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3.16 03:14
[코로나 대응 義兵'을 소집한 의사… 이성구 대구시의사회 회장]
방호복 입으면 호흡 어렵고 두세 시간 버티기 힘들어… 벗으면 온몸이 땀에 젖어
'의료진께 맛있는 빵 사드려라' 손편지와 함께 300만원 송금…
전남의사회, 전복 한 트럭 보내
'일과를 마치신 의사 동료 여러분은 선별진료소로, 격리병동으로 달려와 주십시오. 이 위기에 단 한 푼의 대가, 한 마디 칭찬도 바라지 말고 피와 땀과 눈물로 시민들을 구합시다. 제가 먼저 제일 위험하고 힘든 일 하겠습니다…. '
지난달 25일 새벽 이성구(60) 대구시의사회 회장은 이런 '호소문'을 올렸다. 대구에서 코로나 사태의 둑이 이미 터졌을 때다.
"의병(義兵)을 모집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의료진이 감염돼 격리 조치되고 응급실도 폐쇄됐습니다. 확진자들은 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의사도 왜 감염의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의사의 본분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대구 의료계 책임자들은 '우리 대구가 낙동강 방어선이 돼야 한다. 전국 확산을 꼭 막아내자'고 다짐했습니다."
지난달 25일 새벽 이성구(60) 대구시의사회 회장은 이런 '호소문'을 올렸다. 대구에서 코로나 사태의 둑이 이미 터졌을 때다.
"의병(義兵)을 모집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의료진이 감염돼 격리 조치되고 응급실도 폐쇄됐습니다. 확진자들은 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의사도 왜 감염의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의사의 본분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대구 의료계 책임자들은 '우리 대구가 낙동강 방어선이 돼야 한다. 전국 확산을 꼭 막아내자'고 다짐했습니다."
나 같은 늙다리 의사 필요 없나
―그 호소문을 보고 얼마나 모였나요?
"대구에서 개원의 등 300여명이 참여했습니다. 낮에는 본업을 하고, 밤이나 주말에 응급실과 격리병동, 선별진료소 근무를 자원했습니다. 병원 문을 닫고 코로나 사태 끝날 때까지 봉사하겠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원로 의료인들도 '나 같은 늙다리 의사는 필요 없나?'라며 신청했습니다. 궂은일을 시켜도 한마디 불평 없이 다들 헌신적으로 해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의병'들은 실제 어떤 일을 맡고 있습니까?
"격리병원에서는 담당 의사들과 함께 검체 채취, 회진, 처방 등을 합니다. 병상 부족으로 입원을 못 한 재가 격리자 2000여명에 대한 전화 상담을 '의병'들이 맡았습니다. 환자들에게 의사와 끈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심리적 안정을 줬을 겁니다. 이를 통해 고위험군의 환자들을 찾아내 우선 입원시키도록 했어요. 아마 세계 유례없는 봉사일 겁니다."
―외지(外地) 의료진도 대구를 돕기 위해 많이 들어왔지요?
"대구시의사회에 접수된 숫자만 40여명이고 개별적으로 온 의사도 있습니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일반 자원봉사자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왔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았고 대구에 연고가 없는데도, 자발적으로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온 의료진은 정말 '영웅'들입니다.
"제가 '지역사회 감염 위험이 있으니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광주시의사회 회원들이 성금 2000만원과 의료 지원품을 들고 왔습니다. 대구와 광주는 '달빛(달구벌+빛고을) 동맹'이라며 의리를 보여준 겁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맞습니다. 이들은 계명대 동산병원 격리병동과 선별검사소에서 2주일 일했습니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 서울 강남보건소장이었던 여성분도 자원봉사자로 대구에 내려왔다고 들었습니다.
"그 딸이 감염될지 모른다고 말렸으나 '나는 평생 독감 한번 걸려본 적 없다. 메르스 사태 경험이 대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분은 선별진료소 등에서 2주일 봉사한 뒤 돌아갔습니다."
―또 기억나는 의사들이 있습니까?
"경남 사천과 거제에서도 '의병'이 몇 명 왔습니다. 이름이 노출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숙식을 제공해주겠다고 해도 거절했습니다. 숙식은 자기들이 알아서 할 테니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을 시켜 달라'고 했어요. 그전에는 가끔 의사들을 '에고이스트(이기주의자)'로 여겼는데 아니더군요. 이번에 저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회장께서는 어디서 봉사했습니까? 내과 전공의로서 개인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걸로 들었습니다.
"저는 병원을 후배 의사에게 맡기고 2월 25일부터 열흘간 휴가를 내 동산병원 격리병동 등에서 일했습니다. 그 뒤로는 병원 근무 끝내고 현장으로 나갑니다."
―동산병원 격리병동에는 안철수 대표 부부도 봉사하고 있지 않았나요?
"안 대표 부부는 3월 1일에 왔습니다. 도시락 식사를 함께하면서 '왜 오셨느냐?'고 물으니, '제일 험한 곳에서 봉사하고 싶었다'며 웃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왔다고 봅니다. 일도 잘했습니다. 오늘(15일) 상경하는 걸로 압니다."
―격리병동에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확진자 300명이 입원해 있습니다. 의사 30여명이 상황실을 지키면서 전화로 '밤에 잘 잤나' '열이 없나' '숨차지 않나' 환자들의 증세를 체크한 뒤 처방전을 냅니다. 하루에 한 차례 환자의 검체(檢體)를 채취하고 회진하지요. 간호사들은 3교대로 투입돼 약을 전달하고 링거를 꽂고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며 필요한 처치를 합니다."
―환자들과 사적인 얘기도 나눕니까?
"가능하면 그런 얘기를 안 합니다. 회진을 돌 때 '많이 힘드시조?'라고 따뜻한 말을 건네면, 우는 환자들이 있어요. 코로나의 성질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몹시 불안해합니다. 한편으로는 자기 잘못도 아닌데 감염된 처지에 억울한 감정도 내비칩니다."
―격리병동에서 일할 때 무엇이 특히 힘들었습니까?
"검체 채취나 회진을 하려면 방호복을 입어야 합니다. 강한 압박의 마스크에 고글을 착용하기 때문에 호흡이 곤란합니다. 두세 시간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방호복을 벗으면 온몸이 땀에 젖어 있습니다."
―그 호소문을 보고 얼마나 모였나요?
"대구에서 개원의 등 300여명이 참여했습니다. 낮에는 본업을 하고, 밤이나 주말에 응급실과 격리병동, 선별진료소 근무를 자원했습니다. 병원 문을 닫고 코로나 사태 끝날 때까지 봉사하겠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원로 의료인들도 '나 같은 늙다리 의사는 필요 없나?'라며 신청했습니다. 궂은일을 시켜도 한마디 불평 없이 다들 헌신적으로 해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의병'들은 실제 어떤 일을 맡고 있습니까?
"격리병원에서는 담당 의사들과 함께 검체 채취, 회진, 처방 등을 합니다. 병상 부족으로 입원을 못 한 재가 격리자 2000여명에 대한 전화 상담을 '의병'들이 맡았습니다. 환자들에게 의사와 끈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심리적 안정을 줬을 겁니다. 이를 통해 고위험군의 환자들을 찾아내 우선 입원시키도록 했어요. 아마 세계 유례없는 봉사일 겁니다."
―외지(外地) 의료진도 대구를 돕기 위해 많이 들어왔지요?
"대구시의사회에 접수된 숫자만 40여명이고 개별적으로 온 의사도 있습니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일반 자원봉사자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왔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았고 대구에 연고가 없는데도, 자발적으로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온 의료진은 정말 '영웅'들입니다.
"제가 '지역사회 감염 위험이 있으니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광주시의사회 회원들이 성금 2000만원과 의료 지원품을 들고 왔습니다. 대구와 광주는 '달빛(달구벌+빛고을) 동맹'이라며 의리를 보여준 겁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맞습니다. 이들은 계명대 동산병원 격리병동과 선별검사소에서 2주일 일했습니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 서울 강남보건소장이었던 여성분도 자원봉사자로 대구에 내려왔다고 들었습니다.
"그 딸이 감염될지 모른다고 말렸으나 '나는 평생 독감 한번 걸려본 적 없다. 메르스 사태 경험이 대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분은 선별진료소 등에서 2주일 봉사한 뒤 돌아갔습니다."
―또 기억나는 의사들이 있습니까?
"경남 사천과 거제에서도 '의병'이 몇 명 왔습니다. 이름이 노출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숙식을 제공해주겠다고 해도 거절했습니다. 숙식은 자기들이 알아서 할 테니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을 시켜 달라'고 했어요. 그전에는 가끔 의사들을 '에고이스트(이기주의자)'로 여겼는데 아니더군요. 이번에 저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회장께서는 어디서 봉사했습니까? 내과 전공의로서 개인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걸로 들었습니다.
"저는 병원을 후배 의사에게 맡기고 2월 25일부터 열흘간 휴가를 내 동산병원 격리병동 등에서 일했습니다. 그 뒤로는 병원 근무 끝내고 현장으로 나갑니다."
―동산병원 격리병동에는 안철수 대표 부부도 봉사하고 있지 않았나요?
"안 대표 부부는 3월 1일에 왔습니다. 도시락 식사를 함께하면서 '왜 오셨느냐?'고 물으니, '제일 험한 곳에서 봉사하고 싶었다'며 웃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왔다고 봅니다. 일도 잘했습니다. 오늘(15일) 상경하는 걸로 압니다."
―격리병동에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확진자 300명이 입원해 있습니다. 의사 30여명이 상황실을 지키면서 전화로 '밤에 잘 잤나' '열이 없나' '숨차지 않나' 환자들의 증세를 체크한 뒤 처방전을 냅니다. 하루에 한 차례 환자의 검체(檢體)를 채취하고 회진하지요. 간호사들은 3교대로 투입돼 약을 전달하고 링거를 꽂고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며 필요한 처치를 합니다."
―환자들과 사적인 얘기도 나눕니까?
"가능하면 그런 얘기를 안 합니다. 회진을 돌 때 '많이 힘드시조?'라고 따뜻한 말을 건네면, 우는 환자들이 있어요. 코로나의 성질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몹시 불안해합니다. 한편으로는 자기 잘못도 아닌데 감염된 처지에 억울한 감정도 내비칩니다."
―격리병동에서 일할 때 무엇이 특히 힘들었습니까?
"검체 채취나 회진을 하려면 방호복을 입어야 합니다. 강한 압박의 마스크에 고글을 착용하기 때문에 호흡이 곤란합니다. 두세 시간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방호복을 벗으면 온몸이 땀에 젖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