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11.20 03:12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극장]
- 솔론 개혁 이후에도 정치 불안정
상인·지주 이해 관계 엇갈려 각각 당파 결성해 정치적 갈등… 다수 빈농 지지받는 참주 등장
-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선량한 독재
무력·속임수로 권력 장악했으나 농민 지원하고 교역 기반 확대… 공동체 위한 정책으로 체제 안정
- 비극을 국가 차원에서 후원최
초로 비극 경연대회 진행… 자질·품성 뛰어난 시민 길러내 다른 폴리스보다 경제·문화 융성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https://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11/20/2019112000059_0.jpg)
디오니소스 극장은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있다. 정확하게는 아크로폴리스의 남쪽 경사면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졌고, 로마 시대에 확장 보수를 거쳤던 원형극장이지만 지금은 기본 골격만 남아 있다. 파손이 너무 심해 옛 모습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 때문일까? 아크로폴리스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반면, 디오니소스 극장은 사람들 발길이 뜸하다. 나는 긴 시간을 이 텅 빈 극장에서 보낸다. 파르테논 신전은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지만 디오니소스 극장은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부서진 객석 아무 곳에나 앉으면 된다.
그곳에서 사라져버린 무대와, 무대 뒤로 펼쳐진 아테네 풍광을 즐기며 그리스 비극(悲劇)을 생각한다. 너무나 소중한 순간이다. 비극은 예술과 철학인 동시에 최초의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비극이 탄생하고 성장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매년 이곳에서 비극 경연 대회를 열어 즐겼고, 우승자를 가렸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역사상 처음으로 소수 특권 계층의 여흥을 위해 폐쇄적 공간에서 행하던 예술이 밝은 태양 아래서 다수에게 공개된 것이다. 이때부터 예술과 철학은 소수의 전유물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비극을 통해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의 영혼을 일깨우고 지력(智力)을 고양했다. 그들은 왜 영혼을 일깨우고자 했을까? 왜 지력을 높이려 했을까? 그들이 민주주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무책임한 선동가나 사악한 위선자에게 휩쓸리지 않으려면 건전한 상식과 책임감을 갖춘 시민 계층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테네는 비극을 통해서 그런 시민을 기르고자 했다. 이곳은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민주주의 학교였다. 이곳에서 공연한 비극은 민주주의를 위해 쓴 첫 교과서였다. 그렇다면 누가 비극에 이토록 막중한 역할을 부여했는가? 누가 디오니소스 극장을 예술과 민주주의의 성지로 일궈냈는가? 페이시스트라토스다.
왜 아테네에 참주가 등장했을까?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기원전 527년)는 아테네의 참주(僭主)였다. 참주란 비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사람을 일컫는데,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흔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테네의 유명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대개혁가 솔론(Solon)과도 인척이었다. 그의 등장은 솔론의 개혁 이후 발생한 정치적 불안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솔론의 해법으로 모든 일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의 욕망과 이해가 걸린 일에 만병통치약이란 있을 수 없다. 개혁 이후에도 아테네의 내부 갈등은 계속됐다. 귀족들은 여전히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상인들의 불만도 해소되지 않았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대중의 가난도 쉽게 극복되지 못했다. 이해관계에 따른 당파의 등장은 필연이었다. 바닷가에 살던 상인들은 해안파를, 도시에 살던 지주들은 평원파를 결성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가난하고 소외된 농촌 사람들을 모아 '산악파'라는 제3 당파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사라져버린 무대와, 무대 뒤로 펼쳐진 아테네 풍광을 즐기며 그리스 비극(悲劇)을 생각한다. 너무나 소중한 순간이다. 비극은 예술과 철학인 동시에 최초의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비극이 탄생하고 성장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매년 이곳에서 비극 경연 대회를 열어 즐겼고, 우승자를 가렸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역사상 처음으로 소수 특권 계층의 여흥을 위해 폐쇄적 공간에서 행하던 예술이 밝은 태양 아래서 다수에게 공개된 것이다. 이때부터 예술과 철학은 소수의 전유물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비극을 통해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의 영혼을 일깨우고 지력(智力)을 고양했다. 그들은 왜 영혼을 일깨우고자 했을까? 왜 지력을 높이려 했을까? 그들이 민주주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무책임한 선동가나 사악한 위선자에게 휩쓸리지 않으려면 건전한 상식과 책임감을 갖춘 시민 계층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테네는 비극을 통해서 그런 시민을 기르고자 했다. 이곳은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민주주의 학교였다. 이곳에서 공연한 비극은 민주주의를 위해 쓴 첫 교과서였다. 그렇다면 누가 비극에 이토록 막중한 역할을 부여했는가? 누가 디오니소스 극장을 예술과 민주주의의 성지로 일궈냈는가? 페이시스트라토스다.
왜 아테네에 참주가 등장했을까?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기원전 527년)는 아테네의 참주(僭主)였다. 참주란 비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사람을 일컫는데,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흔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테네의 유명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대개혁가 솔론(Solon)과도 인척이었다. 그의 등장은 솔론의 개혁 이후 발생한 정치적 불안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솔론의 해법으로 모든 일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의 욕망과 이해가 걸린 일에 만병통치약이란 있을 수 없다. 개혁 이후에도 아테네의 내부 갈등은 계속됐다. 귀족들은 여전히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상인들의 불만도 해소되지 않았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대중의 가난도 쉽게 극복되지 못했다. 이해관계에 따른 당파의 등장은 필연이었다. 바닷가에 살던 상인들은 해안파를, 도시에 살던 지주들은 평원파를 결성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가난하고 소외된 농촌 사람들을 모아 '산악파'라는 제3 당파를 만들었다.
![](https://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11/20/2019112000059_1.jpg)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무력과 속임수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해 권력을 장악했다(기원전 546년). 불법이었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던 빈농 계층은 참주의 등장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누가 그를 독재자라 욕하는가?
역사는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예가 대표적이다. 비정상적 방법으로 권력을 얻었지만, 그의 통치는 선정(善政)이었다. 교활할 정도로 똑똑했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의 개혁 정책이야말로 아테네 미래를 위한 최선의 길임을 알았다. 무서울 정도로 집념이 강했던 그는 솔론의 개혁을 굳건히 유지하는 데 힘을 집중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솔론의 개혁에 반대했던 수많은 귀족을 아테네에서 추방했다. 반면에 자신을 지지했던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농기구를 대여하고 영농 자금을 빌려줘 자립의 길을 열어줬다.
누가 그를 독재자라 욕하는가?
역사는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예가 대표적이다. 비정상적 방법으로 권력을 얻었지만, 그의 통치는 선정(善政)이었다. 교활할 정도로 똑똑했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의 개혁 정책이야말로 아테네 미래를 위한 최선의 길임을 알았다. 무서울 정도로 집념이 강했던 그는 솔론의 개혁을 굳건히 유지하는 데 힘을 집중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솔론의 개혁에 반대했던 수많은 귀족을 아테네에서 추방했다. 반면에 자신을 지지했던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농기구를 대여하고 영농 자금을 빌려줘 자립의 길을 열어줬다.
![디오니소스 극장](https://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11/20/2019112000059_2.jpg)
한발 더 나아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공동체 전체를 위한 정책을 펼쳤다. 아테네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그동안 최대의 숙원 사업이었던 수도 시설을 건설함으로써 물 공급 문제를 해결했다. 공공 생활의 중심인 아고라를 대리석으로 새롭게 꾸몄다. 이 같은 대규모 건축 사업은 땅을 한 평도 갖지 못한 빈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농민들을 위해 사법 제도도 개편했다. 바쁜 농민들이 소송 때문에 농지를 떠나 아테네 법정으로 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재판관들을 파견하는 순회 법정을 창설한 것이다. 스스로도 수시로 농촌을 돌며 농민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고통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아테네 시민들의 삶은 급속도로 나아졌고, 체제의 안정과 효율도 개선됐다. 참주는 대외 정책에도 심혈을 기울여 아테네의 생명선인 흑해 교역로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했다. 대규모 곡물을 흑해 주변에서 수입해와야 하는 아테네로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가장 크게 업적을 남긴 분야는 그러나 문화와 교육이었다. 그 업적의 혜택은 당대의 아테네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를 거쳐 전 인류에게 파급될 정도로 굉장한 것이었다. 바로 비극을 국가 차원으로 끌어올려 전폭적으로 후원하고, 시민들의 일상과 융합한 것이다. 최초의 비극 경연 대회는 기원전 534년에 열렸다. 시간이 갈수록 비극은 문화 예술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민주주의라는 미증유의 길을 개척해가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인간의 본질과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일깨우고 가르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이 위대한 비극 경연 대회의 진행을 국비가 아니 사비로 충당했다.
누가 진정한 민주주의자인가?
그는 20년간 선정을 베풀고 죽었다. 장기간의 평화와 번영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여전히 그리스 세계에서 이류 폴리스에 불과했다. 군사적으로는 스파르타가 독보적이었고, 상업적으로는 밀레투스나 코린토스에 밀렸다. 그러나 발전 속도와 방향 면에서 아테네는 모든 폴리스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솔론의 개혁이 굳건하게 유지됨으로써 튼튼한 중산 계급이 형성됐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후원한 비극은 그 어떤 폴리스의 시민들보다 뛰어난 자질과 품성을 갖춘 시민들을 길러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이, 아테네인 스스로가 이때를 '황금기'로 기억할 만큼 참주의 치세는 아테네의 번영과 도약의 디딤돌이 됐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테네인으로서, 지도자로서 해야 할 일을 다했다. 그 결과는 아테네 경제와 문화의 비상(飛上),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찬란한 업적으로 이어졌다. 이곳 디오니소스 극장은 그의 업적을 침묵 속에 우리에게 전한다. 이곳에 서면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누가 진정한 민주주의자인가?' 우리는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를 위한다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부수고, 결국 민주주의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일까? 나는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위선자들보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좋다. 그래서일까? 그가 비극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선보여 민주주의를 고양했던 디오니소스 극장이 좋다. 차마 떠나기 아쉬운 곳이다.
[그 시대 최고의 비극 작가는 소포클레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가장 크게 업적을 남긴 분야는 그러나 문화와 교육이었다. 그 업적의 혜택은 당대의 아테네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를 거쳐 전 인류에게 파급될 정도로 굉장한 것이었다. 바로 비극을 국가 차원으로 끌어올려 전폭적으로 후원하고, 시민들의 일상과 융합한 것이다. 최초의 비극 경연 대회는 기원전 534년에 열렸다. 시간이 갈수록 비극은 문화 예술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민주주의라는 미증유의 길을 개척해가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인간의 본질과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일깨우고 가르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이 위대한 비극 경연 대회의 진행을 국비가 아니 사비로 충당했다.
누가 진정한 민주주의자인가?
그는 20년간 선정을 베풀고 죽었다. 장기간의 평화와 번영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여전히 그리스 세계에서 이류 폴리스에 불과했다. 군사적으로는 스파르타가 독보적이었고, 상업적으로는 밀레투스나 코린토스에 밀렸다. 그러나 발전 속도와 방향 면에서 아테네는 모든 폴리스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솔론의 개혁이 굳건하게 유지됨으로써 튼튼한 중산 계급이 형성됐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후원한 비극은 그 어떤 폴리스의 시민들보다 뛰어난 자질과 품성을 갖춘 시민들을 길러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이, 아테네인 스스로가 이때를 '황금기'로 기억할 만큼 참주의 치세는 아테네의 번영과 도약의 디딤돌이 됐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테네인으로서, 지도자로서 해야 할 일을 다했다. 그 결과는 아테네 경제와 문화의 비상(飛上),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찬란한 업적으로 이어졌다. 이곳 디오니소스 극장은 그의 업적을 침묵 속에 우리에게 전한다. 이곳에 서면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누가 진정한 민주주의자인가?' 우리는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를 위한다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부수고, 결국 민주주의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일까? 나는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위선자들보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좋다. 그래서일까? 그가 비극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선보여 민주주의를 고양했던 디오니소스 극장이 좋다. 차마 떠나기 아쉬운 곳이다.
[그 시대 최고의 비극 작가는 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https://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11/20/2019112000059_3.jpg)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해 시작된 비극의 시대는 전설적인 비극 작가들을 탄생시켰다. 이른바 그리스 시대의 '3대 비극 작가'라 불리는 아이스킬로스(Aeschylus·기원전 525년경~기원전 455년경), 에우리피데스(Euripides·기원전 484년경~기원전 406년), 소포클레스(Sophocles·기원전 496년경~기원전 406년·사진)가 그들이다. 비극 경연대회는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에서 열렸다. 처음에는 비극만 상연됐으나, 후대에 이르러 희극도 더해졌다(기원전 486년). 여러 기록에 따르면 3대 비극 작가의 우승 횟수는 소포클레스가 18회로 가장 많고, 아이스킬로스(13회), 에우리피데스(4회) 순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신과 영웅, 왕족이지만 주제는 언제나 폴리스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시민의 의무와 연결됐다. 무엇보다 시민들에게 휴브리스(hubris·오만)와 무지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민주주의 시민을 위한 예술이었던 만큼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쇠퇴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비극의 주인공은 신과 영웅, 왕족이지만 주제는 언제나 폴리스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시민의 의무와 연결됐다. 무엇보다 시민들에게 휴브리스(hubris·오만)와 무지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민주주의 시민을 위한 예술이었던 만큼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쇠퇴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리스 에피다우로스의 고대 극장에서 공연 중인 메데이아(에우리피데스 작)의 한 장면.](https://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11/20/2019112000059_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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