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우한폐렴]우리를 지킬 '최후의 보루' (윤석민 교수, 조선일보)

colorprom 2020. 4. 21. 14:45


[朝鮮칼럼 The Column] 우리를 지킬 '최후의 보루'


조선일보
                         
  •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입력 2020.04.21 03:20

코로나에 맞선 우리의 성공… 규범과 절제에 기반한 도덕 사회 힘에 근거
앞으로 다가올 위기도 이런 내면의 힘으로 극복
우리가 경계해야 할 적은 생명 같은 규범 훼손하는 이들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행복은 전속력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일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
마치 그날이 생존 기념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난 몇 달 동안 영혼의 불빛을 낮추고 살면서 비축해 놓은 생명의 양식을 마음껏 소비했다."
작가 카뮈가 묘사한 '페스트'의 끝 장면이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의 끝을 이처럼 격정적인 행복의 어휘들로 서술하는 예측은 찾아볼 수 없다.
전망들은 암울함 그 자체다.
세계적 스테디셀러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코로나로 인한 세계적 위기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시민적 권능전 지구적 연대의 강화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하지만 현실 상황은 정반대다.

코로나를 혹독하게 겪고 있는 국가들 대다수가 국민에 대한 사회적 감시와 통제를 강화했다.
또한 주요국들은 한층 강화된 보호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3일 한 언론 기고문에서
코로나19로 세계 질서가 과거의 성곽 시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국가 간의 연대는 유엔이나 세계보건기구(WHO) 등 국제기구들에서 먼저 흔들리고 있다.

코로나는 우리가 선망하던 이른바 선진 국가들의 통치 시스템 및 이들이 주도한 세계 질서가
정답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중후한 석조 건물들같이 견고해 보였던 서유럽 국가들의 복지국가 제도,
현란한 타임스스퀘어의 광고물들처럼 역동적이던 미국식 시장주의는
감염병 재난 사태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그 구성원들의 삶은 순식간에 참혹한 동물적 상태로 추락했다.
과도한 복지국가제약 없는 시장주의 양자 모두의 실패였다.

세계는 이제 코로나에 맞선 성공 사례로 한국에 대한 찬사를 쏟아 낸다.
하지만 필자는 우리의 성공이 현 정부의 탁월한 지도력 때문이었다고 보지 않는다.
정부는 코로나 사태 내내 갈팡질팡했다.
지나친 단순화일지 모르나 필자는 이 성과가
이전 정부들이 구축한 질과 보편성을 겸비한 의료보장 시스템
우리 안에 내재하는 "규범과 절제에 기반한 도덕 사회의 힘"이 더해진 결과라고 믿는다.
특히 후자가 국가와 시장의 힘만으로 이룰 수 없는
국민의 인내와 협조, 의료진의 헌신, 그리고 의료 산업의 사회적 구휼을 이끌었다.

방역의 주체가 되어 거리 두기와 마스크 쓰기를 적극 실천한 국민,
코로나 신속 진단 키트를 적시에 양산 공급한 제약·바이오 기업들,
그리고 감염병 확산 통제와 확진자 치유를 위해 말 그대로 온몸을 던진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들의료진의 모습에 눈물이 나도록 감동하고 감사했다.

코로나 사태는 서구 국가들에 대한 막연한 선망과 열등감을 벗어나
우리를 재발견하게 해 준 것만으로도 무의미한 고통은 아니었다.

이러한 도덕 사회는 숱한 역사의 격랑과 위난 속에 우리를 지켜 온 기반이었다.
국가의 강제나 시장의 욕망에 앞서 우리 삶을 이끌어 온 정신적 원리였다.

수년 전, 경주 최 부자 고택을 들렀을 때다.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 땅을 늘리지 말라,
객을 후히 대하고 주변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게 하라는 등의 가훈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민한 탓에 육연(六然)이라는 몸가짐의 지침이 따로 있음을 그때 처음 알았다.

자처초연(自處超然) 혼자 있을 때 초연하게 지내라 /
대인애연(對人靄然) 다른 이를 온화하게 대하라 /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하라 /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 과감하게 대처하라 /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이루었을 때 담담히 행동하라 /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져도 태연히 행동하라.

코로나 이후, 그 어떤 구호책으로도 메울 수 없는 민생의 위기가 우리를 덮칠 것이다.
폐업과 실업률은 이미 치솟고 있다.
거대한 연속적 눈사태 같은 전 지구적 위기 앞에 그 어떤 국가 차원의 대책도 근본적 한계를 지닐 것이다.

이 두렵고 막막한 상황에 맞설 최후의 보루는
그 어떤 외부적 조치에 앞서 다시금 우리 내면의 힘일 수밖에 없다.
인내, 절제, 나눔의 규범들이 우리의 삶, 자존, 그리고 고결함을 지킬 것이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공동체의 적(敵)은 이 생명 같은 규범을 훼손하는 이들이다.
지난 선거는 스스로를 자해하는 정치 집단들의 막말, 선동, 적개심으로 또다시 얼룩졌다.
자화자찬도 모자라 선거에서 이겼으니 모든 걸 갚아 주겠다는 언사 앞에 할 말을 잊게 된다.
그 진흙탕 속에서 이낙연 전 총리의 언행이 오롯이 빛났다.
선거의 승패를 넘어 위기 앞에 국민을 하나로 묶는 낮은 처신이었다.
육연(六然)의 길이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20/202004200419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