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魚友야담] 최종교열자를 보내며
조선일보
입력 2020.06.27 03:00
[아무튼, 주말]
어수웅·주말뉴스부장
서랍 하나를 한 층으로 치자면, 그 납골함은 9층에 있었습니다.
서울의 한 성당이 직접 관리하는 '평화의 쉼터'.
6000기를 안치한다는 납골당은 참으로 고요하더군요.
가족끼리만 장례를 치르고 일주일 뒤에야 부고를 냈던,
출판사 까치글방 박종만(1945~2020) 대표 이야기입니다.
시인이나 소설가 같은 창작자도 아니고, 커튼 뒤 편집자의 부음을 왜 대중에게 조명하는가.
뭐랄까요. 아날로그 시대의 '쟁이', 그리고 그 기품 있는 소멸을 알리고 싶었달까요.
고인의 별명 중 하나는 최종교열자입니다.
까치에서 낸 모든 책의 최종 책임을 본인이 졌다는 거죠.
지명 표기 때문에 그 나라 대사관에 연락했다는 이야기는 일부입니다.
교정교열은 단순히 오탈자 바로잡는 일을 넘어서죠.
차병직 변호사의 푸념을 기억합니다.
처칠에게 노벨문학상의 영광을 안긴 '제2차 세계대전' 번역을 박 대표 제안으로 시작했는데,
처칠의 세계관과 맥락, 하다못해 연설의 뉘앙스까지 개입하더라는 거였죠.
각자 원칙을 고집하다 보니, 한때 번역 중단 선언도 있었다죠.
차 변호사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화계 인사들의 '간증'을 기억합니다.
박 대표가 늘 옳았던 건 아니었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독자의 자산으로 남았던 토론들.
앉는 게 불편해지면서는 스탠딩 데스크에서 서서 교열을 봤다고 했죠.
아날로그 세대의 소멸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까치의 책 표지는 종종 애서가들의 애정어린 놀림거리였죠.
참으로 '일관된 표지디자인'.
명조체 계열 활자로 중앙정렬된 제목, 그다음 줄에 약간 작은 글씨로 저자 이름,
다시 아랫줄에 조금 더 작은 글씨로 번역자, 그리고 맨 아래 가장 작은 글씨의 '까치'.
세련됨과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책을 표지로 판단하지 말라'는 금언(金言)의 대표적 모범 사례였습니다.
대학 시절, 까치가 없었다면 제 독서가 얼마나 가난했을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SNS시대, 많은 이들이 자신의 서가에 꽂혀 있던 까치의 책을 꺼내 책탑을 쌓고
사진을 찍어 올리며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더군요.
마지막으로 하나 더.
받는 사람에게도, 돈에도 예의가 아니라며
구겨진 헌 돈을 수십 년 동안 다림질했던 고인을 기억합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도 편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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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26/20200626026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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