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4.14 03:12
이긴 기억보다는 진 기억이 오래간다.
통산 승률이 약 6할 5푼인 프로기사 조치훈도 그렇게 말했다.
전성기를 한참 지났지만 바둑에 져서 슬프기는 젊어서나 늙어서나 매한가지라고 했다.
수읽기가 잘 안 되거나 착각해서 망친 바둑이 왜 없겠냐마는,
그는 "'늙어서 실수한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더 강해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조치훈은 요즘도 하루 8시간씩 바둑 공부를 한다.
그에게 바둑이 아니라 근심 처리하는 법에 대해 한 수 배운 적이 있다.
그에게 바둑이 아니라 근심 처리하는 법에 대해 한 수 배운 적이 있다.
2인 1조 페어 바둑이 끝나고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대국실 밖에서 기다리면서 내심 조치훈이 이기기를 바랐다.
"목숨 걸고 둔다"는 명언으로 기억되는 승부사 아닌가.
그가 유쾌한 기분이라야 바둑과 인생에 대해 넓고 깊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쁜 소식이 들렸다. 조치훈이 속한 조가 일찍 돌을 거뒀다고 했다.
하지만 나쁜 소식이 들렸다. 조치훈이 속한 조가 일찍 돌을 거뒀다고 했다.
대국실로 들어가 빈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패자와 마주앉았다.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하나, 착점을 궁리하는데 조치훈이 빙그레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방금 졌는데 아프지 않은지 묻자 조치훈은 이렇게 답했다.
"개인전이 아니라 상처가 덜해요.
"개인전이 아니라 상처가 덜해요.
제 짝이 실수해서 졌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짝도 아마 저를 원망할 거예요."
그 대답에는 농담과 진담이 섞여 있었다. 일방적인 책임 전가와는 달랐다.
그 대답에는 농담과 진담이 섞여 있었다. 일방적인 책임 전가와는 달랐다.
함께 레이스를 뛴 동료를 향해 '혼자 괴로워하지 말고 나를 탓하면 돼'라는 배려심이 느껴졌다.
요즘 국민의 관심 또는 근심은 온통 선거에 쏠려 있다.
요즘 국민의 관심 또는 근심은 온통 선거에 쏠려 있다.
누구는 대패할까 봐 걱정이고 누구는 '너무 크게 이긴다'는 설레발이 또 걱정이다.
주말에 집에서 두툼한 선거 공보물을 찬찬히 읽었다.
국회 취업의 계절이기는 하지만, 거품 낀 자소서(自紹書)처럼 보였다.
선거 공보물대로라면 후보들은 하나같이 멋지고 정의로운 인생을 살아온 분들이었다.
자기 경력이나 업적을 번드르르하게 포장하다가 손발이 오그라들지는 않았을까.
이보다 더 절박한 문학이 없다.
선거는 유권자가 어느 후보와 짝을 이뤄 두는 2인 1조 바둑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선거는 유권자가 어느 후보와 짝을 이뤄 두는 2인 1조 바둑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마음을 준 후보가 누구인지는 유권자 자신만 안다. 따라서 국민에게만 단체전이고 후보에게는 개인전이다.
어느 조는 이기고 어느 조는 질 수밖에 없다.
유권자는 표를 줬는데도 낙선한 후보를 탓할 수 있지만, 후보는 패배 책임을 유권자에게 떠넘길 수 없다.
조치훈에게 물었다. 50년 동안 둔 바둑 수천 판 가운데 기억에 남는 한 판이 있는지.
조치훈에게 물었다. 50년 동안 둔 바둑 수천 판 가운데 기억에 남는 한 판이 있는지.
그는 "과거의 영광을 생각할 만큼 늙지는 않았고 미래의 희망에 부풀 만큼 젊지도 않다"며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사는 것만 생각한다"고 했다.
그래, 유권자인 우리가 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나.
선거에서 지더라도 그건 그들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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