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를 꺾고도 쇠락한 스파르타]
유적지 폐허 수준… 10분이면 돌아 - 올리브 나무 무성, 찾는 이 적어
아테네와 쌍벽 이뤘었는데 박물관은 작고 유물도 별로 없어
모든 남자는 군인이 된 군사국가 - 노예 통제 위해 군사력 키워
7세~30세까지 공동 막사 생활… 페르시아 지원 받아 아테네 꺾어
패권 공납금 2배 올려 반발 확산 - 우방이었던 폴리스들도 반란
몰락한 뒤 남자들은 용병 전락… 아테네는 패전 10년만에 부활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그리스 남쪽 끝에 있다. 스파르타는 그 반도에서도 남쪽이니 그리스의 중심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셈이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부와 동부는 대부분 산악 지대다. 아테네에서 들어가려면 험준한 파르논 산맥을 넘어야 한다. 고갯길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맞은편으로 타이게투스 산맥이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스파르타는 이 두 산맥 사이 좁은 평야에 있다. 인구가 2만명에도 못 미치는 작은 지방 도시다. 한때 아테네와 더불어 그리스 세계의 쌍벽을 이뤘던 폴리스란 사실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오늘의 스파르타는 쇠락해있다. 시내 중심부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 규모와 그 안에 소장된 유물 수준은 아테네와 비교하면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눈길이 가는 유물도 딱히 없다. 고대 유적지도 참담하기는 마찬가지다. 외진 주택가와 붙어 있는 고대 유적지는 폐허에 가깝다. 8년 전 처음 방문했을 때는 입장표를 파는 곳도 없었고, 관리인도 찾을 수 없었다. 버려진 스파르타의 옛터에는 올리브 나무만이 무성했다. 작년에 가보니 입구에 작은 매표소도 생겼고, 그럴듯한 울타리도 쳐져 있었다. 그러나 올리브 나무만 무성한 폐허란 사실은 변함없었다. 찾는 이도 역시 거의 없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한때는 동지로 또 한때는 적으로 함께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만들었던 두 도시의 간극이 너무나 넓고 깊다. 스파르타는 왜 이렇게 몰락해버린 것일까?
이웃을 정복하고 노예로 삼다
스파르타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폴리스였다. 감히 쳐들어올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성을 쌓지 않은 유일한 폴리스였다. 그렇게 강한 폴리스를 만들기 위해 스파르타는 엄격하게 구성원들의 삶을 통제했다. 시민에게는 직업 선택 자유가 없었다. 직업은 딱 하나, 군인뿐이었다. 남자 아이들은 일곱 살 때 집을 떠나 서른 살이 될 때까지 공동 막사에서 생활했다. 매일 함께 육체를 단련했고, 군사 훈련을 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용맹, 규율, 명예, 복종과 같은 스파르타의 가치를 익혔다. 정치적 자유도 제한됐다. 시민 모임인 민회는 형식적 기구에 불과했고, 두 왕과 소수 엘리트가 권력을 독점했다. 스파르타 사회가 이렇게 엄격한 군사 중심의 과두제 국가가 된 건 식민지와 노예 때문이었다. 폴리스는 대부분 8세기를 전후해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활발하게 해외로 나아가 식민지를 개척했다. 오직 스파르타만이 해외로 나가는 대신 타이게투스 산맥을 넘어가 풍요로운 이웃 메세니아를 정복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았다(기원전 7~8세기). 메세니아인 수가 스파르타인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통제하려면 막강한 군사력이 필요했다. 스파르타의 모든 시민은 그렇게 군인이 됐다.
스파르타의 명성은 페르시아 전쟁 때 절정에 달했다. 페르시아의 대왕 크세르크세스가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스파르타는 용감하고 명예롭게 싸웠다. 레오니다스 왕은 300명의 특공대와 함께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장렬히 전사했다(기원전 480년). 다음해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결정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스파르타 전사들의 맹활약 때문이었다. 아테네가 살라미스와 미켈레 해전을 이끌며 바다를 지켰다면, 육지를 수호한 건 스파르타였다. 결국 두 도시가 힘을 합쳐 그리스의 자유를 지켜낸 것이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본토에서 물러났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게해를 되찾아와야 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해안가와 섬에 있는 폴리스들은 동맹을 만들어 함께 싸웠다. 육지 국가인 스파르타는 전쟁에서 손을 뗐다. 그 결과 에게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