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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공정·평등·민주… 왜 '오염된 언어'가 됐나

colorprom 2020. 6. 22. 14:31

[태평로] 정의·공정·평등·민주… 왜 '오염된 언어'가 됐나

 

조선일보

 

 

 

입력 2020.06.22 03:16

언어는 白紙, 물들기 쉽기 때문… 의도 가지고 선점하면 얼룩 묻어
현 정권은 가치지향 어휘도 망쳐 "시민·진보 등 걸러야 할 단어 돼"

어수웅 주말뉴스부장

 

 

얼마 전 정경심 교수 관련 재판에서 마음에 남은 대목이 있다.

그가 '문학도의 상상력'을 언급했을 때다.

 

횡령·업무방해·증거 은닉 등 10여 개 혐의 때문에 언뜻 상상하기 힘들지만,

사실 정 교수는 영문학자이다.

그의 휴대전화에 이런 메모가 적혀 있었다.

"코링크 8 예상 수익(〉10%) 6000. 유안타 2000, 시티 40000〉42500…."

왜 이런 고유명사와 숫자들이 있냐고 검찰이 물었을 때,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의미 없는 숫자·상상의 나래… 저는 어렸을 적부터 문학도라 상상력도 있다…."

문학이 무슨 죄로 이런 횡액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일도 있었다. 주말 섹션 '아무튼, 주말'에서

평생 번 돈 12억을 대학교에 기부한 84세 김병양씨 인터뷰를 실었을 때다.

50년 동안 명품을 수선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명품 하나 없는 검소한 할아버지였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댓글이 눈에 띄었다.

"기부를 왜 하나, 윤미향 봐라." "뜻은 찬란한데 잘못 판단하셨다."

선량한 추상명사 '기부'는 이렇게 오염되어 있었다.

언어는 사실 백지다. 희고 깨끗해서가 아니라 다른 색으로 물들기 쉽다는 의미다.

아무리 가치중립어라도 의도를 가지고 선점하면 오염은 시작되기 마련.

북이 점유한 '동무'와 '인민', 점점 얼룩이 번지는 '힐링'과 '가족'을 보자.

 

치유를 기대하며 힐링을 검색할 때 등장하는 수백 개 리스트는

예외 없이 체형 관리·피부·마사지·지압 업체다.

갈빗집 구인 광고 '가족처럼 일할 분 구함'에 알바깨나 해본 젊은 세대는 이렇게 야유한다.

최저임금 미달하는 박봉과 초과근무의 동의어라고.

녹색 성장의 '녹색'과 창조 경제의 '창조'가 야유의 대상이 됐던 이전 정권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가치중립적 단어의 오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치지향적 단어, 심지어 진리와 도리의 언어가 오염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 문제이다.

지지하지 않던 이의 박수까지 이끌어냈던 대통령의 취임 연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제 비아냥의 문장이다.

진중권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기회는 아빠 찬스입니다. 과정은 엄마가 맡았습니다. 결과는 뻔했습니다."

평등·공정·정의는 이렇게 조롱의 대상이 됐다.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동의하기 힘들겠지만,

최근에는 일반 국민까지 비웃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상황은 더 심각하다.

온라인 시험의 집단 부정행위로 0점 처리된 연세대·서강대·인하대 의대 학생들은

이렇게 빈정댔다고 한다.

'조국 대리 시험'은 오픈북이고, 우리는 커닝이냐.

미국 대학 다니던 아들의 온라인 시험 답을 대신 써줬다는 조국 전 장관과

이를 '오픈북 시험일 뿐"이라고 옹호한 유시민 작가에 대한 야유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900만원을 기부한 한양대 여대생은

이제 '정의'라는 단어를 보면 멈칫한다고 했다.

"변명으로 일관하는 정의연·나눔의 집정의는 허울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기부금 반환 소송을 하겠다는 것이다.

 

공수처 설치와 관련, 당과 다른 소신을 가졌다는 이유로 공천은커녕 징계까지 받은

금태섭 전 의원 사태에 대한 반응은 10글자였다.

"민주당에 는 민주가 없다."

급기야 이런 놀림까지 등장했다.

"요즘은 믿고 걸러야 할 단어들이 있다. 정의 공정 평등 민족 시민 논문 기부 운동 진보…."

성인이 되면 쑥스러워서라도 진리와 도리에 관한 각자의 어휘 사전 두께는 얇아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타인의 오염 때문에 언어를 빼앗기는 건 다른 문제.

평등·공정·정의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횡액을 당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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