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한국전쟁]

6·25 장진호 전투 참전 용사 헨리 셰이퍼·밀턴 워커씨 방한

colorprom 2019. 10. 1. 16:12



    

"한국인이여, 우리 희생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오"


조선일보
                         
             
입력 2019.10.01 03:00

6·25 장진호 전투 참전 용사 헨리 셰이퍼·밀턴 워커씨 방한
"영하 30도, 중공군 나팔소리… 70년 지났어도 귀에 생생해"

"오늘의 선진 일류 국가를 이룩한 바탕에는 극한의 장진호에서 보여준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지난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가 주관하는 '장진호 전투 영웅 추모식'이 열렸다. 미국에서 온 6·25 참전 용사들이 유엔 참전국 전사자 이름이 새겨진 명비(名碑) 앞에 국화 한 송이를 헌화했다. 미국 국가가 흘러나오자 노병(老兵)들은 연주에 맞춰 의수 경례를 했다. 7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은 이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지난 27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장진호 참전 용사 헨리 셰이퍼(오른쪽)씨와 밀턴 워커씨가 약 70년 만에 한국 땅을 다시 밟은 소감을 말하고 있다.
지난 27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장진호 참전 용사 헨리 셰이퍼(오른쪽)씨와 밀턴 워커씨가 약 70년 만에 한국 땅을 다시 밟은 소감을 말하고 있다. 오른팔에 총상을 입은 셰이퍼씨는 의수를 하고 있다. /남강호 기자
대열 중 가장 앞에 있던 헨리 셰이퍼(89)씨와 밀턴 워커(90)씨는 미 해병대 사상 최대 피해를 입은 전투 중 하나인 '장진호(長津湖) 전투'에 참가했다. 1950년 11월 26일 미 10군단 예하 해병 1사단은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까지 북진했다 중공군의 매복 작전에 걸렸다. 17일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다. 2500명이 전사하고 8000명이 동상(凍傷)을 입는 등 1만80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현재 장진호 전투 생존자는 1000명 이하인 것으로 보훈처는 보고 있다.

지난 27일 오후 만난 셰이퍼씨와 워커씨는 1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에서 회상에 젖어들었다. 셰이퍼씨는 "제발 살아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차마 그 말을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1948년 미군에 입대한 그는 5연대 소속 병장으로 북한군을 38선 위쪽으로 밀어내는 전투에 참가했다. 그해 10월 조카에게 '19번째 생일을 무사히 보내게 되면 80세까지 살 수 있을 거다'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11월 장진호 서안 유담리에서 전투를 치르다 중공군에게 포위됐다. 철수 명령을 받고 참호에서 나오던 중 중공군의 기관총이 양쪽 팔과 옆구리 등 그의 몸 네 곳을 관통했다. 셰이퍼씨는 "동료가 저를 질질 끌고 언덕을 내려와 지프에 태웠다"고 했다. 13번의 수술을 거쳐 오른팔과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다. 동상으로 왼발의 일부분도 잃어버렸다.

당시 미군의 또 다른 적은 영하 30도에 육박하는 매서운 추위였다. 아칸소주에서 온 워커씨는 "그때 추위를 생각하면 어이없는 웃음만 난다"고 했다. 그는 "땀에 전 군화를 벗을 때마다 손발이 고통스러웠다"며 "총기는 매번 불발됐고, 부상병에게 써야 할 수혈관과 모르핀조차 얼어붙었다"고 했다. 손과 발에 동상이 걸린 채로 3주를 공중의 보급품에 의지했다. 운전병(상병)으로 복무했던 그는 "중공군의 습격을 받아 지프에 실어놓은 전투식량과 쿠키가 모두 날아가자 절망만 남았다"고 했다. 중공군은 연대 이하에 무선통신 장비가 따로 없어 나팔과 뿔피리, 꽹과리 등을 치면서 밀고 내려왔다. 워커씨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공포의 소리가 귀에 생생하다"고 했다.

두 사람은 "기억이 흐려지는 시점에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우리는 행운아들(lucky ones)"이라고 했다. 셰이퍼씨는 고향으로 돌아가 교사로 일했다. 결혼을 해 딸 다섯, 손자 여섯을 봤다. 최근엔 증손자도 태어났다. 워커씨의 자손은 대(代)를 이어 군에서 일하고 있다. 이번 방문에 동행한 장남은 공군 장교, 손자는 주일 미군에서 해병으로 복무 중이다.

두 사람은 "한강의 기적을 일군 한국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며 "70년이 지나도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서로가 초면이라는 노병은 인터뷰를 마치고 한동안 손을 잡은 채 서로 위로했다. 자리를 뜨면서 한마디를 남겼다. "우리의 희생이 숭고하고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이었음을 한국인들이 계속해서 증명해 주시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0/01/201910010017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