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아폴로 11호 (조선일보,중앙일보)

colorprom 2019. 7. 23. 16:48




[윤희영의 News English] 아폴로 11호의 우주인 3명, 나치 전범 3명


선일보

                         
  • 윤희영 편집국 에디터
             
입력 2019.07.23 03:11 | 수정 2019.07.23 06:20

아폴로 11호 달 착륙(moon landing) 50주년 행사가 미국 곳곳에서 열렸다.
그러나 그 뒤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inconvenient truth)'에 대해선 모두들 쉬쉬했다(hush up).

아폴로 11호 우주인 3명이 달에 착륙했을 때
휴스턴 우주센터에선 대량 학살을 자행했던(perpetrate mass murder) 나치 전범 3명
서로 껴안으며(embrace each other) 만세를 불렀다.
런던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리고(obliterate London without trace)
독일을 패전에서 구하겠다며 V2 로켓을 개발한 베르너 폰 브라운, 쿠르트 데부스, 아서 루돌프
나치 과학자 삼총사였다.

[윤희영의 News English] 아폴로 11호의 우주인 3명, 나치 전범 3명
달 착륙은 이 전범들의 작품(brainchild of these war criminals)이었다.
아폴로 11호 임무에는 이들 3명을 필두로 130여 명의 나치 과학자들이 동원됐다.
2만여 명의 무고한 인명(innoccent lives)이 그들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그 잔학 행위를 숨기려는 '음모'('conspiracy' to conceal the atrocities)에 묻혀버렸다.

V2 로켓 생산 총책이었던 아서 루돌프는 17년 후 아폴로 제작 책임자로 변신했다.
나치 시절 작업이 부진한 유대인의 목을 생산 라인에 매달게 하고
(hang them above the production line)
그 시체를 며칠간 매달려 있게 했던(leave the bodies dangling) 인물이다.

12명을 한꺼번에 매달아놓기도 했다.
양손은 뒤로 묶고 입에는 비명을 못 지르게 나뭇조각을 물린 채
(with hands behind their backs
and a piece of wood in their mouths to prevent them crying out)였다.

당시 친위대 소령 계급장을 달고 있던 폰 브라운은 아무런 표정 없이 그 앞을 오가곤 했다.

종전 직후 미군 특수부대는 '종이집게 작전(Operation Paperclip)'에 착수했다.
로켓 기술이 약 25년 앞서 있는 나치폰 브라운 팀소련에 넘어가기 전에 빼돌리는 작전이었다.
그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수백 구의 시체는 거들떠보지
(pay attention to the hundreds of corpses scattered across the area) 않았다.

폰 브라운 팀은 비밀리에 텍사스로 이송됐다.
나치 피해자들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에서 간신히 연명하는데
(struggle to keep body and soul together in wartorn Europe)
가해자인 그들은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enjoy a life of ease) 됐다.
이들의 기술을 이용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영주권자가 되게
(conceal their identities and become permanent residents) 해줬다.

급기야 폰 브라운은 1962년 아폴로 계획 총책임자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이뤄드리겠다(fulfill your promise)"고 호언했고,
마침내 1969년 7월 20일 나치 전범 3명은 우주인 3명과 함께 세계의 영웅이 됐다.

닐 암스트롱이 말했던
"사람에게는 작은 발걸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이런 '수치스러운 진실'을 짓밟고(trample on a 'shameful truth') 이뤄졌던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22/2019072202730.html


김병규(gbksc****)2019.07.2309:47:37신고
V2 로켓 독일이 개발한 미사일입니다. 영화로도 많이 소개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개발하여 영국을 향해 발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기술을 바탕으로 지금도 미사일 개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건 그 좋은 머리와 기술을 전쟁에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독일이 패망했어도 선진국인데 로켓타고 달에 갔다는 얘기는 못들어 보았네요.
미국은 돈이 많아서 그런지 달에 자주 가더라고요 역시 미국은 강대국이죠,
개인적인 생각인데 트럼프 대통령을 태워서 달에 보내면 좋을거 같습니다.
왜냐구요? 워싱턴에서 맹활약중인?? 강인선 부장님도 달나라 구경해보시라구요^^
오늘은 옛 속담 원님덕에 나팔분다는말 생각나는 하루 입니다..
공일호(ilho****)2019.07.2309:08:48신고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정말 조선일보는 바보일보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 歷史的으로 유명한 이 문구에 대해서 검증을 철저히 해라.
정확한 문구는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이다.
그냥 "man" 이 아니라 "a man" 이다. 그 문법적인 차이를 모르면 영어한다고 자랑하지 마라.
미항공우주국 홈피에 접속해서 확인해 봐라.
인터넷에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놈들이 不定冠詞 또는 定冠詞를 자기들 마음대로 무시하고 文法的으로 틀린 문구를 지네들 마음대로 사회관계망에 올린다.
조선일보는 반성해라. 세계有數의 신문을 자랑하는 조선일보가 언제 이런 추락을 멈출 것인가?
英語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정관사, 부정관사, 단수.복수, 時制(tense)이다.
나머지는 공부하면 되는데 이 중학교 1학년 문법은 내가 흰 종이에 작문할려면 나를 항상 괴롭힌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22/2019072202730.html


탐사는 내 인생 오점"···'달의 저주' 평생 시달린 우주인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지 20일로 50주년이다.
아폴로 11호 선장 암스트롱(1930~2012)과 버즈 올드린(89)의 이름은 역사에 빛난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행복했을까.
외신과 관련 서적을 종합해보면 답은 ‘아니오’에 가깝다.

올드린
“달 탐사를 끝내고 귀환하자 세상은 우리를 격찬했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런 상황에 무방비 상태였다”며
“우린 그저 공학자이자 과학자, 전투기 조종사였는데 갑자기 대스타가 됐고
나를 비롯한 모두에게 버거운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아폴로 11호의 세 주인공들. 왼쪽부터 닐 암스트롱 선장,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 탐사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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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암스트롱은 지구로 귀환한 뒤 영웅이 됐지만,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렸다.
과묵하고 내성적이었지만 달 탐사 이후엔 “염세적 성격으로 변했다”는 말도 나왔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원치 않았던 그는 항공우주국(NASA) 내근을 택했지만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영국 가디언지에 따르면 그는 사인 공세에 특히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NASA의 한 후배가 그에게 사인을 요청하자 “난 사인 안 한다”고 뿌리쳤던 일화도 있다.
기분이 상한 그 후배는 “암스트롱은 왜 그리 적대감으로 똘똘 뭉쳤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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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부즈 올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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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트롱도 할 말은 있다.
폭발적 인기에 힘입어 그의 사인이 경매에서 거액에 판매가 되면서 사기 행각마저 벌어졌기 때문이다.
아폴로 11호 달 착륙 25주년인 1994년엔 그는 아예 “앞으로 사인은 안 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25주년이었던 94년 7월20일엔
그가 고문역을 맡았던 에너지 관련 회사의 회의에 참석하는 평범한 일정을 소화했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한 인물은 텔레그래프에
“25주년 관련해 뭔가 (암스트롱이) 말을 꺼낼 거라고 모두 기대했는데, 한마디도 안 했다”고 전했다.
25주년은 그에게 상처만을 남겼다. 부인과 이혼을 한 것도 이때였다.

그가 스포트라이트를 피할수록 세상은 그를 더욱 원했다.
2004년엔 급기야 그의 머리카락 한 움큼이 3000달러(약 352만원)에 거래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의 단골 이발사인 막스 사이즈모어는 유명인의 기념품 경매를 전문으로 하는 토드 뮬러라는 이에게
“머리카락 조금만 갖다 주면 후사하겠다”는 말을 듣고 암스트롱 몰래 세 차례 그의 머리카락을 판매했다.
사이즈모어는 텔레그래프에 “처음엔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면서도
“이발 후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재빨리 주워 담아서 몇 번 판매했다”고 말했다.
이를 알게 된 암스트롱은 버럭 화를 내고 사이즈모어의 이발소에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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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닐 암스트롱이 아폴로 11호 달 탐사 임무 때 소지하고 있던 골드메달이 경매에 부쳐져 205만 달러(약 24억 원)에 낙찰됐다.

암스트롱은 생전 자신의 사인이며 머리카락 등이 경매에 부쳐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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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트롱한국과의 인연도 있다. 6ㆍ25에 참전해 전투기를 몰고 78차례 출격을 한 경력이 있다.
그의 전기인 『퍼스트맨』의 저자 제임스 R. 핸슨에 따르면
암스트롱의 주요 임무는 정찰기 호위 및 철로ㆍ다리 등에 폭탄을 투하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핸슨은 “어느 날 팬서 전투기를 타고 비행을 하던 암스트롱은 비무장 상태인 북한 군인들이 막사 밖에서
아침체조를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며 “기관총 사격으로 그들을 죽일 수도 있었으나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고 한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이들을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암스트롱은 결국 고향인 오하이오로 돌아가 작은 농장에서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다 201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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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11호에 탑승했던 버즈 올드린이 지난 12일 우주비행사들이 사용하는 각종 장비를 진열한

무대에 올라 자신의 달 착륙 경험을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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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뒤를 따라 두 번째로 달 표면을 밟은 올드린은 좀 더 쾌활한 편이었다.
그는 곧 NASA의 홍보 담당 대변인이 됐고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는 모습도 연출했다.
하지만 결국 유명세에 못 이겨 알코올중독에 시달렸다.
그러나 올드린은 강인한 우주비행사답게 알코올중독을 이겨냈다.
이후 여러 행사 등에 초청되는 단골 연사로 인기를 모았다.
올해 3월 달 착륙 50주년을 미리 기념해 열린 역대 아폴로 우주비행사들의 만찬 모임엔
화려한 은색 수트와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등장했다.
수트엔 각종 행성이 프린트되어 있었고, 양말은 성조기의 별과 줄무늬 패턴을 골랐다.
암스트롱과 달리 어느 정도까지는 대중적 인기를 즐긴 그다운 복장이었다.

아폴로 11호 이외에도 NASA의 아폴로 프로젝트의 주인공 중 상당수는 우주 탐사 이후 기구한 삶을 살았다. 이런 이들의 비극적 삶을 조명한 책까지 나와 있다.
영국 작가 앤드루 스미스가 쓴 『달의 먼지: 지구로 떨어진 인간을 찾아서』에 따르면
아폴로 15호의 조종사 제임스 어윈은 종교에 심취해 노아의 방주를 찾겠다며 6차례 탐험대를 인솔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와 함께 아폴로 15호에 탑승했던 찰스 듀크는 알코올중독에 빠졌고 이후 종교에 귀의했다.
듀크 “달 탐사는 내 인생의 오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미스에 따르면 아폴로 프로젝트에 따라 달을 탐사했던 14명 중 10명은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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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지 않는 '역사의 3등'… 달 착륙 50년 뒤 영웅으로


조선일보
                         
             
입력 2019.07.18 03:00

조명받는 아폴로 11호 우주인 콜린스 - 달 표면 밟지 않고 사령선에 남아
당시 모습 시적·철학적으로 묘사… 50년 기념식에 유일하게 참석

인류 최초의 달 탐사에 성공한 아폴로 11호의 주인공들이 1969년 7월 발사를 앞두고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촬영한 사진. 왼쪽부터 달에 인간의 첫 발자국을 남긴 닐 암스트롱 선장,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 그리고 달 표면 탐사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이 서열순으로 앉았다.
인류 최초의 달 탐사에 성공한 아폴로 11호의 주인공들이 1969년 7월 발사를 앞두고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촬영한 사진.
왼쪽부터 달에 인간의 첫 발자국을 남긴 닐 암스트롱 선장,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
그리고 달 표면 탐사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이 서열순으로 앉았다. /AP 연합뉴스



달 코앞까지 가고도 달에 발자국조차 남기지 못했던 '잊힌 우주인'이
반세기 만에 국보급 영웅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미국에선 오는 20일(현지 시각) 아폴로 11호의 첫 인류 달 탐사 5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당시 우주인 3명 중 유일하게 사령선에 남아 있느라 달에 내리지 못했던 마이클 콜린스(88)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콜린스는 최근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의 아폴로 50주년 기자회견 단독 연사로 초청받은 데 이어
16일 미 항공우주국(NASA)이 플로리다 케네디우주센터에서 개최한 기념식에도 주인공으로 참석했다.
인류 최초로 달에 처음 발을 디뎠던 그의 동료 닐 암스트롱은 2012년 사망했으며,
그와 함께 착륙해 두 번째로 달을 밟은 버즈 올드린(89)은 현재 학계 행사나 언론 인터뷰 등 공식 활동에
거의 참여하지 못하는 상태다.

미 우주업계에선 콜린스가 1974년 낸 회고록(Carrying the Fire)
역대 달 탐사 우주인의 저서 중 최고봉으로 꼽는다고 한다.
최근 50주년 기념 한정판으로 재발간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BBC, 에스콰이어 등에 따르면
콜린스는 여느 '우주 영웅'들과 달리 젊은 시절 성취에 매몰되지 않고
이후 화성 탐사를 연구할 정도로 경력을 발전시킨 프로 우주인이자 공학자이면서
'우주의 시인·철학자'로 불릴 정도로 후배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시사 주간지 타임
"역사의 무대 뒤편에 있던 3인자가 이후 얼마나 풍요롭고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했다.

콜린스는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가 달에 도착했을 때 달 궤도상 사령선(command module)에 남아 탐사 대원을 보호하고 시스템을 점검하며 관제센터와 교신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아폴로 선장은 암스트롱이고 콜린스가 2인자였지만,
서열 3위인 올드린이 사령선을 단독 조종을 할 경력이 안 돼 콜린스가 남게 됐다.
암스트롱올드린이 착륙선에 옮겨탄 뒤 달 표면에 착륙하는 역사적 순간을 세계 7억 인구가 지켜보며
환호하는 동안 콜린스는 21시간 반 동안 홀로 사령선을 타고 달 궤도를 빙빙 돌았다.
우주선 내 TV가 없어 동료가 달에 성조기를 꽂는 장면도 보지 못했고,
착륙선 엔진 이상이 감지돼 거기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다고 한다.

콜린스이때 인류 최초로 달의 뒷면을 직접 관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 공전과 자전 주기가 같기 때문에 지구에선 달의 한쪽 면밖에 보지 못한다.
그가 당시 지구와의 교신마저 끊어진 상태에서 48분간 홀로 달 뒷면을 관측하는 동안
'이곳을 아는 존재는 오직 신과 나뿐이다'라고 쓴 메모가 뒤늦게 공개됐다.
이 때문에 '태초의 아담 이래 가장 외로웠던 인간'으로 불리기도 했다.

아폴로 11호 실었던 실물 크기 로켓 영상 16일(현지 시각) 미국 수도 워싱턴DC 한복판에 있는 워싱턴 모뉴먼트(Washington Monument)에 로켓 ‘새턴 5호’의 110m 실물 크기 영상이 투영돼 있다. 새턴 5호가 실은 아폴로 11호는 50년 전인 1969년 7월 16일 발사돼 20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에 착륙했다.
아폴로 11호 실었던 실물 크기 로켓 영상 -
16일(현지 시각) 미국 수도 워싱턴DC 한복판에 있는
워싱턴 모뉴먼트(Washington Monument)에 로켓 ‘새턴 5호’의 110m 실물 크기 영상이
투영돼 있다. 새턴 5호가 실은 아폴로 11호는 50년 전인 1969년 7월 16일 발사돼
20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에 착륙했다. /신화 연합뉴스

콜린스는 16일 NYT 인터뷰에서 당시 감정에 대해

"외롭지 않았다. 거기선 내가 사령관이고 왕이었는데? 그동안 커피도 식지 않았었고"라며 웃었다고 한다.

수십년간 두 동료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한 데 대해서도

"업무 영역이 달랐을 뿐이다. 내가 한 일에 전적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실제 핵심 업무를 해내고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콜린스에게 미안해하던 NASA 측이

이후 달 탐사선 아폴로 17호 선장직을 제의했지만

"가족에게서 더 이상 멀어지고 싶지 않다"며 이듬해 은퇴했다.

이후 국무부 차관, 국립항공우주박물관 부관장 등을 거치며 계속 경력을 쌓았다.

2014년 별세한 아내와도 해로했다.

한 전문 매체에 따르면 콜린스는 50주년 회견에서

"인간이 우주를 탐사하는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란 질문을 받고

"나는 잠시 우주선 창에 꽉 찬 지구를 한눈에 봤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 각자의 창으로 세상을 보고, 그 속에서 미래를 만들어가지 않는가"라고 답했다.

우주 탐사가 극소수에게 허락된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성의 발견을 위한 것이란

노(老)우주인의 답에 좌중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영웅이 되지 못해 섭섭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엔

"영웅이 되고 싶으면 병원 응급실 의사가 되어야지"라면서

"우주인은 영웅을 논하는 직업이 아니라 자기가 맡은 작은 임무를 완수하는 데 목숨 거는 일"이라고 했다.

아폴로 11호의 3인방은 모두 1930년생 이었다.

달에 다녀온 후 삶은 극명하게 갈렸다.


내성적이었던 암스트롱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면서도 유명세 자체를 괴로워했고,

어린 딸이 사고로 사망한 뒤 이혼하고, 심장병을 앓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올드린은 가장 먼저 달에 내리지 못했다는 분노와 열등감 그리고 목표 상실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혼외정사 스캔들과 알코올중독, 두 번의 이혼을 겪으며 재정적 어려움도 겪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18/20190718001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