가까이 된다.

하지만 라이 회장만큼 국내외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인물은 없다.

영미권에서는 그를 "홍콩 언론 자유의 상징"이라고 부르고,

중국 인민일보는 13일 "세기(世紀)의 매국노"라고 비난했다.

 

라이 회장은 홍콩 내 발행 부수 2위인 빈과일보의 창립자이자

모회사인 미디어그룹 '넥스트 디지털'사(社)의 최대 주주다.

홍콩보안법 위반, 선동(煽動), 불법 집회 조직, 참여 등 10여 가지 혐의에 대해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다.

그동안 중국을 거세게 비판해온 그는 홍콩보안법이 시행될 때부터 체포 1순위로 꼽혀왔다.

법 시행 전인 6월 18일 AFP통신 인터뷰에서 "감옥에 갈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삶의 이력이 저항 의지의 바탕이 됐다는 분석이 많다.

라이 회장은 1948년 중국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화물선 6척을 가진 부유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1948년 광저우가 공산화되면서 부친은 홍콩으로 피신하고

어머니는 '노동 개조(사상 개조 목적으로 노역시키는 것)'에 보내졌다.

라이 회장은 5세 때부터 쓰레기를 주워 입에 풀칠했고,

암시장에서 라이터를 팔거나 광저우 기차역 앞에서 짐을 날랐다고 한다.

11일 홍콩 지하철에서 한 남성이 빈과일보를 펼쳐들고 있다.

신문 1면 헤드라인에 "빈과는 반드시 버텨낼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AFP 연합뉴스

 

12세가 되던 해, 그는 홍콩 돈 1달러를 들고 아버지가 있는 홍콩으로 밀항했다.

가발 공장, 의류 회사에 들어가 하루 16시간씩 일했다.

그는 "너무 오래 일하다 보니 다리에 힘이 풀려 소변을 보기도 어려웠다"고 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1981년 의류 브랜드 '지오다노'를 세웠다.

일하면서도 영어를 독학하고 닥치는대로 책을 읽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비판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노예의 길'

책장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여러 번 읽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기업인이었던 그가 정치에 눈을 뜬 계기는 1989년 천안문(天安門) 사태였다.

베이징 천안문에서 정치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향해 군이 총을 쏘자

홍콩에서 대규모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도 '내려오라. 우리는 분노했다'라고 적힌 티셔츠를 만들어 시위대에 나눠줬다.

 

1990년에는 잡지를 발행하며 언론 사업에 뛰어들었다.

리펑 당시 중국 총리를 비난하는 글을 실었다가 중국에서 의류 사업이 어려워지자

지오다노를 매각했다.

"장사꾼은 정권에 맞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언론에 '올인'하게 된 계기라고 한다.

1995년 빈과일보를 창간해

"아시아의 루퍼트 머독(월스트리트저널 등을 보유한 언론 재벌)"이라고 불렸다.

라이 회장은 홍콩 야당과 시민 단체를 후원해왔다.

중국 정부가 그를 "반중(反中) 세력의 돈줄"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2014년과 2019년 홍콩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정부 시위 때는 시위대 맨 앞줄에 섰다.

스스로를 "트러블 메이커(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라고 부르는 그는

지면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중국 공산당과 시진핑 국가주석을 비판했다.

 

지난해 미국을 방문해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 등을 만나 홍콩 문제를 논의했다.

라이 회장 체포를 계기로 지지자들은 빈과일보 지지 캠페인을 벌이고 회사 주식을 샀다.

하지만 신문 모회사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11% 감소하고 영업 적자는 23% 가까이 늘었다.

반중 성향 때문에 기업들이 광고를 꺼리면서 신문 1면에 성인용품 광고를 싣고 있다.

홍콩보안법 수사 결과에 따라 회사 자산이 압류되고 막대한 벌금을 물 수도 있다.

라이 회장은 보석으로 풀려난 뒤 12일(현지 시각) 영국 BBC 인터뷰에서

"구속돼 있는 동안

'이런 시련이 닥칠 줄 미리 알았더라도 민주화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해봤다.

지금과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결론이었다"고 했다.

 

13일 미 헤리티지재단이 주최한 온라인 세미나 연설에서도

"우리가 (중국을) 바꾸지 않는다면 세계 평화는 없다"고 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14/202008140014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