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10.11 05:00
항공편을 이용해 베네치아로 출장 가는 여행자들은 마르코 폴로 공항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리라. 2018년 기준 1천118만 명의 승객이 이용한 명실공히 국제적인 공항이다.
이 도시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들을 모두 제치고 왜 마르코 폴로에게 공항 이름을 헌정한 것일까? 위대한 베네치아 상인 정신에 대한 오마주인 것이다.
이 도시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들을 모두 제치고 왜 마르코 폴로에게 공항 이름을 헌정한 것일까? 위대한 베네치아 상인 정신에 대한 오마주인 것이다.
![](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10/10/2019101001598_0.png)
마르코 폴로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1254년에 태어났을 것이라 대체로 추정한다. 그가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삼촌과 함께 돈 벌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아버지 폴로 형제는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시작으로 중동지방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골 영토까지 진입해 쿠빌라이 칸을 만난 후 베네치아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들 마르코는 15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고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어찌 그럴 수 있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현대의 눈으로 평가한 것이다. 베네치아의 남자들은 성장하면 무조건 바다로 나가야 했다. 가족들 먹여 살리기 위해 10년 이상을 해외에서 떠돌아 다닌 남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것이 당시 베네치아의 절박한 상황이었다. 무슨 뜻인가? 1786년 가을 이 도시를 찾은 또 다른 위대한 여행자 괴테의 말을 잠시 들어보자.
"그들에겐 물이 거리와 광장과 산책로를 대신했다. 베네치아가 다른 도시와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성격의 도시인 것처럼 베네치아 사람들도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뱀처럼 구불거리는 대운하는 세계의 어떤 광장도 산 마르코 광장 앞의 공간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공간이란 이 편의 베네치아 본토에 의해 반달 모양으로 둘러싸여 있는 넓은 바다 수면을 말한다."
아버지 폴로 형제는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시작으로 중동지방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골 영토까지 진입해 쿠빌라이 칸을 만난 후 베네치아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들 마르코는 15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고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어찌 그럴 수 있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현대의 눈으로 평가한 것이다. 베네치아의 남자들은 성장하면 무조건 바다로 나가야 했다. 가족들 먹여 살리기 위해 10년 이상을 해외에서 떠돌아 다닌 남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것이 당시 베네치아의 절박한 상황이었다. 무슨 뜻인가? 1786년 가을 이 도시를 찾은 또 다른 위대한 여행자 괴테의 말을 잠시 들어보자.
"그들에겐 물이 거리와 광장과 산책로를 대신했다. 베네치아가 다른 도시와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성격의 도시인 것처럼 베네치아 사람들도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뱀처럼 구불거리는 대운하는 세계의 어떤 광장도 산 마르코 광장 앞의 공간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공간이란 이 편의 베네치아 본토에 의해 반달 모양으로 둘러싸여 있는 넓은 바다 수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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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말은 베네치아 사람들의 탁월한 인식전환을 말한다. 베네치아는 땅이 없고 부존자원도 없었다. 그들은 눈을 바다로 돌렸다. 많은 사람들에게 바다는 이별과 공포 죽음의 공간을 의미했지만 그들은 그곳을 생명과 도전, 해외시장으로 인식했다.
마르코 폴로가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배를 타고 고향 베네치아를 떠난 것은 1271년이었다. 그의 나이 17살 때의 일이다. 그 사이 그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베네치아 상인이 되기 위한 기초 교육을 충실히 이수하였다. 상업 교육과 상선(商船)을 다루는 기술 등이 포함되었다.
아버지와 삼촌이 마르코를 데리고 또 다시 죽음을 무릅쓰고 먼 여행에 나선 이유는 뭘까? 그것은 원나라 쿠빌라이 칸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힘들게 구축한 왕실과의 독자적인 무역관계를 잃을까 두려웠다.
시장개척을 위해 평생을 길 위에서 보냈던 그들이기에 거래처와의 약속은 곧 생명이나 다름 없었다. 마르코 폴로의 이름이 유명하지만 사실은 아버지 니콜로(Nicolo)와 삼촌 마페오(Maffeo) 폴로가 어쩌면 더 대단한 사람들이다.
유럽이 아직 중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13세기에 한 번도 아닌 두 번에 걸쳐 거친 바다를 건너고 모래 사막과 험한 산악지대를 넘어 몽골이 지배하고 있던 중국 대륙까지 다녀왔으니 말이다. 뼛속까지 베네치아 상인의 혼(魂)이 담긴 인물들이다.
마르코 폴로가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배를 타고 고향 베네치아를 떠난 것은 1271년이었다. 그의 나이 17살 때의 일이다. 그 사이 그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베네치아 상인이 되기 위한 기초 교육을 충실히 이수하였다. 상업 교육과 상선(商船)을 다루는 기술 등이 포함되었다.
아버지와 삼촌이 마르코를 데리고 또 다시 죽음을 무릅쓰고 먼 여행에 나선 이유는 뭘까? 그것은 원나라 쿠빌라이 칸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힘들게 구축한 왕실과의 독자적인 무역관계를 잃을까 두려웠다.
시장개척을 위해 평생을 길 위에서 보냈던 그들이기에 거래처와의 약속은 곧 생명이나 다름 없었다. 마르코 폴로의 이름이 유명하지만 사실은 아버지 니콜로(Nicolo)와 삼촌 마페오(Maffeo) 폴로가 어쩌면 더 대단한 사람들이다.
유럽이 아직 중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13세기에 한 번도 아닌 두 번에 걸쳐 거친 바다를 건너고 모래 사막과 험한 산악지대를 넘어 몽골이 지배하고 있던 중국 대륙까지 다녀왔으니 말이다. 뼛속까지 베네치아 상인의 혼(魂)이 담긴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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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모험 끝에 원나라 궁전에 도달한 폴로 일행을 접견한 쿠빌라이 칸 황제는 크게 환대한다. 특히 젊은 청년 마르코에게 관심을 표시했다. 마르코는 4개국어에 능해서 황제와 의사소통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마르코 폴로는 요즘 유행어로 한다면 ‘혼구’의 소유자였다. ‘혼(魂)이 들어있는 구라’의 능력자라는 뜻이다. 의미 있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스토리텔링 능력을 말한다. 덕분에 17년 동안 몽골 황제의 신임을 받아 남다른 궁정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마르코 폴로가 고향인 베네치아의 리알토 다리에 도착한 것은 1295년이었다. 고향을 떠난 지 24년 만의 일이며 여행 루트를 합하면 2만4천 킬로미터나 된다. 그의 품에는 진귀한 보물과 재산이 가득 안겨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이 위대하기는 하지만 유일한 것도 아니고 최초도 아니었다. 드물지만 앞서서 중국 땅을 밟은 서양의 여행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왜 마르코 폴로의 업적이 위대하다고 하는가?
게다가 마르코 폴로는 요즘 유행어로 한다면 ‘혼구’의 소유자였다. ‘혼(魂)이 들어있는 구라’의 능력자라는 뜻이다. 의미 있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스토리텔링 능력을 말한다. 덕분에 17년 동안 몽골 황제의 신임을 받아 남다른 궁정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마르코 폴로가 고향인 베네치아의 리알토 다리에 도착한 것은 1295년이었다. 고향을 떠난 지 24년 만의 일이며 여행 루트를 합하면 2만4천 킬로미터나 된다. 그의 품에는 진귀한 보물과 재산이 가득 안겨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이 위대하기는 하지만 유일한 것도 아니고 최초도 아니었다. 드물지만 앞서서 중국 땅을 밟은 서양의 여행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왜 마르코 폴로의 업적이 위대하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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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쿠빌라이 칸의 궁정생활은 지금까지 서양인들 가운데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던 매우 이례적이며 소중한 자산이다. 동시에 그는 탁월한 기록 정신의 소유자였다. 책을 써서 세상에 알렸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가 자신과 아버지, 삼촌의 모험담을 담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전혀 뜻밖의 상황에 처해있을 때였다. 베네치아의 라이벌 제노바와의 전쟁에 시민의 의무로 참여했다가 그만 포로로 잡혀 제노바의 감옥에 투옥된 것이다.
대개의 사람은 그 시간을 좌절하면서 보내지만 역시 마르코 폴로다웠다. 그 고통스런 시간마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낼 줄 알았다.
마르코 폴로가 자신과 아버지, 삼촌의 모험담을 담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전혀 뜻밖의 상황에 처해있을 때였다. 베네치아의 라이벌 제노바와의 전쟁에 시민의 의무로 참여했다가 그만 포로로 잡혀 제노바의 감옥에 투옥된 것이다.
대개의 사람은 그 시간을 좌절하면서 보내지만 역시 마르코 폴로다웠다. 그 고통스런 시간마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낼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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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감옥 안에서 피사 출신의 작가 루스티첼로(혹은 루스티차노)를 만난다. 마르코 폴로는 말하는 데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지만 문장능력은 없었다. 때문에 그가 모험담을 구술하고 루스티첼로가 글로 옮겼다.
그 결과 세상에 나온 책이 ‘일 밀리오네’(Il Milione), ‘백만 가지 이야기’라는 뜻이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세계의 서술’, ‘항해와 여행에 대해서’ 등의 여러 가지 제목으로도 나왔다. 한국에서는 ‘동방견문록’으로 번역되었다. 원본은 조악한 프랑스어로 쓰여졌지만, 그나마도 아쉽게 사라졌다.
그의 책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그는 ‘백만 가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말하는 이야기꾼’이라는 뜻의 ‘마르코 밀리오네(Marco Millione)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겠는가?
1324년에 마르코 폴로의 임종을 지켰던 신부조차 죽기 전 자신이 했던 이야기 중에 취소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어볼 정도였다. 마르코 폴로는 볼멘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채 쓰지 못했단 말이에요."
이런 평판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지속되었다. 여행기에 만리장성이 언급되지 않는 등의 이유로 진실성에 의심도 받았다. 시간이 흘러 주로 20세기에 이뤄진 여러 사람들의 여행과 학술조사 과정을 통해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 중 오류도 있지만 대부분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만리장성은 마르코 폴로가 목격했던 몽골제국의 원나라가 아닌 그 이후 명나라 때 현재의 모습으로 세워졌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 결과 세상에 나온 책이 ‘일 밀리오네’(Il Milione), ‘백만 가지 이야기’라는 뜻이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세계의 서술’, ‘항해와 여행에 대해서’ 등의 여러 가지 제목으로도 나왔다. 한국에서는 ‘동방견문록’으로 번역되었다. 원본은 조악한 프랑스어로 쓰여졌지만, 그나마도 아쉽게 사라졌다.
그의 책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그는 ‘백만 가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말하는 이야기꾼’이라는 뜻의 ‘마르코 밀리오네(Marco Millione)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겠는가?
1324년에 마르코 폴로의 임종을 지켰던 신부조차 죽기 전 자신이 했던 이야기 중에 취소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어볼 정도였다. 마르코 폴로는 볼멘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채 쓰지 못했단 말이에요."
이런 평판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지속되었다. 여행기에 만리장성이 언급되지 않는 등의 이유로 진실성에 의심도 받았다. 시간이 흘러 주로 20세기에 이뤄진 여러 사람들의 여행과 학술조사 과정을 통해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 중 오류도 있지만 대부분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만리장성은 마르코 폴로가 목격했던 몽골제국의 원나라가 아닌 그 이후 명나라 때 현재의 모습으로 세워졌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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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 온 많은 사람들은 시간을 내서 그의 자취를 찾아 걷는다. 마치 오디세이를 방불케하는 그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에게 상상력과 꿈의 폐활량을 마음껏 넓혀주었다.
[미니정보]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 따라 걷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하여금 신대륙을 발견토록 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다. 콜럼버스는 신세계로 떠나는 짐 안에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를 챙겨갔으며 배 안에서 책장 마다 일일이 메모를 남기며 읽고 또 읽었 다 한다.
마르코 폴로가 활동했던 13세기 후반, 한반도는 ‘홀도로게리미실’이란 이름의 몽골 공주가 고려 왕실로 시집온 것을 시작으로 ‘충’(忠)자 이름이 들어가는 왕들이 집권하던 때다. 무려 700년 훨씬 전의 일이다. 그때 이미 마르코 폴로는 이미 해외 시장개척을 위해 걷고 또 걷고 있었다. 그를 가리켜 위대한 베네치아 상인의 아들이라 말하는 이유다.
[미니정보]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 따라 걷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하여금 신대륙을 발견토록 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다. 콜럼버스는 신세계로 떠나는 짐 안에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를 챙겨갔으며 배 안에서 책장 마다 일일이 메모를 남기며 읽고 또 읽었 다 한다.
마르코 폴로가 활동했던 13세기 후반, 한반도는 ‘홀도로게리미실’이란 이름의 몽골 공주가 고려 왕실로 시집온 것을 시작으로 ‘충’(忠)자 이름이 들어가는 왕들이 집권하던 때다. 무려 700년 훨씬 전의 일이다. 그때 이미 마르코 폴로는 이미 해외 시장개척을 위해 걷고 또 걷고 있었다. 그를 가리켜 위대한 베네치아 상인의 아들이라 말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