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백선엽 장군

colorprom 2020. 7. 21. 13:40

 

 

[朝鮮칼럼 The Column] 백선엽의 마지막 전투

 

조선일보

 

 

 

입력 2020.07.21 03:20 | 수정 2020.07.21 03:43

마이클 브린 前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한국, 한국인' 저자

 

대한민국 최초 4성 장군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얼마 전 100세를 일기로 별세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하지만 그에겐 아직 마지막 전투가 남아 있는 듯하다.

친일 부역자(친일파) 논란이다.

 

여당은 이른바 '친일파 파묘법'까지 예고하면서 노병의 마지막 가는 길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든 '부역자(collaborator)'를 기리는 곳은 당연히 없다.

그렇다면 백 장군이 정말 부역자였는지만 따지면 된다. 어렵지 않다.

부역자란 무엇이며 백 장군이 부역 활동을 정말 했는지 보면 된다.

부역자란 원래 전시(戰時)에 자국을 침공한 적국을 도운 사람들을 뜻한다.

동기나 정황은 중요하지 않다.

 

장군은 1940년대 만주군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했다.

그런데 후기 간도특설대는 (백 장군 조국인) 대한민국을 상대로 싸운 부대가 아니다.

사실 당시 대한민국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자랐고,

20대 남성인 다른 조선인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벌이는 전쟁에 동원됐다.

동시에 그는 6·25전쟁 영웅이다.

그의 장군으로서 용기와 영향력은 남달랐다.

반대파들은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6·25전쟁이 일어나

친일 군경(軍警)들을 뿌리 뽑지 못한 게 아쉽다고 지적한다.

그건 (전쟁 영웅에 대한) 질투에 지나지 않는다.

백 장군이 부역자가 아닌 이유는 크게 3가지다.

첫째, 앞서 말했듯 일본 군대에서 복무했다는 게 부역의 증거는 아니다.

만주 제국군은 대한민국을 침공하지 않았고 백 장군도 자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다.

간도특설대는 주로 중국 공산당 게릴라들을 뒤쫓았고,

백 장군은 적을 거의 보지도 못했으며 실제 전투를 겪지도 않았다고 회고했다.

둘째, 지금 반대파들이 악용하는 부역 기준은 정부 스스로 세운 원칙에도 어긋난다.

노무현 정부에서 만든 일제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일본군 교도관으로 일하면서

가혹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전범(戰犯)으로 분류된 조선인 83명을 사면했다.

그들이 신분이 그랬을 뿐이지 실제 전범으로 볼 수 있는 행위를 안 했다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백 장군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간도특설대에 소속되어 있었을 뿐이지 친일 부역 행위를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원래 신분이 어떠냐를 들어 처벌하는 건

북한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에선 있을 수 없다.

 

셋째, 백 장군 반대 세력은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은 운동장을 옮겨 놓고 논쟁을 벌인다.

가만 생각해보자.

나라란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우리 정체성을 확립하고 가치를 세우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의 총체다.

백 장군이 어렸을 때 대한민국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25세 때 해방됐지만 바로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는 이후 목숨을 걸고 다른 반쪽을 지켰고, 그때 대한민국은 겨우 건국 18개월에 불과했다.

전후 정치적 좌파들은 여전히 1920년대 일제강점기 실체도 불분명한 그 나라에 집착한다.

그건 엄밀히 말하자면 상상 속에 존재하는 조국이다.

그 뒤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풍요한 나라를 일군 대한민국의 실제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다.

그런 상상 속 국가관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온갖 소동을 일으킨다.

우호적인 무역 상대국 일본을 악마로 만들면서 세계 최악 국가인 북한엔 더없이 친절하다.

 

이런 가치관 속에 살다 보면 일제강점기에서 일본군 소속이었던 조선인은

모두 친일파이고 전범일 수도 있다.

그럼 일본군으로 징집됐던 조선인들을 모두 총살대에 세워야 할까.

지금 한국에선 이런 두 가지 국가관이 충돌하고 있다.

정부는 이런 논쟁을 해소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지도자라면 대한민국이란 어떤 나라이며 무엇이 역사적 진실인지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어느 정도 설명이 됐다면 이제 한국 국민들은 대한민국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정말 존경받는 군인 중 한 사람을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장군 유해를 대전에서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면 한다.

그가 그곳에서 정말 편히 잠들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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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석 칼럼] 문 대통령, '태어나선 안 될 나라'의 대통령인가

 

조선일보

 

입력 2020.07.18 03:20

 

백선엽이 낙동강 전선서 무너졌다면 5000만 국민 '飼育된 짐승' 됐을 것

강천석 논설고문

 

백선엽 장군은 1950년 김일성과의 전쟁에서 낙동강 전선을 지켜낸 인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태어나기 전 일이다.

그가 이끄는 사단이 무너졌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함께 싸웠던 미국군은 그가 영웅인 줄 안다.

뒤에 태어났어도 그때 대한민국을 지켜낸 과정과 의미에 대해 손톱만큼 관심이 있다면

백 장군의 역할을 모를 리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청와대·민주당·국가보훈처를 비롯한 정부 부처장(長)·어용(御用) 단체들은

백 장군이 작고하자 일제히 짐승 소리를 냈다.

 

짐승이 사람 말을 하는 걸 변고(變故)라고 한다.

사람이 짐승 소리를 내면 상서(祥瑞)롭지 않다고 한다.

양쪽 다 흉(凶)한 징조로 친다.

대한민국은 겉은 민주공화국이고 속은 '대통령공화국'이다.

여당 의원 180명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대통령 뜻과 어긋나게 행동할 수 없다.

일종의 유일(唯一) 체제다.

이 체제에서 대통령의 뜻이 추모(追慕)에 있는데도

정부기관과 관변 단체들이 대통령 뜻을 헛짚고 짐승 소리를 낸다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청와대는 변명용(用) 모범 답안을 마련해 놓았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그것이다.

실제 대통령은 장례 기간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다.

침묵(沈默)도 소리다.

침묵마다 뜻이 다르다.

박원순 서울시장 자진(自盡) 사건에 대해서도 청와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직하게 답변해 보라.

'백 장군에 대한 대통령 침묵'과 '박 시장에 대한 대통령 침묵'은 뜻이 같은가 다른가.

대통령이 김일성과의 전쟁에서 국가를 보위(保衛)한 백 장군의 공로를 숙지(熟知)하고 있는데도

장군 묫자리에 떼도 입히기 전에 국가보훈처

대통령 뜻을 어겨가며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팻말을 달았다는 말인가.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고 나라를 보위하며…'라는 선서를 하고 취임했다.

그런 대통령이라면 장군이 김일성과의 전쟁에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국가를 보위했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국민에게 당당하게 제시해야 마땅하다.

장군은 1920년생이다.

나라가 망하고 10년 후에 태어났다.

끼니를 잇지 못한 홀어머니가 삼 남매와 함께 세상을 버리려고 할 정도로

어려운 살림이었다고 한다.

 

현 정권은 그의 일본군 복무 이력을 문제 삼고 있다.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했고 일본 패망 때 계급이 중위였다.

특히 1943년 2월부터 45년 1월까지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면서 독립군을 토벌했다고 비난한다.

사실과 다른 비난이다.

1943년 만주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현 정권 핵심부 NL 계열들이 1980년대 '백전백승의 상승(常勝) 장군'이라고 학습했던 김일성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도피했고 42년 그곳에서 김정일을 낳았다.

1943년에도 만주에 토벌할 독립군이 있었다면

40년에 만주를 이탈한 김일성겁쟁이였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대통령의 침묵에 깔린 뜻을 짐작할 단서가 있다.

대통령은 작년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해군은 3군 가운데 일본군 출신이 아닌 우리 힘으로 만든 최초의 군대'라고 했다.

육군과 공군은 정통성이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아는지 모르겠지만 좌파들이 펴는 다음 단계 논리는

'그래서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이런 논리에 승복(承服)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믿는다.

대통령은 역사의 영광만 곶감 빼먹듯 누리는 자리가 아니다.

좌절과 오욕(汚辱)의 역사도 온몸으로 걸머질 각오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뒤늦게나마

6·25 전후 희생된 지리산제주도 지역 주민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데 합의한 것은

나라가 그들을 지켜줄 수 없던 당시 현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낮에는 대한민국이 다스리고,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통치하는 상황 속에서

주민들에게 외부의 힘이 강요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정상적으로 물을 수 없다는 합의다.

장군은 스무 살에서 스물다섯 살에 이르는 나라 잃은 청년의 전력(前歷)을

감추거나 미화(美化 )한 적이 없다.

좌파의 주장대로 그게 씻을 수 없는 허물이라 해도

장군이 그때 낙동강에서 무너졌더라면

5000만 대한민국 국민은 지금 금수산 궁전에서 90도 허리를 꺾어 경배(敬拜)하는

사육(飼育)된 짐승의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걸 막아준 것만으로 그는 허물과 빚의 몇 천 배를 나라와 국민에게 갚았다.

대통령은 어른스러운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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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백선엽은 '이순신'의 대한민국 버전이다

 

조선일보

 

  •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입력 2020.07.14 03:18

 

친일 굴레 논란, 팩트와 달라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언론인이었던 나는 2009년 10월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중앙일보 지면에 그 내용을 1년 2개월 동안 회고록 형태로 실었다.

이후 올해 초 병상에 눕기까지 그의 기억을 줄곧 들었다.

6·25 전쟁, 휴전 뒤 진행한 한국군 현대화의 험난한 여정에서 그가 쌓은 업적은 정말 대단했다.

'이런 인물이 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으로 시작해 나는 관련 저서 8권을 냈다.

장군의 서거로 그의 전적과 업적이 잘 알려지고 있어 여기서는 더 적지 않는다.

인터뷰 전 그의 행적 중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만주군 경력, 특히 '간도 특설대'였다.

이 부분의 문제가 크다면 나는 회고록을 오롯이 집필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정말 간도 특설대라는 곳에서 독립군을 '잔인하게' 토벌했을까.

당시 만주에는 독립군, 나아가 항일 무장 세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곧 알았다.

193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만주는 일본의 강력한 관동군 통제 아래에 들어선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무장 항일은 거의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43년부터 해방 전까지 그는 그곳에서 일했다.

독립군은 눈에 띄지도 않았고, 그저 중국 공산당계 팔로군(八路軍)의 뒤를 쫓는 업무에 종사했다.

그마저도 팔로군을 찾을 수 없어 그가 속한 부대는 당시 베이징(北京) 인근 열하(熱河)까지 진출했다.

정보 수집과 대민 선무(宣撫)가 주된 작업이었다.

그러나 또 사람들은 묻는다. "왜 하필이면 일본군 앞잡이인 만주군에 투신했느냐"고.

그 점도 생각해봤다.

강점기 막바지 일본은 태평양 전쟁까지 꿈꾸면서 세계 최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일본을 향한 저항도 필요했지만, 그 속을 잘 살펴 저들의 힘을 제대로 알아가는 일도 중요했다.

1920년 출생한 그는 나라를 직접 일본에 빼앗긴 아버지 세대와는 달랐다.

일본어를 교과과정에서 익혔고, 일본의 실재하던 힘에 주목하면서

그 바탕을 탐구하여 내 힘으로 앉혀보려는 실사구시 정신이 컸다.

따라서 그의 만주군 경력 모두는 그렇듯 크게 지적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명분과 의리'를 들이대며 친일(親日)과 부역(附逆)의 굴레를 그에게 뒤집어씌운다면

당시 일본 통치하에 남아 수도·전기·토목·군사·산업 등 모든 영역에서 일본의 역량을 학습하며

제 가정을 이뤄 오늘의 대한민국 정체성을 이룬 대다수의 한국인을 모독하는 일이다.

말년의 백선엽은 외로웠다.

김일성 군대 및 중공군을 막아낸 군공(軍功)과 한미 동맹의 큰 초석을 다진 업적은

함께 싸웠던 미군만이 제대로 평가했고,

그가 지킨 땅 안의 한국인들 상당수는 역설적이게도 그를 '반(反)민족'으로 몰았으니 말이다.

정부의 결정에 따라 6·25 전쟁 전우 12만여 명이 묻힌 동작동에 그를 안장할 수 없다.

대신 그는 대전 현충원에 묻힌다.

그의 공적에 견주면 유감천만의 일이다.

아울러 전쟁을 회고하는 우리 사회의 수준에 큰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10여 년 동안 인터뷰하면서 나는 그에게서 '이순신'을 읽었다.

명분과 의리에만 집착하는 정치권과는 달리 실재 하는 힘에 주목하면서 싸움터에 끝까지 남아

적을 상대했던 조선의 명장 말이다.

백선엽은 달리 말하자면, '보통명사 이순신'의 대한민국 버전이다.

북한의 위협, 한반도의 국제정치적 불안정성을 감안하면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이순신'이 필요하다.

착실하게 힘을 쌓아 나라와 민족의 안전과 번영을 이끄는 인재 말이다.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영전에서 이 점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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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백선엽 장군이 현충원 못 간다면 더 이상 대한민국 아니다

 

 

조선일보

 

 

입력 2020.05.28 03:26

 

국가보훈처6·25 전쟁 영웅백선엽 예비역 대장 측에

"장군이 돌아가시면 서울 현충원에는 자리가 없어 대전 현충원에 모실 수밖에 없다"면서

'국립묘지법이 개정되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라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고 한다.

지금 여권 일각은 '현충원에 안장된 친일파를 이장한다'는 내용의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친일파 낙인은 자신들이 찍는다. 이들이 친일파로 매도하는 백 장군이 사후(死後) 현충원에 안장되더라도 뽑혀나가는 일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보훈처 측은 "단순히 법 개정 상황을 공유한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현충원은 안 된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백 장군 측도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100세 호국 원로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조국에서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 충격적이기에 앞서 두려운 일이다.

백 장군이 6·25 때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지 못했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다. 백 장군 현충원 안장을 막는 민주당 국회의원들도 당연히 없다. 백 장군은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 최대 격전인 다부동 전투에서 8000명의 병력으로 북한군 2만여명의 총공세를 한 달 이상 막아냈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도망치려 하자 백 장군이 맨 앞에 나서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고 독려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미군에 앞서 평양에 입성했고, 1·4후퇴 뒤 서울 탈환 때도 최선봉에 섰다. 6·25의 살아 있는 전사(戰史)이자 전설이다. 그는 국군 창설에 참여했고 휴전회담 대표를 지냈으며 한국군 최초 대장에 올라 두 차례 육군참모총장을 맡으며 군 재건을 이뤄냈다. 이런 백선엽을 미군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한국군 장교' '최상의 야전 지휘관' '참모와 지휘관 모두 탁월'이라고 평가했다. 주한미군 사령관들은 취임하면 백 장군을 찾아 전입신고를 했다. 단순한 '한·미 동맹의 상징'이 아니었다. 백 장군을 군 작전가로서 존경했다.

그런데 여권 지지 세력은 나라를 지킨 백 장군을 깎아내리기만 한다. 그의 공훈에는 눈을 감고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 복무한 기록만 부각시켜 '독립군 토벌 친일파'라고 한다. 이렇게 친일파 공격을 하는 사람들일수록 정작 자신의 부모가 진짜 친일파인 경우가 숱하게 드러났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백 장군이 "당시 중공 팔로군과 싸웠고 독립군은 구경도 못 했다"고 했으나 이는 외면한다. 이 정부 광복회장은 "백선엽은 철저한 토착 왜구"라고 했고, 현 청와대 정무비서관은 백 장군을 '민족 반역자'로 불렀다. 문재인 대통령은 백 장군 같은 사람이 아니라 남침 공로로 북한에서 중용된 인물을 국군의 뿌리라고 했다. 육사는 백 장군 활약을 그린 웹툰을 홈페이지에서 삭제했다. 그의 훈장을 박탈하자는 주장이 나오더니 이제는 현충원 안장까지 시비 거는 것이다.

이들이 백 장군을 공격하는 진짜 이유는 그가 친일파여 서가 아니라 6·25 때 공산군과 싸워 이겼기 때문일 것이다. '친일파'라는 것은 대중의 반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현충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의 안식처다. 백 장군이 현충원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더 이상 대한민국이 아니다. 6·25 때 백 장군의 지휘 아래 목숨을 바친 12만명의 국군 선열이 통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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