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57] 400년전 美 개척자들 하선해 밟은 첫번째 바위는 진짜일까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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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머스·매사추세츠·데번셔=송동훈 문명탐험가
입력 2020.08.04 05:00
플리머스와 필그림 파더스
이미지 크게보기미국 동부 매사추세츠주의 한가로운 플리머스 해안 풍광.
사진 속 그리스식 신전은‘플리머스 바위’를 보호하고자 세웠다.
이곳은 1620년 청교도 순례자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도착한 곳이다.
남부 버지니아주의 제임스타운(1607년)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플리머스에서 시작된 뉴잉글랜드는 독립 전쟁과 남북전쟁을 주도함으로써
오늘날 미국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뉴잉글랜드 해안에 도착한 메이플라워호(사진 위 왼쪽),
메이플라워 서약에 서명하는 순례자들(가운데),
순례자들이 처음 밟고 내렸다고 알려진 플리머스 바위. /송동훈·위키피디아·게티이미지뱅크
뉴욕과 보스턴을 잇는 95번 도로는 미국 동부 해안가의 전형적인 풍광을 선사한다.
한편에는 강인한 침엽수들이 이어지고, 다른 편에는 거친 대서양이 넘실댄다.
차창을 내리면 짠 내 머금은 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스친다. 멋진 드라이브 코스다.
그렇게 뉴욕주(州)를 지나 코네티컷주와 로드아일랜드주를 통과하면 매사추세츠주다.
보스턴으로 올라가지 않고, '케이프 코드 만(Cape Cod Bay)'을 향해 계속 대서양 쪽으로 나아가면
익숙한 이름이 적힌 이정표가 나오기 시작한다.
플리머스(Plymouth)!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도시다.
정확하게 400년 전인 1620년, 개척자 100여 명이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바로 이곳에 도착했다.
뉴잉글랜드 최초 정착지였고, 진정한 미국이 시작된 곳이었다.
첫 순례자들이 도착하다
오늘날 플리머스는 관광지로 인기다.
초창기 개척자들의 삶을 재현해 놓은 야외 역사박물관
플리머스 플랜테이션(Plimoth Plantation)도 좋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플리머스 바위(Plymouth Rock)'다.
플리머스 바위는 도시 한가운데, 대서양 물이 바로 앞까지 들어오는 해안가에 있다.
거대한 도리아 양식의 신전 건물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띈다.
사방이 뚫린 신전 안으로 들어가면 움푹 파인 바닥 아래 큰 바위 하나가 놓여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바위에 불과하다. 표면에 새겨진 '1620'이란 숫자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 이 바위는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온 순례자들이
신대륙에 상륙할 때 밟은 바위고, 장소다.
말 그대로 역사적인 바위지만 보고 있노라면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플리머스에 상륙한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라 불리는 개척자들에게서 시작됐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400년 전 개척자들은 미국 건설이라는 '위대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대서양을 건넌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종교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모든 것을 걸고 미지의 땅으로 왔다.
그들의 항해와 정착이 미국이란 나라의 출발이 되리라고,
미국이 훗날 초강대국이 되리라고 생각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신대륙에 처음 상륙할 때 밟은 바위를 기억하고 보존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눈앞의 바위는 후손들이 만들어낸 작위적인 신화의 증거일 것이다.
물론 상관없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개척자들과 플리머스의 중요성은 바위의 진위와 상관없기 때문이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억압받다
순례자들은 청교도(Puritan)였다.
그들은 종교개혁과 영국 역사의 창조물이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해 1517년 시작된 종교개혁이 영국에서 결실을 본 건
헨리 8세의 수장령(Acts of Supremacy·1534년)에 의해서였다.
이 법으로 영국 교회는 로마의 교황에게서 독립했고,
영국 왕을 수장으로 한 국교회(Anglican Church)가 새롭게 세워졌다.
국교회가 기존 교회의 의식과 교리를 상당 부분 수용하자
이에 불만을 가진 열렬한 개신교들은 청교도가 됐다.
17세기 초 영국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은 국교회는 청교도를 박해했다.
이 중 일부는 국교회의 탄압에도 자신들만의 신앙 공동체를 조직하고 신앙을 유지했다.
윌리엄 브루스터(William Brewster·1567~1644)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영국 중북부 노팅엄셔 스크루비(Scrooby) 출신의 브루스터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했고 엘리자베스 여왕 밑에서 외교관으로 일했다.
그러나 열렬한 청교도였던 브루스터는 모든 것을 버리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났다.
일단의 청교도들이 함께했다.
그들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쳐 레이던에 정착했다.
네덜란드에서 극소수 이민자로 살아가는 삶은 생각보다 여의치 않았다.
외국인 비숙련공으로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해야 했고, 자녀들은 영국 청교도로부터 멀어져 갔다.
브루스터를 비롯한 스크루비 집단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계획을 구상했다.
대서양을 건너 미지의 세계에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1620년, 스크루비 집단의 지도자들은 버지니아 개발권을 독점하고 있는 회사로부터
그곳에 정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네덜란드를 떠나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청교도들은
9월 16일 영국 남서부 플리머스 항구에서 신대륙으로 향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창대한 미래를 향한 미비한 출발이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떠나다
메이플라워호에는 모두 102명이 타고 있었다.
항해의 중심이었던 청교도 신자는 35명이었다. 나머지 67명은 비(非)청교도였다.
험난한 항해 끝에 메이플라워호는 11월 신대륙에 도착했다.
오늘날 케이프 코드라 불리는 매사추세츠 해안이었다.
목적지였던 버지니아로부터 한참 북쪽으로 벗어난 곳이었다.
실수였을까, 고의였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어쨌든 계절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다시 장거리 항해에 나서기에는 적합지 않았다.
순례자들은 주변에서 정착할 만한 곳을 찾아 헤맨 끝에 한 곳을 선택했다.
그들보다 앞서 이곳을 탐험했던 모험가 존 스미스(John Smith·1580~1631)가
'플리머스'라 이름 붙인 곳이었다.
영국 플리머스에서 출발해 신대륙의 플리머스에 도착한 셈이니 우연치고는 큰 우연이었다.
1620년 12월 21일, 순례자들은 해안에 상륙했다.
플리머스 바위를 밟고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미국의 오리진이 되다
상륙에 앞서 순례자들은 기존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장차 정부 수립과 사회생활의 기초가 될 계약을 맺었다.
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으로 알려진 이 계약을 통해
순례자들은 평등, 자치, 공정한 법에 의한 통치를 서로에게 약속했다.
서약에 기초해 존 카버(John Carver·1576?~1621)를 초대 총독(Governor)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순례자들이 신대륙에서 맞이한 첫해 겨울은 혹독했다.
추위·굶주림·질병으로 절반이 사망했다.
겨우 살아남은 순례자들은 지역 인디언의 도움을 받아 개척자가 됐다.
물고기를 잡고, 옥수수를 기르고, 야생동물을 사냥해서 생계를 이었다.
언제나 가난했지만 개척자들은 만족했다.
자유로운 신앙과 척박한 환경 속에서의 쉼 없는 노동은 청교도 교리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느리게나마 성장했다.
더 많은 청교도가 자유를 찾아왔고, 강인한 개척자가 됐다.
플리머스 바위 뒤편은 야트막한 언덕이다.
언덕에 올라 플리머스 바위 쪽을 바라보면 잔잔하지만 광활한 대서양이 보인다.
플리머스 바위 왼편으로 조성된 순례자 추모 공원 끝에는
실물 크기의 메이플라워호 모형이 바다에 떠있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치민다.
400년 전에 자유를 찾아 저토록 작은 나무배를 타고,
저토록 광활한 바다를 건넌 이들의 용기와 신념에 대한 감동이다.
그들에게 자유란 어떤 의미였기에 이토록 무모했던 것일까?
그들의 무모한 용기와 무수한 희생이 없었다면 미국이란 나라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플리머스의 순례자들에게 감사하는 이유다.
비록 나는 미국인은 아니지만, 자유의 가치를 알고 있는 인류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플리머스를 출발해 플리머스에 도착한 건국의 아버지들… 실수였나 고의였나]
이미지 크게보기영국 플리머스에 있는 '플리머스 계단'은
순례자들이 메이플라워호에 올랐던 곳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원래 플리머스는 영국 남서 해안 데번(Devon)주에 있는 항구도시다.
16세기에는 양모 무역으로 번성했다.
해적이자 뱃사람으로 유명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오늘날은 중요한 군항으로 기능하고 있다.
1620년 9월 청교도 순례자들은 이 항구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떠났다.
지금도 항구에 가면 순례자들이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했던 곳에
'메이플라워 계단 기념비(Mayflower Steps Memorial)'가 남아있다.
대서양 건너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의 플리머스 바위와 함께
항해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표지인 셈이다.
바로 옆에는 메이플라워 박물관(Mayflower Museum)도 있다.
규모는 작지만 전시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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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03/202008030368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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