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乙의 응전 (어수웅 부장, 조선일보)

colorprom 2020. 2. 22. 14:50


    

乙의 응전


조선일보
                         
             
입력 2020.02.22 03:00

[아무튼, 주말- 魚友야담]

어수웅 주말뉴스부장
어수웅 주말뉴스부장



여러 매체의 '2019년 올해의 책' 리스트에 장류진의 단편집 '일의 기쁨과 슬픔'이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 좋은 소설은 입체적 해석이 가능하죠.

이 책을 '을(乙)의 응전', 그것도 경쾌한 응전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갑질을 당한 을이 자기보다 못한 병(丙)에게 '내리 을질'을 하거나,

순진한 영세업자 사장님에게 알바생이 부리는 '생떼 을질'이 아닙니다.

닭가슴살처럼 퍽퍽한 자본주의에서 나름 최선의 밸런스를 찾는 개인의 기민함이자, 센스로서의 응전 말이죠.

표제작에는 판교 테크노밸리의 스타트업 직원, 안나가 등장합니다.

앱의 이름은 우동마켓. 가락국수 파는 스타트업이 아닙니다. '우리동네 중고마켓'의 약자죠.

새로 뜨는 이 중고 거래 앱에 하루 100개씩 글을 올리는, 업자일지, 개인일지 모를 판매자가 등장합니다.

공기청정기, 청소기, 캡슐 커피 머신, 바람막이 점퍼, 홍삼, 레고…. 계통도 맥락도 없는 판매 리스트.


그의 정체를 추적하던 안나는 사연을 알고 경악합니다.

알고 보니 월급으로 현금 말고 포인트를 받아야 했던 신용카드 회사 직원이었던 거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고객 특별 이벤트인 클래식 공연 소식을 가장 먼저 올리려던 회장님 마음을 미처 모르고, 회사 공식 계정으로 공지했다가 받은 어처구니없는 처벌이었죠.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응전'합니다.

받은 포인트로 물건을 사서 '우동마켓'에 내다 파는 거죠.

아무래도 싸게 팔아야 하니 손해 아니냐고요? 직원 아이디 넣으면 할인가 구매가 가능하니 대략 본전.

그리고 물건 주문은 반드시 근무시간에, 우동마켓 거래는 외근 나갈 때, 개인 시간은 절대 안 쓰는 게 원칙!

나름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밸런스를 맞춘다는 거죠.

사설이 길었습니다. 오늘 '아무튼, 주말'의 커버스토리 주제는 '반지하의 역습'입니다.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의 주인공이 된 뒤, 많은 외신은 한국의 반지하를 기획으로 다뤘죠.

한국 빈부 격차와 계층 갈등의 아이콘처럼 말이죠.


분명 진실이지만, 그것만이 진실일까요.

자본주의에 대처하는 개인의 자세는 반지하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최선의 밸런스를 찾는 개인의 기민한 응전과 경쾌한 센스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신종 코로나로 우울하지만, 방 안에서라도 밝은 주말 되시기를.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2/21/202002210255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