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이문열 작가

colorprom 2020. 6. 1. 15:10

하주희의 라운지

이문열 작가

“나라가 망하기 전에 말(言)이 먼저 망했다”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조준우 객원기자

 

‌⊙ 3000만 권 이상 판매한 한국의 대표 작가 이문열
⊙ 젊은 시절 역사책 즐겨 읽어, “좋은 역사책은 대단한 문학책”
⊙ 그의 말을 빌려 국민에게 메시지 전한 역대 대통령들
⊙ 황장엽의 여정 담은 ‘매의 노래’ 쓰려 했지만…
“不問이 전염되고 있는 시대, 이상한 마비가 퍼지고 있다”

李文烈
1948년생. 서울대 사범대 수학 /

197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사람의 아들》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영웅시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변경》 등 / 오늘의 작가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동리문학상 수상

 

문득 최창조(崔昌祚)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좋은 곳입니다.”

지금 찾아가는 곳이 풍수로 봐선 어떤지 묻자 건너온 즉답이었다.

지난 5월 4일 경기도 이천 장암리에 있는 ‘부악문원(負岳文院)’에 가는 참이었다.

 

최창조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는 광복 이후 최초로 한국적 풍수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풍수연구가다.

징검다리 연휴의 한중간이어서인지 고속도로엔 차가 거의 없다.

서이천IC를 나와 차창 밖에 펼쳐지는, 여느 국도변과 별다른 것 없는 무표정한 풍경을 5분쯤 지켜봤을까.

이정표가 보인다. 표지판을 따라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오르면 부악문원, 작가 이문열(李文烈,·72)의 공간이다.


한국 대표 작가의 서실

 
한때 사숙으로 쓰였던 문원 건물. 지금은 창작 레지던스로 쓰이고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은 문원이다. 3층 규모에 가로로 긴 형태다.

한때 사숙(私塾)으로 쓰였다. 지금은 작가들의 창작 레지던스로 사용된다.

문원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니 안채가 보인다. 이 작가 부부가 기거하는 곳이다.

다시 조금 더 걸음을 옮기면 서실이다.

세 건물이 정원을 감싸는 식이다.

곳곳의 푸른 잔디와 꽃나무 때문일까. 전체적으로 부지가 꽤 넓은데 풍경이 위압적이지 않다.

서실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역시 책장이다.

접객실 격인 거실의 벽을 따라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이 꽂혀 있다.

책장 가장 위쪽에 닿을 수 있게 돕는 사다리도 설치되어 있다.

 

집필실로 쓰이는 방으로 들어가봤다. 넓은 책상과 그 위에 놓인 컴퓨터가 보인다.

《시인》(1992), 《사람의 아들(장편개작)》(1985),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 《변경》(1986~1998),

《불멸》(2009) 등 수많은 명작이 탄생한 공간이다.

이문열 작가는 인터뷰 날짜가 헛갈렸다고 한다. 불시에 들이닥친 격이 돼버렸다.

주인이 손님맞이에 부산해진 틈을 타 서실 여기저기를 마음대로 힐끔거려본다.

공간 구성이 그야말로 소박하고 실용적이다. 가구며 장식에 일부러 멋을 부린 흔적이 거의 없단 얘기다.

굳이 꼽자면 한쪽 구석에 놓인 작가의 흉상 정도다.

그마저도 뽐낼 의도는 전혀 없다는 듯 모르는 척 시선을 비킨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이문열이 누구인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책을 판 작가다. 누적 판매량이 3000만 권을 넘는다.

단순 계산으론 한국의 모든 집에 그의 책이 적어도 한 권 씩은 꽂혀 있는 셈이다.

판매량으로 작가를 표현한다는 게 피차 민망하지만, 가장 품이 적게 드는 설명이지 않나.


장서 2만 권은 고향으로

 
접객실로도 쓰이는 서실의 거실. 책장과 사다리가 보인다.

인터뷰를 청한 명목적인 계기는 《삼국지(三國志)》였다. 지난 2월 개정판이 나왔다.

그가 평역한 《이문열의 삼국지》는 한국의 ‘삼국지 열풍’을 견인했다.

출간 이후 30여 년간 2000만 권 이상 팔렸으니 말이다.

 

그 이상 팔린 책은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 정도다(4600만 권).

이번 《삼국지》 개정판은 전체적으로 읽기 쉽게 문장을 다듬고 주석을 보충했다.

한자어의 독음과 뜻을 보태는 식이다.

그는 《삼국지》 덕에 ‘잘 지냈다’며 ‘고마운 책’이라 표현했다.

판매고도 그렇지만 오랫동안 꾸준히 사랑받았으니 경상비 정도는 늘 부담해준 책일 터다.

막상 그 책을 집필할 때는 ‘막 등단한 신예가 이런 거나 하고 있나’ 싶기도 했단다.

 

박맹호 민음사 회장의 강력한 권유로 30대 중반의 황금 같은 4년을 들여가며,

자의 반 타의 반 낳은 책이 오래도록 그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가만히 책장을 훑어보니 어딘지 헐거워 보였다.

알고 보니 서실의 책 말고도 방마다 빈틈없이 서 있던 서가를 통째로 고향 집으로 옮겼단다.

평생 모아온 1만2000권의 책과 이런저런 경로로 함께하게 된 책 2만여 권이

지금은 경북 영양군 두들마을에 가 있다.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났지만, 그에게 고향은 두들마을이다.

그 마음을 그는 어느 산문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내 고향은 분명 영양군 석보면 원리동이지만 불행히도 그곳에서 태어나는 인연을 갖지 못했다.〉

영양군은 그곳에 이문열 문학관을 짓고 있다.

부악문원에 남아 있는 손글씨 원고나 책들도 두들마을로 옮겨질 수 있단다.


다섯 번째 개정판 내는 《사람의 아들》

 
《사람의 아들》의 친필 원고.

서실 책상 위엔 《사람의 아들》이 놓여 있다. 1979년 출간된 그의 출세작이다.

그에겐 ‘오늘의 작가상’을 안겼고, 독자들에겐 ‘이문열 시대’의 시작을 일깨워줬다.

‘오늘의 작가상’ 수상 당시 그는 《사람의 아들》을 쓰기 위해 성경의 구약과 신약을 모두 10번 읽었다고 했다.

이번에 개정판을 내기 위해 원고를 다시 손봐서 넘긴 참이라고 했다.

― 집에 책장이 아예 없으면 모를까, 《사람의 아들》이 안 꽂혀 있는 집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책은 많이 팔았어요. 이번에 다시 손보는데 그렇게 많이 팔렸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나 자신과 함께 성장한 작품입니다.

원래는 스무 살 무렵에 최초의 형태로 200자 원고지 30~40매의 서사시로 왔어요.

그러다 서른 살 무렵에 중편소설이 되어 그걸로 등단했고, 다시 6년 뒤 장편으로 바뀌었어요.

그 후에도 여러 번 고쳤습니다.

자료가 쌓이고 사고가 깊어지면서 보완된 것도 있어요. 이번이 다섯 번째 판이에요.”

― 작품 중에 가장 많이 고치신 작품이지요. 왜 거듭 고치셨나요.

“설익었을 때 써서 얘기가 좀 얼룩덜룩하다고 할까,

처음 생각과 나중 생각 간의 간극이 매끄럽게 메워지지 못했다고 느껴졌어요.

그럴 때마다 손을 봤습니다.

1960년대 후반, 1970년대만 해도 한국의 신학 지식이라는 게 굉장히 한정되어 있었어요.

비교종교학과도 없고, 있어도 신학교의 하위 전공이었어요.

‘하나님 빼고 나머지는 엉터리다’라는 걸 증명하는 정도밖에는 역할을 못 하는 거죠.

실제로는 각기 독립된 신을 그야말로 비교연구하는 게 비교종교학이지요.”

― 그럼 어떻게 필요한 지식을 접하셨어요.

“소설에 기독교의 제설혼합주의(諸設混合主義)적인 자취를 담으려 했어요.

각기 다른 종교, 이를테면 배화교에서 이런 요소, 아시리아 종교에선 저런 요소 하는 식으로 합쳐지는 게

제설혼합주의인데, 그러려면 제대로 된 비교종교학을 알아야 했습니다.

종로서적 외서부가 제 기능을 한 게 1970년대 후반부터예요.

그때부터야 정보가 축적돼 책이 자꾸 자랐지요.”

― 믿는 종교가 있으세요.

“없어요. ‘신이 있냐’고 물으면 ‘있다’고 답할 겁니다.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신이 없는 마구잡이 세상에 던져져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살기보단,

운전사가 있는 세상에서 사는 편이 안전하지 않겠어요?

‘이건 안 된다, 저건 된다’고 하는 신이 아니라 처음과 끝을 총괄하는 원리 같은 존재 말입니다.”

― 사람은 모두 죽잖아요. 죽은 후엔 그럼 어떻게 될까요.

“모르지요. 사실은 굉장히 궁금했는데, 요즘은 별로 궁금하지 않아요.

어차피 저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고,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목을 지어야 소설이 출발”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레테의 연가》….

이문열 소설의 매력엔 제목의 지분이 꽤 크다. 제목만으로 눈길을 잡아끄는 몇 안 되는 작가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제목 자체가 일종의 잠언, 혹은 격언이 돼버렸다.

단어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누구나 아는 말들인데, 합쳐진 결과는 영 다른 문장이다.

한동네에서 고만고만 비슷하게 자란 친구가, 어느 날 눈에 띄게 세련되고 우아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만 같다.

이런 제목은 어떻게 나오는 걸까, 궁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 제목은 매번 직접 지으시지요.

“저는 제목 짓고 첫 장 쓰면 절반 쓴 겁니다.

제목을 지어야 소설이 출발해요. 방향도 생기고 쓸 말이 수합(收合)이 되니까요.

누가 그래요. 제목을 지으면 제목에 묻혀서 자꾸 헛갈린다고요.

 

재밌는 게 윤흥길 선배는 저와 딱 반대 경우입니다. 절대 제목을 먼저 안 짓고, 소설 다 쓰고 짓는대요.”

― 신문사에서 편집기자 생활을 한 게 도움이 됐을까요.

“그럴 수도요. ‘미다시’ 뽑는 훈련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미다시하고는 또 달라요.”

‘미다시’는 신문 기사의 제목을 가리키는 일본식 은어다.

― 제자들도 가르쳐보셨잖아요. 문장은 타고나는 건가요, 만들어지는 건가요.

“같이 어우러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타고나기만 하는 작가도 있을 수 없고, 없는 걸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도 어렵지요.

문학적인 아름다움, 소설의 심미성을 보는 눈을 갖고 태어난 후,

그 아름다움을 형성하고 수립해가는 과정을 나중에 익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지요.

보는 눈이 있다고 해서 다 그걸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좋은 문장 쓰려 문장 암송

― 문장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어요.

“결국 좋은 문장을 많이 보는 것, 익숙해지는 것.

어린애가 ‘엄마’라는 말을 할 때도 얼른 봐선 어느 날 갑자기 ‘엄마’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적어도 몇천 번 이상 듣고, 몇천 번 이상 속으로 연습해본 후에야 ‘엄마’ 한다는 거예요.

간단하게 나오는 것이 아니란 거죠.

 

문장이란 것도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생각을 정리하는 방식, 그 생각이 나타나는 형태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같은 걸 키웁니다.

그걸 막상 드러낼 때는, 말은 나만 쓰는 게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 그걸 드러냈는가를 봐야지요.

흉내도 내보면서, 결국 말을 만들어나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역시 독서가 중요하겠네요.

“사실 저는 좋은 문장을 많이 외웠어요. 외우려고 애를 썼고, 암송에 강하기도 했어요.

예전엔 문장을 줄줄줄 외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들이 다 문장가가 된 건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머릿속 생각을 문장 혹은 말로 엮는 것을 연습해보는 것,

그런 기억을 많이 가지는 것, 그게 유리하긴 할 겁니다.”

― 어떤 문장을 추구하셨나요.

“하다 보면 선호하는 유형이 생기게 됩니다.

단문체와 만연체(蔓衍體), 간결체와 화려체. 각자 개성에 따라 달라지는데,

나는 아무래도 만연체와 화려체 계통의 장식이 많고 인공적으로 길어진 문장을 좋아했어요.

자연적이라는 건 길지 않거든요.

새소리가 쪼르르르 이어지는 것 같지만 단조로운 소리가 반복되는 거잖아요.”

흔히 그의 문장을 의고체(擬古體), 즉 옛 말투나 어휘를 사용하는 고풍스러운 문체라 분석한다.

반쯤 맞는 말이 아닐까 싶다.

‘엄석대’의 말투와 《선택》의 주인공 안동장씨의 말투가 다르듯, 그는 다양한 문체에 도전해왔다.

밑천이 되는 어휘의 양과 질을 늘려 더 아름답고 다양한 표현을 길어 올리기 위한 방편으로

한자어를 다른 작가에 비해 많이 구사했을 뿐이다.

― 첫 소설을 준비하며 어떤 작가의 문장을 즐겨 읽으셨나요.

“찾아 헤맬 때니까,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읽었지요.

나중에 문체, 문장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문청이라 할 정도로 하나의 지향이 생긴 뒤에는

장중한 문장을 좋아했어요.

만연체. 장중하고 강건한 문장을 쓰는 작가들을 좋아했던 거 같아요.

문학이 아니라도 어떤 말에든 문체는 있는 법이니까요.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Gibbon)의 문장은 길고 장중해요.

원문 한 문장을 번역해놓으면 어떨 때는 200자 원고지 한 장이 넘을 때가 있어요.”


좋은 역사책은 대단한 문학책

 
이문열 작가가 부악문원에서 문하생들과 고전 공부를 하고 있다. 1999년의 모습. 사진=조선DB

― 책을 보통 정독하시나요.

“책에 따라 다르죠. 어떤 책은 정독하면 시간만 걸리고 남는 게 없는 경우도 있어요.

남독(濫讀)으로 대충 읽어서 정보의 위치를 파악해두고 나중에 정밀한 정보가 필요할 때,

기억을 더듬어 자세히 읽어 보면 진짜 원석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거죠.

길은 돌지만 그런 정보는 오래가죠.”

― 고전을 그렇게 읽어도 될까요.

“사서삼경을 읽으려면 오래 걸립니다. 사서만 읽어도 길면 몇 년, 짧아도 1년 이상이에요.

번역해놓은 걸 촤라락 읽어놓고, 어떤 얘기가 어디에 있다는 걸 파악한 정도가 되면,

나중에 그 부분을 찾아서 다시 읽게 돼요. 이때는 인용할 수 있도록 정독하는 거죠.”

― 계획을 세워서 책을 읽으셨나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열아홉, 스무 살 때 역사책을 많이 읽었어요. 제일 읽기 쉽고 재밌잖아요.

과학책을 읽겠어요, 수학책을 읽겠어요? 학교 안 다닐 땐데 역사 아니면 소설이었죠.

작가가 되기 전까진 문학보단 역사나 종교철학 같은 다른 분야를 더 많이 읽었어요.

손해 본 장사는 아니었어요. 딴짓한 것보단 나았으니까요.

역사책이 사실은 많이 문학적이죠.

좋은 역사책은 대단한 문학책이기도 하잖아요.”

― 역사가의 문장에서 영향을 받으셨겠네요.

“어떨 때 잠이 안 오면 《로마제국 쇠망사》를 번역하곤 했어요. 1시간 번역하면 잠도 잘 와요.

장절이 길긴 하지만, 어려운 단어를 쓰지도 않아 번역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도 좋아요. 역사와 문학의 중간쯤 되지요.”

― 동아시아 역사가라면 어떨까요.

사마천은 역사가이기 이전에 좋은 문장가예요.

동양의 한문틀 안에서 사마천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없을 거예요.

대부분 거기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문장이라고 하는 건, 한 틀에 얼마나 생각을 조리 있고 화려하며 웅장하게 담느냐 하는 거예요.”

― 글을 잘 쓰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독서라면 나머지는 뭘까요.

“결국 삼다(三多)겠지요. 많이 읽고(多讀), 많이 생각하고(多商量), 많이 써보고(多作).

중국 사람들이 어떤 걸로는 세상의 핵심을 찌르는데, 삼다 같은 건 어느 시대나 통할 거예요.

단지 순서를 지켜야 하겠지요.

처음부터 생각만 많이 하고 적게 읽고 연습도 안 하는 사람도 있어요.

아는 건 되게 많은 거 같고 심각한데, 정리도 안 되어 있고 좀 이상하지요.”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하루키

 
작가의 작품 중 외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 중 하나인 소설 《시인》의 해외판.

한국에 이문열이 있다면, 일본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71)가 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같은 해(1979)에 등단했고 나이도 한 살 차이다.

자국에서 크게 주목받은 후 비슷한 시기에 해외로 진출했다.

소설은 전혀 달랐다.

“늘 비교됐지요. 외국도 비슷한 시기에 때로는 같은 출판사에서 책을 내기도 했어요.

그랬는데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대번에 확 제치고 나갔지요.

그 친구의 특징이 있어요. 국적이나 특유의 특징을 없애요. 주인공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어요.”

하루키 소설의 일관된 무국적성은 일본 내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일본인이 쓴 미국 소설’이란 조롱도 있었다.

 

문학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하루키를 두고 이런 말을 했다.

〈하루키의 문학은 근대문학이 아니다. 단지 세계적인 상품일 뿐이다. 만화나 게임과 다를 게 없다.

일본 문학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문학비평을 완전히 그만뒀다.〉(2000년)

단순하고 반복된 서사 구조(주인공의 친구 중 한 명이 자살했거나 자살한다), 고유명사의 부재는

어쨌든 번역에는 용이했을 터다.

한국에 허다한 하루키 마니아들처럼, 기자도 하루키의 모든 소설을 다 읽었다.

특히 초중기 작은 뭐가 뭐였는지 헛갈릴 정도로 서사 구조가 유사하다.

―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보셨지요.

“데뷔 40주년 되는 해였나 누가 묻기에 구해서 봤어요.

내가 하루키를 질투하는 것처럼 될까 봐, 질투하는 사람은 안 돼야지 싶어서 열심히 봤어요.

여전히 신통치 않더라고.

세월이 그만하면 덜 철저해도 될 건데,

요리해서 먹는 대목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데 단 한 끼도 밥은 안 먹어요.

면 삶으면 파스타야, 아니면 스테이크.

일본 음악도 좋은 게 많은데 음악을 들으면 서양 클래식이나 세미 클래식.

이런 게 철저함일까. 너무 그러니까 경상도 말로 곤지러워요.”

당사자도 없이 판을 까는 건가 싶어 면구했지만, 하루키에 대한 그의 생각이 더 듣고 싶었다.

하루키의 작품이 한국 작가들과 독자들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다.

하루키 소설은 자조적이라고 할까요. 한동안 내부로 침잠하기만 하는 느낌입니다.

“그게 제가 별로 값을 안 치는 이유예요.

내부로 침잠하는 것도 굉장히 귀한 겁니다. 근데 얄팍해요.

침잠하는 척하면서 깊이 파내는 것 같은데 얕아요.

《태엽 감는 새》에서 러시아 포로 얘기를 끌어들이는데, 대단히 비극적인 얘기거든요.

그런데 그야말로 음습한 고뇌라든가 그런 건 없고

이상하게 자극적인 소재로 깔짝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젊었을 때는 내가 괜히 저 사람을 시기하는 것 아닌가 자기 성찰도 해봤는데

요새는 조심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버렸어요.

나도 이제 일흔 살인데 누굴 폄훼해봤자 나한테 뭐가 남겠어요.”

― 하루키 소설이 우리나라에서 대유행을 했지요.

“하루키한테 빠진 지망생들이 많았어요. 특히 2000년대 초반 신인 중에 많았어요.

심사하다 보면 ‘아 이 친구도 하루키 물 먹었구나’ 싶은 적이 많았지요.

요즘은 좀 덜해요. 나름대로 세련이랄까.

하루키한테 받은 영향을 티가 잘 안 나게 세련시킬 줄 알게 됐어요.”


탈권위적인 보수주의자

 
1995년 프랑스 문화성과 국립도서센터가 한국 작가 13명을 초청해 연 ‘한국문학포럼’에 참여한 이문열 작가(왼쪽 위).
파리의 한 서점에서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 사진=조선DB

한참 대화가 이어지다 얼핏 한 가지를 깨달았다. 작가 이문열은 권위적이지 않다.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한국의 70대들이 평균적으로 갖고 있는 만큼의 권위주의도 없었다.

외려 허세라든지 자만심, 권위적인 태도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어떤 순간엔 편집증적인 겸손으로 보일 정도였다.

30대의 기자가 문체니 뭐니, 불쑥 물어대는데도

마치 면접을 당하고 있는 양 모든 질문에 진지하게 숙고하며 답했다.

내면이 강건하거나 연기에 능하거나다.

 

숙식을 함께한 제자는 어떤 인상을 받았을까.

부악문원에서 공부했던 김개영 작가의 글 한 대목이다.

〈문원에 들어오기 전에 느꼈던 이문열 선생님(이하 생략)의 이미지는 뭐랄까,

보수주의자에다가 권위적이기까지 한 완고한 ‘가부장(家父長)’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의견을 강요한 적도, 상대의 의견을 무시한 적도 없었으며,

혹여 제자의 무례한 발언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탓하거나 마음에 두지 않았다.

심지어 이문열은 우리를 제자로 여기는 것조차 꺼려 했다.

‘제자’가 아니라, 문학의 길을 함께 걷는 ‘동료’라는 것이다.

과외 선생조차 스승으로 깍듯이 모시는 우리 사회의 풍토에 비하면 황송할 정도의 겸손이었다.

우리는 그때 20대 중후반에 불과한 애송이들이었으므로

그의 그러한 모습이 성공한 작가, 나이 든 연장자로서 얼마나 갖기 힘든, 큰 미덕인지 잘 알지 못했다.

우리는 그가 제공한 최적의 집필 시스템 속에서 그 모든 혜택이 당연하게 주어진 것처럼 지냈다.

작가 지망생에게는 실로 낙원과도 같은 곳이었다.〉(2016, 문장 웹진)

― 《사색》(1991)이란 책이 요즘도 기억납니다.

첫 장에 이렇게 써 있지요. ‘나는 어렵고 힘든 삶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나는 지금 내 전기(傳記)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쓰고 있다…’.

“사람이 어렵게 살다 보면, 자기 경계를 많이 개발해야 돼요.

힘이 들 때 내가 잘 써먹었던 건 ‘아 내 전기의 가장 어려운 부분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었어요.

굉장히 힘이 됐어요. 이 순간이 이걸로 끝나버리지 않고

후에 다시 추억할, 누군가 되뇌고 다시 돌아볼 그런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함부로 살지 못하지요.

아무도 안 보고 흩어 사라질 시간 같으면 막 해도 되겠지만요.”


말을 빌려 간 정권과 대통령들

《사색》은 그의 산문 중 좋은 글을 골라 실은 일종의 ‘산문선집’이다.

40만 권이 팔려나갔고, 살림출판사는 이 책을 밑천으로 훌쩍 성장했다.

새로 쓴 것도 아닌 선집이 그 정도 인기였으니, 문학 밖 사회가 그에게 관심을 보인 건 어쩌면 당연했다.

“제 자리란 게 독특했어요. 늦게 문단에 나왔지만 다른 경쟁자 없이 솟아버린 자리가 돼서,

바로 핵심부로 가서 구경할 기회가 있었지요.

좌우 가리지 않고 이쪽 저쪽, 말에 논리와 감동 구조, 미학성이 있다고 인정을 받으면

정치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알아봐요. 정권마다 문제가 생기면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 이를테면 국민들에게 메시지를 전해야 할 때군요.

“노태우 대통령 시절입니다.

나중에 대전시장을 여러 번 한 분인데, 당시 청와대 담당 비서관으로 찾아왔어요.

노태우 정권은 대통령직 수행 중간평가 선거를 공약으로 걸었는데

그걸 하지 말자는 쑥스러운 말을 해야 할 때였어요.

방을 구해서 하루이틀 마주 앉아 그 대국민 담화문을 의논한 기억이 납니다.”

― 왜 말을 빌려주셨어요.

“빌려줬다기보다 그 시대에 필요한 조언을 한 셈이죠.

급해서 중간평가를 공약으로 내걸었겠지만 굉장히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한 거예요.

사실 대통령 2년 재임하고 중간선거해서 다시 이기는 경우가 참 드물 겁니다.

작년 말에 문재인 대통령이 재선 투표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박근혜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죠. 벌써 중간평가를 두고 사회 혼란이 일고 있었어요.

내게 논리와 말이 있다면 정부를 거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김영삼(YS) 때는 어땠나요.

“YS 시기에 유독 사고가 잦았어요.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유람선에 불이 나고, 대국민 사과문을 좀 봐달라 찾아왔지요.”

― 왜 승낙하셨어요.

“꼭 현직에 있지 않아도 가끔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참여할 수 있잖아요.

초야의 선비가 상소하는 식으로 할 수도 있고요.

현직에 있지 않아도 시대 현안이 있으면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라고 해서 말하거나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좀 이상한 거지.

90년대 중반 이후 내가 스스로 우파라는 말까지 했잖아요.

정치적 지향을 드러냈는데, ‘난 몰라, 안 해’ 하는 게 오히려 이중적이지 않을까요.”


동교동과 상도동 관찰기

동시에 YS와 김대중(DJ)의 하루를 지켜볼 기회도 있었다.

“1987년도에 YS와 DJ가 선거에서 붙었잖아요.

‘상도동 24시’ ‘동교동 24시’ 하는 식으로

상도동과 동교동에서 각각 하루씩 묵으면서 취재할 기회가 있었어요.

이런 것이 나중에 보니까 시대를 쓸 때 자산이 되더군요.”

― 동교동과 상도동은 많이 달랐나요.

“캐릭터가 정말 다른 두 사람이었어요. 쉽게 말하면 이래요.

동교동에 먼저 갔어요. 아침 식사 시각에 맞춰 오전 7시에 갔어요.

(주위를 크게 두르며) 이만한 상에 10명 넘게 둘러앉아 있어요.

당의 주요 인사들도 있고, 김홍일씨도 있고. 지금도 기억나는 게 해삼이며 전복이 상에 있는 거예요.

‘이 선생, 먹어보세요. 싱싱한 거예요.’ 4시간 전까지 목포 앞바다에 있던 겁니다.

새벽에 목포에서 고속버스 첫차로 보낸 거예요. 인상적이죠.

하루 종일 사람도 많이 왔다 갔다 해요. 중진 국회의원 10여 명이 들락날락했으니까요.

그때 외신기자가 많지 않았는데 DJ가 외신기자와 영어로 대화를 하데요.

원고지 100매 분량이었는데 150매도 쓰겠더라고.”

― 상도동은 어땠나요.

“DJ는 금요일에 오라 했는데 YS는 일요일에 오라고 하대요. 가니까 집이 깜깜하니 아무도 없어요.

두 부부가 마주 앉아 아침에 짧게 예배를 드린대요. 그러고 나서 아침 먹는데 같이 먹자 하더라고.

내외가 먹는데 끼어 앉아 있으니 소반에 찰떡 두 개를 내주는데 마른 입에 찰떡이 넘어갑니까.

그때 현안이 많을 때라 할 얘기도 많았을 텐데 왠지 YS는 모친 얘기를 하더라고.

모친이 해안 침투 무장간첩한테 총 맞아 돌아가셨거든요.

김일성이 비장하게 권총 든 간첩을 보내서 모친을 쐈다는 거야. 좀 이상하더군요.

있으려니 YS 친구가 집으로 왔어요.

‘이 선생, 개장국 먹으러 갑시다’ 하기에 다녀와서 저녁까지 하루 종일 있다 집에 들어와서 정리하려 보니

쓸 게 없는 거예요.”

―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보좌진 중에 지인이 있었는데, 상황을 얘기해주었어요.

그 친구가 사정을 듣고 나더니 미안하다고 하면서 월요일에 다시 오라는 거예요.

그날은 외신기자도 부르고 국회의원도 여러 명 왔다 갔다 하고 난리를 쳐요. 헛거라.

당장 쓰는 나도 기운이 빠지는데. 세트 꾸며놓은 게 다 보이지요. 그리고 불공정하잖아요.

둘이 나란히 같은 기회를 줘야 하는데 말이에요.”


‘이문열표’ 자서전 원한 정치인들

― 정치인들이 개인적으로 연락해오기도 했나요.

“이상하게 그 사람들이 무슨 허영이었는지 모르지만,

저를 보면 ‘저 사람이 언제 내 전기(傳記)를 안 써주나’ 이게 먼저 걸려 있었던 것 같아요.

노무현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빼고는 그런 의사를 비치거나 측근을 시켜 물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 써주신 적이 있나요.

“한 명도 없어요. 글쎄 결국 전기나 회고록일 텐데 그걸 쓴다는 게 별로 내키지 않았어요.

가장 열심이었던 게 김영삼 대통령 초기의 홍보팀이었어요.

YS 전기나 회고록을 써달라고 왔기에 제가 핑계를 댔을 거 아니에요.

‘세상에 작가가 현직 대통령 전기 써준 건 못 봤다’ 하니, 이 친구가 ‘아닌데요?’ 답하더니

이튿날 전 세계의 작가 70명 명단을 가져왔어요.

그레이엄 그린이나 어윈 쇼도 대통령 전기를 썼더라고요.”

― DJ 쪽은 안 왔나요.

“1993년 DJ가 대선에서 두 번째로 떨어졌을 때예요. 정계은퇴한다고 선언했을 땐데,

일본 NHK에서 DJ 일대기를 4회 시리즈로 제작해 방영했어요. 〈김대중, 일본인에의 자서전〉.

근데 일본에서 그게 굉장히 인기가 있었대요.

DJ와 주변 사람들이 고무돼서, ‘한국에서 DJ 영화를 만들자’고 된 거예요.

PD 한 명이 찾아왔어요. 영화 시나리오를 써달라 하더라고. 안 되면 소설을 써주면 영화화하겠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DJ가 영화 만들겠다고 하니 웃으면서 ‘이문열이가 시나리오 써주거든 해봐라’ 하더랍니다.

좋은 조건을 제시해줬는데 결국 해줄 수가 없었어요.”

― DJ가 섭섭했겠네요.

“대통령 된 후에도 나한텐 잘해줬어요.

흔히 대통령 취임하면 문화인들 모아서 식사 대접하잖아요. 청와대 만찬회나 간담회 같은 거 말이에요.

헤드테이블에 앉혀준 사람은 DJ가 처음이었어요. 대통령 옆, 박지원 비서실장 다음 자리였죠.”


대우 흥망 지켜봐

― 김종필(JP)도 전기 욕심을 냈을 것 같은데요.

“1986년인가 JP가 미국에서 귀국해 정치에 복귀하려 시동을 걸었어요.

그때 주수도라는 사람이 JP를 따라다녔어요.

영어강사로 성공해 강남에서 제일 큰 영어학원을 하던 사람이었어요.

후에 제이유그룹으로 문제가 된 사람입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멋지게 차려입고 찾아온 거예요. JP의 전기나 회고록을 써달라는 거예요.

안 해준다 하니까 돈을 두고 갑디다. 왔다 갔는데 1만원짜리가 가득한 와이셔츠 박스가 있더라고.

전화를 걸었어요. ‘임자 없는 물건이 우리 집에 있는데 파출소에 신고할까요?’ 했더니

사람 보내 가져가더군요.”

― 끈질기게 거절하셨네요.

“그때가 마흔 되기 전이었어요. ‘작가가 벌써 정치가 자서전이나 쓰고 다니면 어이 되나’ 싶었어요.

기분이 상하더라고. 우선 책이 많이 팔리니까 돈 걱정이 별로 없어서 간이 커졌지요.”

― 기업인들과는 교류가 없었나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한창 좋을 때 보름 동안 같이 여행한 적이 있어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김 회장이 한창 좋을 때였어요. 전세기가 있었거든요.

그걸 타고 같은 호텔에 묵으면서 구경을 한 거죠.

김 회장도 언젠가 제가 뭘 하나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거예요.”

― 어떤 걸 보셨어요.

“귀한 걸 많이 봤지요. 이 양반이 전 세계에서 장사를 하지 않았어요?

그때는 아직 옐친에게 실권이 있었어요. 전날 밤은 옐친하고 밥 먹는 자리에 같이 앉아 구경하고,

이튿날은 수단으로 가요. 쿠데타 일으켜서 장군이 대통령을 하고 있었어요(오마르 알바시르 대통령).

만찬 가서 그 대통령도 보고요.”

― 김우중 회장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엄청난 사람이었죠.

그때 제가 보기엔 자기도취가 좀 있었던 거 같아요. ‘제왕이 따로 없구나’ 싶었으니까요.

제일 좋을 때였는데 사실은 가장 방만한 때였던 것 같아요. 모래성이었죠. 그 두 해 후에 무너졌으니까.”

― 원래 인연이 있었나요.

“1989년이었어요. 소설가 후배들이 찾아왔어요.

집을 좁혀 가서 마련한 돈으로 생활하면서 작품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할까 하다 무작정 대우그룹 비서실로 전화를 걸었어요.

어느 자리에선가 김 회장과 인사하고 명함을 받아놨거든요. 남산 힐튼호텔에서 만나자고 합디다.

‘젊은 작가 여섯 명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회사 차원에서 할 수도 있지만 그 정도는 내 개인 돈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하더니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나에게 연락해줘서 고맙다’고 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바로 작가들 연락처와 계좌번호를 달라 했어요.

후에 들어보니 한 달에 100만원씩 한 15개월쯤 되나? 때 되면 꼬박 입금이 됐다고 하더군요.”


북으로 간 아버지

 
이문열씨는 1999년 8월 20일 기자회견을 열어 부친 이원철씨의 생사 확인을 북한 당국에 공식 요청했다. 사진=조선DB

그를 보수 논객의 길로 이끈 건 정치인도, 정권도 아니었다.

한 명의 인물과 하나의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바로 그의 부친이다.

이문열 작가의 본명은 이열(李烈)이다. 부친 이원철(李元喆)씨가 지었다.

작가의 모친은 배 속에 작가를 품고서도 삐라를 돌리며 남편을 도왔다.

그러다 어느 날 모친이 경찰에 잡혀 유치장에 갇혔다.

남로당 간부였던 남편은 아내의 배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는 배 속에서부터 싸운 열렬한 투사’라며

‘열’이란 이름을 지어줬다.

그 아버지는 6·25가 터지자 북한군 치하에서 서울대 농대 학장을 맡았다.

그리고 1950년 10월 가족을 두고 월북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어머니와 오 남매는 떠도는 삶을 살았다. 자전 소설 《변경》에 그날들이 담겨 있다.

작가는 이(李)와 열(烈) 사이에 스스로 문(文) 자를 넣어 필명으로 삼았다.

성과 이어져 있는 본향과 열(烈)이 상징하는 아버지 사이의 단절이랄까 낙차를

자신의 글로 잇겠다는 의지였을까.

혹은 부친의 월북으로 망가져버린 자신과 집안의 운명을 글로 일으키겠다는 소망이었을지 모른다.

“1970년대 중반쯤 이미 난 빨갱이 되긴 틀렸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 때문이었지요.

내 보기엔 참 불쌍한 양반이라. 자기가 가진 좋은 건 다 바쳤어요.

서른셋 먹은 만삭의 아내와 4남매 자식을 적지에 두고 북으로 도망을 갔다고요.

명색 동경대학에 유학도 다녀온 양반이 비참하게 살다 죽었어요.

박헌영이 처형당할 때 운이 좋아서 처형을 면했어요.

함경북도 회령에 있는 협동농장에 평농장원으로 배치됐어요.

아오지탄광 광부보다 나을 게 없는 자리랍니다.

거기서 45년을 살다 용서받고 좋은 곳으로 옮겨진다고 옮겨진 게 청진 옆에 어랑군입니다.

거기서 살다 돌아가셨어요.”


‘지도자 동지’에게 공개 편지

 
이문열 작가의 부친 이원철씨가 북에서 보낸 친필 편지. 사진=조선DB

어쩌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1994년 남과 북 사이엔 정상회담이 추진 중이었다.

“YS와 김일성이 만나기로 되어 있었어요. 저도 함께 가는 걸로 내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일보》 소속인 걸로 해서 회담을 기록할 겸 합석하기로 했지요.

그때가 어머니 돌아가시기 몇 달 전이었어요. 자는데 새벽 2시쯤 와서 깨우시더라고요.

‘너 이번에 북한 가게 되면 아버지 보나?’ ‘기회가 주어지면 보지 뭐’

‘만나면 내가 원망 안 하고 죽었다 캐라, 괜찮다 해라’ 그러시더라고.”

회담을 앞두고 김일성이 사망했다. 금방일 것 같았던 아버지와의 해후는 멀어졌다.

1999년 1월 15일 작가는 4대 일간지에 공개 편지를 전했다. 부친과 김정일에게 쓴 편지였다.

김정일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고심 끝에 택한 건 ‘지도자 동지’였다.

그의 문장 덕이었을까.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말》지라는 월간 잡지가 있었어요. 편지를 쓰고 다음 달에 《말》지에서 기자가 왔어요.

거기에서 다리를 놔줘서 조율이 됐어요. 3월 12일에 내가 북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기로 했어요.

왜 빨리 안 되냐니까 ‘화장을 좀 해야 한다’는 거예요.

북한 사람들이 말라 있어서 한두 달 잘 먹여서 살도 찌우고 옷도 입히고 한다는 거예요.

아버지도 화장이 필요한 상태라.”

― 그래서 만나셨나요.

“갑자기 다시 연락이 왔어요. 4월 말로 미루자는 거예요.

이유를 물으니 4월 15일은 태양절이라 복잡하니 그 뒤에 보자는 거예요.

웬걸 4월 15일도 지나고 4월 말이 돼도 연락이 없어. 나중에 알았어요.

사실은 아버지가 3월 9일에 이미 돌아가신 거라. 사실대로 밝히면 뭐가 잘못되나?”

아버지와 아들을 한번 만나지도 못하게 한 주체사상이란 대체 무언가.

제대로 알아볼 기회가 찾아왔다.

1997년 황장엽 비서의 망명이다.


황장엽과의 대화

“황장엽씨가 망명했을 때부터 진작 안기부 쪽으로 말을 넣었어요.

첫째, 주체사상이라는 게 궁금하다. 둘째, 여러 가지 북한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다.

 

스무 번의 면담을 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만나면 두 시간씩 안가에서 얘기를 나눴어요.

몇 달 안 되고 DJ가 대통령이 된 거라. 황장엽은 연금이 됐어요.

약속이 되어 있으니 만나게는 해주는데 안기부에서 안 좋아했어요.

면담 시간도 짧아지고 안기부에 들어가서 만나야 되는 거라. 열두어 번 만나고 끝이 났어요.”

― 무슨 얘길 나누셨어요.

“그때는 아직 황장엽씨가 남한 정부의 눈치를 안 볼 때였어요. 따끈따끈한 얘기를 들었지. 어떤 얘기는 허풍 같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지금 보니 참말이었구나, 싶기도 해요. 그때는 북에 핵이 있는지 아무도 모를 때 아닙니까. ‘북한에 핵이 있을 거야’ 그런 말들이 하도 돌기에 만나서 물었어요.”

― 있다고 했나요.

“‘있을 겁니다’ 그러더라고. 보지도 못하고 특별히 아는 건 없지만, 이런 일이 한번 있었대요. 중요한 각료끼리 모이는 자리에 자기도 참석하게 됐는데 어떤 경제 각료 하나가 보고하길, 어느 나라가 외채를 갚으라고 난리라는 거라. 거기서 인민무력부장(한국의 국방부 장관 격, 현재 명칭은 인민무력상)이 이랬다는 거예요. ‘개새끼들 핵이나 한 방 앵겨?’ 아예 없으면 그런 소리를 못 할 거 아닙니까. 국방부 장관이 그랬다는 것은 있거나 그거에 준하는 게 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완전히 개발이 완료됐는진 모르겠지만 거의 그런 단계에 있는 걸로 짐작한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그 사람이 감시받을 때는 그런 말을 못 했어요.”

― 주체사상은 배우셨나요.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어요. 주체사상은 이름을 이상하게 붙여놔서 잘 파악이 안 돼요. 지금도 많은 사람이 주체사상이 뭔지 기본을 전혀 이해 못 하는 거 같아요. 주체사상이 왜 ‘수령무오류론’과 연결되는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그건 주체사상의 특징이 아니고 소위 ‘민주집중제’라는 기본 원리와 연관된 거예요.”


미완의 소설 ‘매의 노래’

 
집필 중인 이문열 작가, 2001년 사진이다. 사진=조선 DB

― 북한판 민주집중제가 ‘수령 유일체제’인 거네요.

“차르한테 권력을 받아 왔지만 모든 인민이 권력을 행사할 순 없잖아요. 누가 행사할 거냐. 그걸 결정하는 방식이 소위 민주집중제예요. 처음엔 프롤레타리아라고 했다가, 당이 됐다가, 당중앙, 그리고 지도자, 그게 인격화되면 수령이나 영도자가 되는 거예요. 절대권력이나 세습까지 가능해지는 거죠.”

― 한때 황장엽의 삶을 소설로 쓰려고 하셨지요.

“신문에 연재하려 했는데 그렇게 안 됐어요. 제목까지 정해놨어요. ‘매의 노래’입니다. 막심 고리키의 산문시 제목이지요.”

산문시 ‘매의 노래’의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율모기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하늘에서 매가 떨어진다. 날개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무슨 일인지 매에게 물으니, 저 위에서 싸우다 강한 적들에게 지고 떨어졌단다. 가만히 있지 왜 싸우냐는 율모기에게 매가 말한다. ‘창공을 날아보지 못한 네가 자유의 희열과 창공을 나는 삶의 쾌락을 알겠느냐.’ 매는 떨어져 죽을 걸 알면서 절벽에서 최후의 비행을 시도한다.

“황장엽씨가 망명을 결심하고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아내를 데리고 올 수 없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는 모르는 게 낫다더군요. 알고도 숨겨주면 죄가 더 많은데 몰랐으면 덜하다는 거죠. 망명하기 몇 달 전, 집 뒤에 텃밭이 있었는데 아내와 그 텃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답니다. 두 사람은 러시아에서 유학하다가 만난 사이였어요. 아내가 ‘무슨 고민이 있냐’고 러시아어로 묻더랍니다. 누가 들을까 봐 그런 거죠. 황장엽씨는 ‘매의 노래’ 한 구절을 러시아어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답니다. ‘하늘을 높이 날아보지 못한 네가 어찌 자유를 알겠는가’.”

― 아내가 알아들었을까요.

“토마토가 든 광주리를 들고 뒤돌아서는 아내의 어깨가 축 처지더랍니다. 그게 끝이래요. 얼마나 애절합니까. 미국 갔다가 돌아와서 2009년이었나, 오랜만에 황장엽씨를 만났어요. 그때 분위기로는 그분이 많이 몰려 있었어요. 어린아이 문제도 불거지고…. 그가 이런 꿈을 꾼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산 채로 묶여서 김정일한테 다시 넘겨지는 꿈. 그래서 기가 막힌 상황을 한번 소설을 써서 남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었지요.”


“可留지언정 不可居라”

대화를 잠시 멈추고 그가 차를 내왔다. 서실엔 어엿한 부엌이 있다. 원래는 가족들이 서실에서 살 예정이었다고 한다. 살림집으로 지었단 얘기다. 그렇게 안 된 건 최장조 선생 때문이었다.

“지어놨는데 최창조 선생이 찾아왔어요. 가족들이랑 같이 옮겨올 예정이라고 하니 안 된다는 거예요. ‘가류(可留)지언정 불가거(不可居)라’ 머물 순 있어도 살 수는 없는 자리라는 거예요. 정자라든지 암자를 놓으면 딱 맞는 터라는 얘기지요. 그러면서 살림집 터를 새로 잡아주더군요. 지금의 안채 자리입니다.”

2001년 11월 3일 서실 앞 마당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책 장례식’이다. 이 작가는 그날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한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고 그렇잖아요. 그때는 그렇진 않았어요. 어느 어벙한(어리숙해 뵈는) 친구가 아홉 살 먹은 어린 여자아이에게 하얀 소복을 입히고 아이에겐 영정을 들렸어요. 제 책의 표지사진으로 만든 영정이었지요. 이 의미가 클 거라는 게 짐작은 가요. 사람이 살아 있는데 책을 장사지낸다 는 게 말이죠. 실제로 그 책을 나중에 가져가서 화형식을 했거든요. ‘어어’ 하면서 그걸 봤어요.”

이른바 ‘이문열돕기운동본부’라는 단체에서 꾸민 행사였다. 단체장이던 화덕헌씨는 이후 진보신당 소속으로 부산 해운대구에서 구의원에 당선된다.

“내년이 딱 20년 됩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어요. 그 뒤엔 상징이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건 하나의 상징이었구나. 난 사형을 당하고 있었구나.”

― 응원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잖아요.

“그랬죠. 내가 외로웠냐면 그것도 아니에요. 제 편들도 저지하러 왔어요. 경찰이 두 패가 싸우면 안 된다고 자리를 정해 갈라놨어요. 한 패는 영정 사진을 들고 집을 돌고, 다른 한 패는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저쪽에서 시위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시위대를 이끌고 온 게 유튜브 ‘신의 한 수’의 신혜식 대표예요. 시대가 다 거기 숨어 있는 거라. 그때는 어린애 장난 같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는데, 그게 오늘이 된 거예요. 무섭지요 세상이.”

돌아보면 그날의 그 광경은 어떤 예감 같은 거였다. 훗날 일어날 일을 언뜻 보여준 프롤로그라고 할까. 신혜식 대표는 당시를 회상하며 ‘특이한 시점이었다’고 말했다.

“그전까지는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모임이 ‘노사모’처럼 팬클럽 형태로 움직였어요. 그러다 그 시기부터 팬클럽이 일종의 시민운동을 시작했어요. ‘안티조선’ 운동 같은 거죠. 이듬해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면서 그 움직임이 본격화됐어요. 이문열은 그들의 첫 타깃이 된 셈이에요.”

책 장례식은 이 작가의 위치를 보수진영 쪽으로 강하게 밀어버린 결정적 계기가 됐다.

― 현재의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어렵게 되어 있는 전투예요. 지금은 어렵게 됐어요. 어렵게 된 것이 한 20년 정도만 되돌릴 수 있어도 좀 쉬울 텐데. 최근 20년간 너무 악화됐어요. 되돌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특히 5·18과 엉겨 붙은 이데올로기 문제는 심각하죠. ‘북한군이 내려와서 했다’는 식의 얘기도 싫어하지만 저쪽에서도 너무 5·18을 아귀아귀 뜯어먹는 것 같아서….”

그는 웃는지 인상을 쓰는지 모를 듯한 표정으로 비관적인 말을 이어갔다.

“이젠 누가 충고도 못 하고, 중재도 어렵고. 심하게 저쪽으로 갔다가 잘못돼서 돌아오고 이런 거밖에 기대할 게 없지 않을까요. 별로 할 얘긴 아니지만, 갈 데까지 가면 그때 ‘야, 그땐 그래도 이 지경은 아니었잖아’ 하면서 반성이나 하면 모를까, 지금 현재 선은 어떻고 후는 어떻다, 따져보는 건 어렵지 않을까요.”


불문이 전염된 시대

 
이문열 작가는 2004년에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맡았다. 사진=조선DB

그의 비관이 어디까지 갈지 궁금했다.

“닥쳐올 변화가 불안하고 궁금합니다. 사실은 미래에 대한 좋지 않은 예감 같은 게 있어요. 단순히 우리끼리 민주화나 이 시기의 진보를 겪는 게 아니고 헤까닥 뒤집히면서 희한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나쁘게 말하면 전부 보트를 타야 한다거나 까만 비닐봉지를 쓴다든가.”

― 선거 부정을 두고 논란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사회 전반에 퍼지고 있는 ‘이상한 마비’를 보여주는 문제예요. 불문의 전염이라고 할까. 묻지 않는 게 전염되고 있어요. 나도 조금씩 마비가 돼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전같이 화가 나지도 않아요. ‘저거 왜 저러지? 왜 정부는 아무 대답 안 해?’ 하고 화가 나다가도, ‘그래, 아무 말 안 하는 이유가 있겠지’ 이래 되는 거예요.”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의혹 제기가 얼마나 많이 나왔나 말이에요. 간단하게 알 수 있는 것들을 기어이 나가서 캐묻는 이도 없고, 정부도 마찬가지예요. 확인해주면 될 건데 죽어도 안 해줘요. 그런 일이 얼마나 많아요. 세상이란 게 모든 걸 물을 수 없고 모든 걸 대답할 수 없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지금 한국인들이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이 이상한 거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들 원래 말썽 많고 데모 잘하는 사람들 아니었나요?”


홍준표를 도운 이유

 
부악문원의 서실.

― 4·15 총선에서 홍준표 후보를 지지하셨지요.

“홍준표를 지지한 게 아니라 김형오위원장한테 화를 낸 겁니다. 홍준표를 우대할 이유는 없어요. 그렇다고 입후보할 자리도 안 주는 건 안 됩니다. 양산 같은 경우, 애초 약속한 대로 경선이라도 시켜줬으면 김두관이 그렇게 쉽게 됐겠어요? 대구에 가서 그랬어요. ‘(미래통합당 후보던) 이인선 후보한텐 참 미안하지만 홍준표가 들어오면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놈들의 좁은 소견이 미워서 도와주러 왔다’.”

― 그럼 홍준표라는 인물은 어떻게 보시나요.

“이제 와서 특권을 주거나 우대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를 다시 중요한 인물로 기용하고 무슨 기대를 거는 것도 아닙니다. DJ 같은 경우는 아주 독특한 경우예요. 호남 특성과 그곳의 이상한 인물난. DJ 첫 대통령 출마해서 죽은 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만한 사람이 안 나오잖아. 홍준표는 DJ가 아니에요.”

― 불화에 살짝 비켜설 수 있었는데 왜 정면으로 마주하셨나요.

“제가 대한민국과 동갑입니다. 48년생. 이 체제에서 재벌이 된 것도 아니고. 글 써서 돈 몇 푼 벌긴 했지만 빚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70년 이 세계에 대해 ‘내 책임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 너무 치사한 거예요. 뭔가 의미를 부여해 이 세계에 대한 설명이라도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인터뷰 말미 그는 ‘언어의 오염’을 걱정했다. “중국 고전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말이 망한다’. 전형적으로 망가진 말이 ‘막말’이라는 말입니다. 자세히 보세요. 같은 말이라도 저 사람이 하면 막말이고, 이 사람이 하면 막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프레임을 짓는 겁니다. 말이 망한 겁니다. 인터넷이 말을 많이 망가뜨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문열 작가가 권하는 책

1. 《한국산문선》, 유몽인 외
2. 《로마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3. 《중일전쟁사》, 래너 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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