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3.24 03:14
[205] 전설이 된 행정가 이서구(李書九)의 잊힌 삶
정조~순조 때 관료 이서구, 백성 위한 행정 실천
경상, 전라, 평안 관찰사로 악행과 제도 바꾼 행정가
'신통력 가진 기인'으로 백성들은 전설 만들어
선운사 마애불 복장 유물, 이서구가 열어보니 '이서구가 연다'고 적혀 있어
세도정치가 김좌근의 첩 나합 탄생도 예언
"앉으면 竹山 서면 白山" 죽창 든 동학혁명 예언
정읍에는 조병갑 아버지 공덕비와 관찰사 이서구 공덕비 공존
강원도 춘천 초입 남면 박암리 산속에 무덤이 하나 있다. 앞에 커다란 비석이 서 있는데, 생전에 무덤 주인이 이리 말했다고 한다. "비석을 만들었다가 세상이 편안해지면 세우라."
무덤 주인 이름은 이서구(李書九·1754 ~1825)이고, 비석 글은 벗 남공철이 썼다. 과연 그가 죽고 4년 뒤 당쟁이 일어 일생의 벗 남공철이 죽은 벗을 거칠게 비난하였다. 후손들은 유언을 어기고 세웠던 비석을 서둘러 묻어버렸다.
오래도록 세상은 소란하였다. 나라가 망했고 식민지가 되었다. 해방이 되었고 전쟁이 터졌다. 그가 죽고 150년이 지난 1975년 박광칠이라는 마을 사람이 쇠꼬챙이로 땅을 찔러 무덤 앞 5m 땅에서 비석을 찾아냈다.(신종원, '이원과 그 자 이서구 묘비', 강원사학, 1985) 근 150년 만에 직립한 비석 머리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有明朝鮮右議政惕齋李公墓碑銘(유명조선 우의정 척재 이공 묘비명)'. 전설이 된 명행정가, 척재 이서구 이야기다.
노론 출신 북학파 이서구
무덤 주인 이름은 이서구(李書九·1754 ~1825)이고, 비석 글은 벗 남공철이 썼다. 과연 그가 죽고 4년 뒤 당쟁이 일어 일생의 벗 남공철이 죽은 벗을 거칠게 비난하였다. 후손들은 유언을 어기고 세웠던 비석을 서둘러 묻어버렸다.
오래도록 세상은 소란하였다. 나라가 망했고 식민지가 되었다. 해방이 되었고 전쟁이 터졌다. 그가 죽고 150년이 지난 1975년 박광칠이라는 마을 사람이 쇠꼬챙이로 땅을 찔러 무덤 앞 5m 땅에서 비석을 찾아냈다.(신종원, '이원과 그 자 이서구 묘비', 강원사학, 1985) 근 150년 만에 직립한 비석 머리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有明朝鮮右議政惕齋李公墓碑銘(유명조선 우의정 척재 이공 묘비명)'. 전설이 된 명행정가, 척재 이서구 이야기다.
노론 출신 북학파 이서구
실학 북학파의 아버지 연암 박지원에 따르면 이서구는 심령(心靈)이 일찍 트이고 혜식(慧識)이 구슬과 같았다.(박지원, '연암집' 7 별집, '종북소선') 이서구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와 함께 박지원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네 사람이 세상을 보는 눈은 현실적이었고, 글들은 출중했다. 정조 눈에 들어 규장각에서도 함께 공부를 했다. 명·청을 흉내 내지 않고 독자적인 글을 쓴 이 네 사람을 '한학 사가(漢學四家)'라 부른다.
이 가운데 세 사람은 '비루한' 서얼이었다. 이서구는 14대 국왕 선조의 아들 인흥군의 후손이었다. 어엿한 노론 가문 출신이었다. 벗들이 규장각에서 책에 파묻힌 사이, 이서구는 승승장구하며 벼슬길을 걸었다. 홍문관 교리와 한성부 판윤을 거쳐 수시로 지방 관찰사로 나갔다. 그런데 그가 거쳐 간 곳마다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백성 뇌리에 박혀 있는 이서구는 관료가 아니라 이인(異人)이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서구, 전설을 먼저 본다.
이서구가 열어본다
1820년 전라관찰사로 나갔을 때였다. 관찰사 이서구는 고창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에 세상을 바꿀 비결(祕訣)이 들어 있다고 들었다. 있긴 있는데, 여는 사람은 벼락을 맞는다고 했다.
늙었으되 호기심 많은 이 관찰사는 즉시 전주를 떠나 선운사로 갔다. 백 척 절벽에 부처님이 그려져 있고, 배꼽에 복장 흔적이 보였다. 사다리에 줄을 타고 올라가 복장을 열었더니 과연 그 속에 책 한 권이 얌전하게 누워 있지 않은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겉장을 열었더니 첫 문장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全羅監司李書九開坼(전라감사이서구개탁·이서구가 열어본다).'
그 순간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식겁한 이서구는 줄행랑을 놓았다.
세월이 흘러 1894년 동학 접주 손화중이 이끄는 농민 무리가 도솔암에 몰려들었다. 세상을 바꿀 비결이니 응당 우리 손에 넣어야 한다고 했고, 벼락은 이서구가 이미 맞았으니 겁낼 것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어찌하여 복장을 열어 비결을 꺼내 갔다는 이야기.(이상 오지영, '동학사', 1973) 혹은 텅 비어 있었다거나 기껏 꺼냈더니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였다는 이야기.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이서구가 평안관찰사 시절에 들렀던 한 절에서 주지가 이서구에게 자물쇠 구멍만 뚫린 궤짝 하나를 내놓았다. 속에는 종이가 가득 들어 있었고 "100년 뒤 이를 열 자가 있을 것"이라는 말도 유전해 있었다. 그런데 이서구가 자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돌리니 바로 뚜껑이 열리는 게 아닌가. 이서구가 속에 있던 종이를 가져다가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이게 여기에 있었구나."(이유원, '임하필기' 27, '춘명일사') '이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이서구만 알고 있다.
앉으면 죽산 일어서면 백산
이 가운데 세 사람은 '비루한' 서얼이었다. 이서구는 14대 국왕 선조의 아들 인흥군의 후손이었다. 어엿한 노론 가문 출신이었다. 벗들이 규장각에서 책에 파묻힌 사이, 이서구는 승승장구하며 벼슬길을 걸었다. 홍문관 교리와 한성부 판윤을 거쳐 수시로 지방 관찰사로 나갔다. 그런데 그가 거쳐 간 곳마다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백성 뇌리에 박혀 있는 이서구는 관료가 아니라 이인(異人)이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서구, 전설을 먼저 본다.
이서구가 열어본다
1820년 전라관찰사로 나갔을 때였다. 관찰사 이서구는 고창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에 세상을 바꿀 비결(祕訣)이 들어 있다고 들었다. 있긴 있는데, 여는 사람은 벼락을 맞는다고 했다.
늙었으되 호기심 많은 이 관찰사는 즉시 전주를 떠나 선운사로 갔다. 백 척 절벽에 부처님이 그려져 있고, 배꼽에 복장 흔적이 보였다. 사다리에 줄을 타고 올라가 복장을 열었더니 과연 그 속에 책 한 권이 얌전하게 누워 있지 않은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겉장을 열었더니 첫 문장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全羅監司李書九開坼(전라감사이서구개탁·이서구가 열어본다).'
그 순간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식겁한 이서구는 줄행랑을 놓았다.
세월이 흘러 1894년 동학 접주 손화중이 이끄는 농민 무리가 도솔암에 몰려들었다. 세상을 바꿀 비결이니 응당 우리 손에 넣어야 한다고 했고, 벼락은 이서구가 이미 맞았으니 겁낼 것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어찌하여 복장을 열어 비결을 꺼내 갔다는 이야기.(이상 오지영, '동학사', 1973) 혹은 텅 비어 있었다거나 기껏 꺼냈더니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였다는 이야기.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이서구가 평안관찰사 시절에 들렀던 한 절에서 주지가 이서구에게 자물쇠 구멍만 뚫린 궤짝 하나를 내놓았다. 속에는 종이가 가득 들어 있었고 "100년 뒤 이를 열 자가 있을 것"이라는 말도 유전해 있었다. 그런데 이서구가 자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돌리니 바로 뚜껑이 열리는 게 아닌가. 이서구가 속에 있던 종이를 가져다가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이게 여기에 있었구나."(이유원, '임하필기' 27, '춘명일사') '이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이서구만 알고 있다.
앉으면 죽산 일어서면 백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