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준의 도시 이야기] 홍길동보다 세종대왕이 필요하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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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입력 2020.07.24 03:11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회가 미래 비전 제시 못 하면
곳간 헐어서 나눠주는 '홍길동'이 지지받는다
/일러스트=김성규
여당은 지난 1년간 여러 부정적인 사건에도 불구하고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50%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토마 피케티'에 의하면 소련 붕괴 이후 전 세계적으로 사회 내에서 부의 쏠림 현상은 심해졌고,
경제적으로 하위 50%의 사람이 차지하는 돈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배경에서 강력한 세금 정책으로 부를 재분배하겠다는 생각은
많은 사람에게 지지받을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가진 사람과 70년대 경제 성장의 열매를 얻은 사람들이
보수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형성했다면
부의 쏠림은 새로운 장르의 지지층을 만들었다.
홍길동 대 세종대왕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많아지고 사회가 제대로 된 미래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하면
탄생하는 캐릭터는 '홍길동'이다.
탐관오리를 징계하고 곳간을 헐어서 가난한 민생에게 나누어주는 캐릭터가 지지받는다.
공무원 수를 늘리고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주는 사람이 인기를 얻는다.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이 과정에서 나눠주는 자가 권력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정치가는 국민의 세금으로 자신의 인기와 권력을 만든다.
홍길동 같은 정치가가 많다는 것은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고 계층 간 이동 사다리가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70년대에 등장한 아파트는 사다리 역할을 하였다.
아파트를 사는 것은 지주가 되고 중산층이 되는 길이었다.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그런 사다리가 없으니
비트코인에 몰리고 주식 양도세에 분노하는 것이다.
권력의 공정 분배를 위해서 다른 방식을 채택한 사람도 있다.
세종대왕은 조선시대 권력 불균형의 원인을 '문맹'에서 찾았다.
대다수 백성이 권력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한자가 어려워서 교육의 문턱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여 누구나 쉽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백성에게 물고기를 나누어주는 대신 물고기를 잡을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다.
한글의 열매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나 취할 수 있었다.
쉬운 한글 덕분에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문맹률을 가지고 있고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통해서 사회 계층 간 이동 사다리를 만들 수 있었다.
물고기를 잡는 법뿐 아니라, 물고기가 많은 곳으로 국민을 인도하는 것도 중요한 정부의 역할이다.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일을 말한다.
과거에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었을 때 자동차도 없는데 도로를 왜 만드느냐는 비판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자동차 산업이라는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정부에서 도로를 깔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정부가 규제 줄이면 알아서 잘된다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지난 몇 년간 도시 재생적 측면에서 특이할 만한 사항은 익선동의 부상이었다.
별것도 없는 낡은 도심 속 단층 건물 지역에 젊은이들은 새로운 가게를 창업했고 사람들이 모였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좁은 골목길이라는 독특한 공간 체험뿐 아니라 적은 돈으로 창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적은 돈으로 창업할 수 있게 되면
자연스럽게 좁은 면적에 밀도 높은 다양성이 만들어지고 좋은 도시가 된다.
약간의 리모델링만으로 창업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익선동 주택의 마당을 투명한 천장으로 덮고 실내로 바꾸어 사용한 불법 증축을
구청에서 적당히 눈감아 주었기 때문이다.
홍대 앞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말로, 정부가 규제를 줄였더니 알아서 잘되었다는 이야기다.
시대에 뒤떨어진 원칙을 고집하면
공무원은 열심히 일하고도 도시의 진화와 발전을 방해하게 된다.
정부가 세금으로 낡은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창업지원센터를 만들어
젊은이들에게 공짜로 사용하게 해준다고 창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프트웨어를 바꾸어 민간 자본이 투자되게 하는 것이 한 수 위 방법이다.
적은 돈으로 창업이 가능한 행정 소프트웨어로 업데이트해야 한다.
그래야 다양성이 만들어지고 경쟁을 통해 우수한 DNA가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린 뉴딜도 행정·법규 업그레이드 필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우리나라는 하나도 받지 못했는데
이웃 나라 일본은 6차례 받았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우리나라는 대형회사 한 개가 아파트 단지를 설계해서 3000가구를 공급하는 데 반해,
일본은 지진 때문에 고층 아파트보다는 저층형 목조주택을 많이 짓기 때문이다.
목조주택 3000가구는
3000명의 다양한 건축주와 건축설계사무소 300개가 협업해서 다양성을 만들어낸다.
건축가 입장에서 보면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사무실을 창업할 기회가 300배나 높은 것이다.
다양성과 경쟁력에서 게임이 안 된다.
제대로 된 도시 발전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용적률은 유지하더라도 건폐율은 완화하고 주차장법을 바꿔도 된다.
모든 법은 그 시대에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소프트웨어일 뿐이다.
소프트웨어는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
그린 뉴딜도, 더 나은 주택 공급을 만드는 일도 세금을 쏟아부으면서 생색내기보다는
민간 자본이 투자될 수 있는 소프트웨어로 행정과 법규를 업그레이드하는 게 더 필요하다.
우리 시대에 홍길동은 많다.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세종대왕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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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24/20200724000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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