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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제색도에는 노론의 정치 지령이 담겨있다?

colorprom 2020. 5. 2. 15:22


인왕제색도에는 노론의 정치 지령이 담겨있다?


조선일보
                         
             
입력 2020.05.02 03:00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
장동 김씨의 정세 보고서라 주장

검은색 인왕 = 대리청정 맡긴 영조
기울어진 집 = 독단적인 사도세자
작은 집 = 갓 책봉된 세손을 상징
진경산수, 정치 견해 피력한 그림

'노론의 화가, 겸재 정선'
노론의 화가, 겸재 정선|이성현 지음|들녘|440쪽|3만5000원

440쪽 책을 요약하면 이렇게 수렴된다. '겸재 정선(1676~1759)의 대표작 인왕제색도는 노론의 정치적 지령을 담은 시청각 자료였다.' '겸재의 진경산수화는 노론 핵심인 장동 김씨(김상헌의 후손인 안동 김씨)를 위한 비밀 정세 보고서였다.'

황당한 주장이라 일축하기엔 논증이 치밀하다. 저자는 전작(前作) '추사코드'와 '추사난화'를 통해 김정희(1786~1856)의 글씨·그림 속에 당대 현실을 비판하는 '정치적 암호'가 숨어 있다고 주장한 이성현(60)씨. 국내외 개인전 22회를 연 중견 화가이자 미술학 박사 학위(홍익대)를 받은 연구자이기도 하다. 이번 책에서는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대가 겸재가 장동 김씨의 정치적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그림을 그린 '노론의 화가'였다는 도발적 주장을 펼친다.

먼저 '인왕제색'도를 보자. 비 갠 후 인왕산 모습을 그린 것으로 '진경산수'의 대표작이란 설명이 따라붙는다. 화면 오른쪽 위에 적은 '신미윤월하완(辛未閏月下浣·신미년 윤달 하순)'은 1751년 5월 20~30일. 겸재의 평생지기 사천 이병연(1671~1751)이 죽은 때인 1751년 5월 29일과 겹친다. 이 때문에 '인왕제색'도는 겸재가 사천의 쾌유를 기원하며 그린 그림이라는 게 학계 정설이다.

저자는 당대 정치 현실을 주목한다. 영조는 1751년 5월 13일 돌도 지나지 않은 사도세자의 첫아들을 서둘러 세손으로 책봉했다. 세손은 훗날 정조가 태어나기 6개월 전인 1752년 3월 사망하지만 이때는 당당한 왕위 후계자로 여겨졌다. 영조는 즉위 때부터 이복형인 경종 독살설 등 정통성 시비에 휘말리면서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당시 대리청정 중이던 사도세자는 노론을 억압하고 소론 편에 섰다. 세손이 책봉되자 장동 김씨는 사도세자를 건너뛰는 왕위 계승 변동의 기미를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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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인왕제색도'. 138.2×79.2㎝. 겸재 그림은 당시 노론 핵심인 장동 김씨의 정치적 견해를 담아내는 수단으로 사용됐다고 저자 이성현씨는 주장한다. /들녘
'인왕제색'도는 이런 정치 상황에서 장동 김씨가 노론 세력에 은밀히 보이기 위해 그린 정세 분석 그림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인왕'은 영조를 뜻한다. 인왕산 바위는 비에 젖어 검은색이다. 이는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비정상 상태의 왕이라는 뜻. 그러나 인왕은 폭포를 이루며 급격히 빗물을 흘려 보낸다. 머지않아 인왕이 본연의 흰빛을 회복할 것이니 그때까지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오른쪽 아래 기울어진 지붕을 인 엉성한 집은 균형을 잃고 독단 정치를 펴는 사도세자를 나타낸다. 가운데 장난감처럼 작은 집은 갓 책봉된 세손을 상징한다. 두 집 사이 인왕산으로 가는 길(왕에 등극하는 길)은 오른쪽으로 꺾으면 사도세자이지만, 왼쪽으로 가면 세손에게 닿는다. 세손이 오히려 인왕산 오르는 길에 더 가깝다. 저자는 "익숙한 인왕산을 소재로 그려낸 작품인데도 (당대 감식안인) 표암 강세황조차 이 그림을 평한 글이 한 줄도 없다. 노론 강경파끼리 은밀하게 본 그림이기 때문"이라며 "인왕산이 아직 비에 젖어 미끄러우니 조심하란 뜻으로 노론 내 과격 분자를 진정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조선의 자연 풍경을 그린 그림이란 뜻으로 학계가 말하는 '진경산수'의 정의도 잘못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진경(眞景)'이란 말을 처음 쓴 표암에 따르면 진경산수란 조선이 당면했던 현실적 문제에 대해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겸재가 장동 김씨 핵심인 삼연 김창흡(1653~1722)과 금강산 여행을 하며 그림을 그린 까닭은 당시 금강산 지역이 반(反)장동 김씨 세력의 근거지였기에 이들의 정황을 은밀히 보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한강 남쪽에서 남산에 해 뜨는 모습을 그린 '목멱조돈'.
한강 남쪽에서 남산에 해 뜨는 모습을 그린 '목멱조돈'. 사천 이병연이 쓴 왼쪽의 한시와 짝을 이뤄 소론 제압과 사도세자 비판 내용을 담았다고 했다. /들녘
겸재의 산수화는 사천이 쓴 한시(漢詩)와 짝을 이룬 작품이 많다. 사천은 겉으론 풍경 묘사인 듯하지만 '논어' '시경' '서경' 같은 고전의 속뜻을 숨겨 당시 정세를 보고했고, 겸재는 이를 시각화했다. 남산 모습을 그린 '목멱조돈(木覓朝暾)'에서 사천은 '서색부강한(曙色浮江漢)'으로 시작하는 시를 썼는데 미술사가들은 이를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로 번역한다. 그러나 사천이 '한강'을 '강한'으로 쓴 의도는 따로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시경' '강한(江漢)' 편에 내포된 뜻을 겹치면 "피아를 구분할 수 없던 어둠이 지나고 새벽이 오면서 얼굴색이 드러나고 있으니 한강 유역에 숨어있는 야만인들을 정복해야 한다"는 의미로 소론 일파 소탕을 지칭한다는 것. 미술사가들이 '강한'을 비롯해 이 시에 나오는 '고릉(觚稜)' '위좌(危坐)' '종남(終南)' 등의 시어를 고전 속에 숨은 뜻을 밝히지 않고 단순한 풍경 묘사로 읽었다는 지적이다.

학계와 겸재를 존경하는 애호가들에겐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일 수 있다. 저자 이성현씨는 "서양의 종교화가 종교 이념을 그렸다고 해서 예술적 가치가 떨어지는 게 아니듯, 겸재가 노론의 이념과 행보를 함께하며 그린 그림이라고 해서 예술 작품 가치가 훼손되는 건 아니다"라며 "작품 분석에 객관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탓에 한국 미술사는 콘텐츠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01/202005010229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