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을 기점으로 세상은 크게 달라졌다. 첫 세계 전쟁을 겪은 인류는 지금껏 겪지 못한 결핍과 상실의 세기와 마주쳤다. 청년 화가 에곤 실레(1890 ~1918)는 쇄골과 등뼈가 드러난 남성과 여성의 누드, 성애에 빠진 연인을 주로 그렸다. 22세 때 미성년자 누드화를 소지한 혐의로 체포당했다. 경찰이 찾은 100점이 넘는 외설적 그림으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 근교 툴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툴른역 역장이고, 어머니는 체코인이었다. 매독과 정신착란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어머니는 방치했다. '늘 슬픔에 빠져있던 고귀한 아버지'를 나 몰라라 하는 어머니를 그는 용서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편협한 도덕률과 냉정함에 혐오감을 드러내는 동안 불행이 싹텄다.
두 살 때 색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16세 때 빈 미술 아카데미에 조기 입학했다. 하지만 3년 만에 중퇴하고, 빈 화단을 이끄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인체의 곡선미와 정교함이 두드러진 회화는 클림트의 영향이었다. 1909년 신예술가협회 창립을 거들고, 1911년경부터 표현주의 화가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늘 곤궁한 살림을 꾸렸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돈은 악마야!"라고 쓴 편지는 "빚에서 좀 벗어났다면 한결 살 만했을 텐데…"라는 탄식으로 끝났다. 어머니가 돈을 요구할 때마다
"저는 지금 가진 돈이 없어요. 저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어요"라고 답장을 썼다.
스페인 독감이 유럽 전역을 휩쓸며 2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가던 때였다. 1918년 10월 말경, 에곤 실레와 임신 여섯 달째인 아내가 스페인 독감에 걸려 부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떴다. 세기의 비참과 불운으로 누더기 된 에곤 실레의 삶은 28세로 끝났다. 요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