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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의 기적 (이주윤, 조선일보)

colorprom 2019. 8. 13. 18:25


    

[일사일언] 샤워의 기적


조선일보
                         
  • 이주윤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저자
             
입력 2019.08.13 03:00

이주윤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저자
이주윤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저자
밤이면 밤마다 씻기 싫어 몸부림친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여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날에는 더욱 그렇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였음에도 '씻겨 주는 기계'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하는 개발자들이 원망스럽고,
후딱 씻고 나오면 그만인 것을 씻기 싫다 징징대며 잠 못 이루는 스스로가 한심스럽다.
그럴 때면 빅토리아 아주머니를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곤 한다.
그녀가 나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를 곱씹다 보면 욕실로 향할 용기가 생겨나는 이유에서다.

그녀는 내가 다녔던 '빅토리아 미용실'의 원장으로
곱슬곱슬한 내 머릿결에 핀잔을 주거나 대답하기 곤란한 사적인 질문을 퍼붓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손님에 대한 배려가 각별해서라기보다는
본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녀의 수다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릴 줄 아는 묘한 언변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했던 대부분의 이야기를 잊었으나 내 머리를 감겨 주며 했던 이 말만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물보다 더 신비한 게 있나 싶어. 온갖 걸 다 씻어내고 닦아내잖아.

어느 날 일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세수를 하는데 그때 얼굴에 와 닿던 물의 감촉, 그 부드러운 느낌.

위로받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지 눈물이 콱 쏟아지는 거야 그냥.

근데 정말 신기하지. 물이 눈물까지 싹 가져가면서 언제 울었나 싶게 말끔해지잖아.

이건 기적이야. 기적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거야."

나는 그녀가 말한 기적을 맛보기 위해 샤워기 아래에 선다.

수정(水晶)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물방울들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온몸에 들러붙어 있던 끈적한 땀은 물론 하루의 고단함,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에 대한 미움,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걱정까지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티 없이 깨끗한 몸으로 침대에 눕자 그제야 사르르 잠이 쏟아진다.


빅토리아, 당신 말씀대로 이건 정말 기적이로군요.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13/20190813002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