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 일기]
한 교수의 얘기다.
나는 대학을 중심으로 학계와 사상계에 관심을 가졌다.
한 교수와 그런 얘기를 하다가,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도 같은 변화를 겪었다고 말했다.
김일성 정권이 정착되면서 종교계의 지도자들과 신앙인들은 북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국군의 중역을 맡은 백선엽, 채명신 장군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한을 떠났다.
서북 지역 지성인들도 38선을 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주와 사업가들은 숙청당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정치와 무관하게 조용한 개인 생활은 허락되었다.
그러나 공산 치하에서는 공산주의와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 없이는 살 수가 없었다.
자유를 향한 탈북이 불가피했다.
그와는 반대로 남한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따라 북으로 갔던 지성인들은 점차 숙청당해
남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내 친구이던 허갑은 공산당 선전부장이었다.
김두봉과 같은 연안파여서 당 교육기관으로 밀려났다가 아오지로 가게 되면서 자살했을 정도였다.
경성제대 때 한국의 세 수재 중 한 사람으로 꼽히던 박치우는 북으로 간 뒤 소식이 없다.
그의 친동생 박치원은 나와 동창이었고 그 부친은 목사였다.
김일성 왕국에 충성하기에는 양심을 갖춘 지성인들이었다.
황장엽씨가 나에게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김 선생은 선견지명이 있어 잘 떠났습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오늘날 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내 친구 안병욱 교수와 하던 얘기가 있다.
그것은 "만일 그 당시에 대한민국이 우리를 따뜻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는 넓은 세계 어디에선가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겠지요? 조국을 빼앗긴 유랑민으로.
돌이켜보면 대한민국이 베풀어 준 빚을 다 갚지 못하고 갈 것 같아요"였다.
안 선생은
"(북한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 가서 용서를 빌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내 심정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