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군이 세 번째 대패한 칸나에 평원
![송동훈 문명탐험가](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6/13/2019061300360_0.jpg)
"교육이란 게 참 무섭다."
처음 칸나에에 갔을 때 동행했던 방송 PD가 독백처럼 던진 말이었다. 그때 우리는 칸나에 평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고고학 발굴지인 언덕에는 먼 옛날 있었던 전투를 기리듯 부서진 칼럼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알고 보면 그 전투와는 상관도 없는 기둥이다. 그날따라 비가 왔다. 촉촉하게 칸나에를 적시는 비를 맞으며 우리는 상념에 젖어 있었다. 감정이 묘했다. 역사책에서나 있을 법한 '칸나에'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서 그 옛날 무려 7만에 달하는 로마군이 몰살당했는데, 평원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평온했기 때문이다. 침묵을 깨는 독백은 그때 튀어나왔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대답이 이랬다.
"한니발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로마에 대한 증오를 배웠다는데 결국 이곳 칸나에까지 와서 수만 명의 로마군을 몰살시키지 않았느냐? 아버지 하밀카르의 집요한 교육이 없었다면 칸나에의 비극도 없지 않았을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하밀카르의 교육이 한니발을, 유독 로마를 미워하고, 로마를 이기기 위해 평생을 바치도록 한 건 맞는다. 그러나 그런 교육이 없었어도 한니발은 칸나에에 섰을 것이다.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함께 살 수 없듯이, 지중해에 두 제국이 공존할 수는 없었다. 로마와 카르타고,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했다. 그리고 한니발은 카르타고 주전파의 리더였다. 칸나에는 그의 운명이었다.
로마는 포기하지 않는다
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기원전 241년)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를 토대로 권토중래를 꿈꿨던 카르타고의 주전파는 한니발의 기치 아래 이탈리아로 진격해 들어왔다. 그들은 알프스를 정복했다. 트레비아 전투(기원전 218년)와 트라시메노 전투(기원전 217년)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연이어 대승을 거뒀다. 트라시메노 전투 결과,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 전체를 잃었다. 로마로 가는 길이 한니발 앞에 뚫렸다. 순간 패닉에 빠졌으나 로마는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로마로 이어진 티베리스 강의 다리를 부수고, 성벽을 보수했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에 임명했고, 새롭게 군단을 재편성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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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싸워야 한다
독재관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냉철하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한니발은 천재다. 나를 비롯한 로마의 그 누구도 한니발과 견줄 수 없다. 그러므로 정면 대결은 피해야 한다. 대신 한니발의 대군은 원정군으로 약탈에 보급을 의존하고 있다. 소규모 전투로 전력을 약화시키면 천하의 한니발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그의 전략은 단순했지만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지구전(持久戰)에 돌입했다. 효과는 있었다. 최소한 더 이상의 패배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처음부터 오래 지속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로마인은 비록 패배자였지만 비겁자는 아니었던 까닭이다. 한니발 군대가 이탈리아 반도를 휩쓸며 약탈하는데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싸우다 죽은 수만의 동료 시민들에 대한 복수를 외면하는 것은, 로마인의 기질에 맞지 않았다. 독재관에 대한 비난이 빗발치고, 원성이 높아졌다. 분노한 민심을 자기 출세의 기회로 이용하려는 이기적인 정치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한다. 로마라고 예외일 리 없다. 주전파들이 설쳐대기 시작했다. 다시 전쟁의 파고가 높이 일었다.
아, 칸나에!
로마의 시민들은 압도적인 지지로 가장 강력하게 전쟁을 주장한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를 새로운 집정관에 선출했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동료 집정관으로 선출됐다. 바로는 무능했다. 로마사의 권위자인 테오도어 몸젠의 표현에 따르면 '내세울 만한 것은 천한 가문과 안하무인의 파렴치한뿐'인 자였다. 이성의 실종과 자격 없는 리더의 등장. 거대한 비극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로마는 한니발과 싸우기 위해 로마 역사상 유례없는 대군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무려 8개 군단이 신임 집정관들과 함께 한니발을 향해 출전했다.
![로마군은 무적이 아니었다. 한니발 전쟁에서 알 수 있듯이 연이어 대패를 당한 적도 있다. 그러나 전투에 져도 결국 전쟁에는 이기는 것이 로마군이었다.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패배에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6/13/2019061300360_2.jpg)
이때 블랙코미디 같은 일이 발생했다. 누구보다 큰 소리로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지구전을 비난했던, 누구보다 자신 있게 한니발을 상대로 승리를 장담했던, 누구보다 무모하게 칸나에에서 전투를 이끌었던 바로가 살아남은 것이다.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재빨리 도망친 덕이다. 7만명이 넘는 병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총사령관은 뻔뻔스럽게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로마로 돌아왔다.
![칸나에 전투 위치 지도](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6/13/2019061300360_3.jpg)
만약 이런 일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니 다른 나라였다면 어땠을까?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로마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책임 소재를 둘러싼 공방도, 바로에 대한 비난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원로원 의원 전원이 성문까지 나가 바로를 맞이하며 '조국을 포기하지 않고 돌아온 것'에 감사를 표했다. 참사를 미사어구로 감추려는 허언도 아니었고, 가련한 사내를 향한 조롱도 아니었다(몸젠'로마사'). 트레비아, 트라시메노에 이은 칸나에의 패배로 로마는 12만명에 달하는 병사를 잃었다. 당시 인구수를 고려하면 '회복 불가능한 손실'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비방이나 책임 공방이 아니라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국가를 구하고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마인들 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화합을 이뤄야 했다. 바로를 향한 감사는 이를 위한 처절하고 현실적인 몸부림이었다. 로마는 아직 지지 않았다.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대역전극은 화합을 통해 시작될 참이었다.
[패전 장군 처벌 않는 전통, 로마군 최강으로 만들어]
고의 아닌 실수·무능이므로 처벌하면 위축될 뿐이라 생각
책임 추궁, 권력투쟁화 우려도
로마 군대는 어떻게 최강의 군대가 됐을까? 많은 이유가 있지만 로마가 현장 사령관에게 폭넓은 재량권을 부여했고, 패전의 경우에도 장군에 대해 도를 넘는 처벌을 하지 않는 전통도 중요하게 손꼽힌다(마키아벨리'로마사논고'). 이는 로마의 전쟁과 인간에 대한 인식과도 관련돼 있다.
로마인은 누구도 패전을 원하지는 않는다고 봤다. 패배는 고의가 아니라 실수이거나 무능에 기인했다. 여기에는 패전 장군이란 오명만으로도 당사자에게는 충분한 벌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패전에 대해 과도하게 책임을 물으면 현장에 나가 있는 장군들이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장군들이 움츠러들면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로마는 기본적으로 집정관과 법무관 같은 고위 정치인들이 사령관을 맡았다. 그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는다는 미명하에 결국 정적을 제거하는 기회로, 정치적
투쟁으로 변질될 우려가 컸다.
실제로 한니발 전쟁 과정에서 로마가 대패했던 트레비아, 트라시메노, 칸나에 전투는 총사령관이 모두 평민파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귀족들이 패전을 이유로 이들을 제거했다면 정치 투쟁에서는 승리했을지 몰라도, 로마는 분열로 멸망했을 것이다. 원로원이 칸나에의 패전 장군인 바로를 비난하지 않고 따뜻하게 맞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